당신도 삶에 지칠 수 있습니다
본문
당신도 삶에 지칠 수 있습니다
왕상19:1-8
성경에서 엘리야의 활약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편의 007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스릴이 넘칩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스릴 넘치는 사역을 펼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멋진 주인공이 금방 독약이라도 깨물고 자살이라도 할 것만 같은 모습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1.고독 때문이었습니다.
1)육체적인 고독입니다.
건강할 때는 내가 나를 생각해도 내가 꼭 필요한 것 같고, 다른 사람한테도 내가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중한 병이나 장기 환자가 되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쓸모가 없구나,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귀찮은 존재로구나 생각하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부인하고 고독에 빠져듭니다.
또한 늙는다는 것도 고독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듯이 느끼며,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소외감을 느끼며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2)정신적인 고독입니다.
나는 인생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가만히 돌이켜 보니 전부가 실패요, 완전한 실패임을 시인해야 하는 그 순간에 우울증이 찾아오고 고독이 밀려옵니다.
3)영적 고독입니다.
욥13:24절을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라고 욥이 부르짖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잃고, 가정을 잃고, 친구를 잃고, 명성을 잃고... 다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정이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마저 얼굴을 가리우고 나를 떠나신 것 같을 때, 무서운 낙심이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실까? 살아계시다고 해도 나같은 것을 사랑하실까? 라고 회의심을 품게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고독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독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야가 우리에게 깊은 고독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엘리야의 모습은 너무 너무 멋있고,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인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엘리야를 생각하면 "그는 어떻게 이런 믿음이 가능했을까?" 그는 우리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야가 크지 않은 한가지 문제 앞에서 하나님 앞에 죽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엘리야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 앞에서 실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한 나머지 이젠 더 이상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 목숨을 수 없어서 "하나님 이제는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도 이런 체험을 한두 번 해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제라는 것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이렇게 엘리야가 인생을 포기하고 기도를 하게 된 이유는
1)이세벨의 협박이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정말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한번 기도해서 하늘에 불이 떨어지게 함으로서 온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게 만들었고, 바알 신의 거짓된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토록 권력을 잡고 천하무적으로 살아가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백성들에게 모두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아합왕이 그 사실을 다 이세벨에게 고합니다.
이 아합왕만큼 아내의 악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아합왕이라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는 하나님 앞에 두손들어 항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하는 짓이 집에 돌아가 "여보 여보, 글쎄 말이야..." 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일어난 현상을 다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2절을 보면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섬기는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무서운 장담과 호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서운 협박 공갈 앞에 엘리야는 그만 낙심하고 도망하여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나를 지금 데려가 달라고 지금 자살 기도를 하고 있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2)문제만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엘리야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피상적이고 외부적인 원인보다도 훨씬 더 깊은 원인이 그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엘리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인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유형의 문제들을 겪을 때, 그 문제들 앞에서 낙심하고,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우리를 떨어뜨리는 바로 그러한 문제들이 오늘 엘리야의 모습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3.이 사건의 핵심 메시지는 엘리야가 왜 낙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1)엘리야가 잘못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가 그 형편을 보았다"는 것은 내가 이제 곧 이세벨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이라는 상황을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보기는 보았으나 잘못 보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정말 죽게될 상황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본 것이요, 자기가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갈멜산 싸움으로 인해서 모든 백성들은 누구편이 되었습니까?
엘리야 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850명을 다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민심을 잃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서 왕을 쉽게 갈아 치워버리는 그런 때였습니다.
열왕기 상하를 보시면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쉽게 해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엘리야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지금 엘리야에게 협박 편지만을 보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세벨이 정말 엘리야를 죽이길 원했다면, 몰래 자객을 보내거나 군대를 파송할 것이지, 왜 죽이겠다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그것은 엘리야를 죽일 수는 없고, 다만 협박 공갈로 엘리야가 멀리 떠나기를 바랐던 것인데 문제는 엘리야가 이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마땅히 보여야할 한 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굽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보았지만 하나님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3년동안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고, 까마귀를 보내어 떡과 고기를 주시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가루와 기름이 그치지 않게 하셨던 그 하나님.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 한 마디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던 그 하나님.
이적과 능력을 베푸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가지신 그 하나님, 지금 엘리야는 이제까지 믿었던 그 하나님이 보여할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에 부딪친 엘리야의 눈에서 그 하나님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엘리야만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런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나름대로 바른 신앙고백을 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어느날 어떤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믿는 사람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직장의 문제나 사업문제나, 가정문제나, 부부간의 문제나, 자녀들의 문제, 그리고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 등 여러 가지 종류의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낙심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그 문제가 그렇게 낙심하게 만들만큼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는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은 달리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만일 지금 큰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성가대석을 돌아다닌다면 제가 생각하기에 성가대석에 앉아 계신 분들은 다 펄쩍펄쩍 뛰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징그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우리의 기준이며, 시각입니다.
그런데 월트 디즈니라는 사람은 쥐를 징그럽게 보지 않고, 아주 귀엽게 보았기 때문에 "미키 마우스"라는 유명한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결국 그를 만든 것입니다.
2)승리의 영광이 가져다 준 자기 중심적인 기준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엘리야의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 "넉넉하오니 내 열조보다 나는 낫지 못하나이다"는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살만큼 살아보았으나 자기 선조보다 더 나은 줄 알았는데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설정해 놓은 자기 중심적인 기준입니다.
엘리야가 이러한 기준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갈멜산 승리의 영광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여러분, 이 기준은 누가 세웠습니까?
엘리야가 이렇게 자기가 설정한 기준이 생기게 된 이유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성공하고 나면 그 다음에 또 성공해야 되는 줄로 착각하고, 사업에 한번 성공하고 나면 항상 그 사업이 잘 될 것으로 착각하고, 돈을 한번 벌고 나면 항상 내가 부자여야 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운 기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등만 하다가 2등 하면 죽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얼마 전 뉴스에 이런 일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년 내내 1등만 하던 한 학생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1등을 놓치게 되자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는 영광스러운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기준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웠던 그릿 시냇가에서도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배가 고팠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도 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상승궤도를 타고 올라갔던 엘리야는 어느날 갈멜산에서 그 절정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정의 감격도 채 없어지기 전에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협박 편지가 뜻밖에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 엘리야는 낙담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기준 앞에 굴복하고, 오를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고,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낙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로뎀나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로뎀나무는 팔레스틴 사막지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로서 뿌리가 제일 깊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사막에서도 죽지 않고 언제나 꿋꿋하게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뿌리 깊은나무 밑에서, 상황에 흔들리는 엘리야의 나약한 모습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서도 로뎀나무를 보지 못하는 엘리야의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