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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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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마11:28-30
저는 오늘을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매우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한가지 질병의 증세를 묘사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며, 우리의 감성을 혼란시키며, 우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삶의 효율성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이것은 우리의 슬픔을 가중시키고 불안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혈압, 심장마비, 위궤양, 불면증, 알코올중독, 각종 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모든 유형의 현대인들의 질병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80% 이상의 원인 제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 각종 취미활동, 사교활동, 여행, 등산, 에어로빅 혹은 다양한 신체적인 운동의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여유롭게 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만으로 인간은 근본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병원 문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불란서의 한 유명한 정신과 진료실에 한 남자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왔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진료를 하며 적지 않은 시간동안 같이 대화를 나눈 후에 처방으로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일에만 몰두하지 마시고 요즈음 코메디 그리발디라는 유명한 연극 배우가 있는데, 그 배우가 출연하는 재미있는 연극도 보시며, 삶의 리듬을 좀 바꾸어 보십시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매우 무표정한 반응을 보이며, 잠시 후 병원의 진료실을 빠져 내려가면서 그 그리발디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저는 병원이나, 의사 선생님이나, 의약품의 존재를 결코 반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사 그리고 병원과 의료에 필요한 약품들은 우리들에게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다 더 근본적인 정신건강과 본질적인 치유를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의사 한 분을 보내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이천년 전, 정치와 경제적인 여러 혼란 속에서 시달리고 있었던, 그 당시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이런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여러분, 다 내게로 오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에게 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천년 전 유대나라 민중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 인들에게도 아직도 유효한 약속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Good News(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 여러분과 저에게도 유효하지 못한 약속이라면 저는 오늘로 교회 문을 닫겠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를 해야할 아무런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유효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안식,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의 처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단순하지만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처방 앞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1.내게로 오라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이 짊어지고 다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태초부터 계셨기 때문에 그는 인생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수고'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입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죄를 범했을 때부터 수고가 찾아 왔습니다.

범죄한 첫 번째 사람 하와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제부터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여러분, 자식을 낳는 것이 처벌이 아니라 수고가 처벌이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 자매님들이 아이를 낳으실 때 아주 유쾌하게 기분좋게 지금부터 아이를 낳자, 하나 둘 셋……그리고 유쾌하게 출산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범죄한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할 것이라."
이 수고는 단순한 노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말합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에덴의 동산에서 사람들은 경작하며 일하며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 왔을 때 달라진 것은 즐거워야 할 노동이 고통스러운 노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결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토스토엡스키는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의 입술을 빌려서 자주 이 런 말을 되풀이합니다.
"죄인에게는 산다는 그 자체가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따라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 즉 예수가 오신다는 사실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할 것이다"
질고라는 말은 질병, 고통 이런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질병,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고 우리에게는 치유와 안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 앞에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또 하나 내 인생의 짐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서는 기독교라는 신앙을 단순한 종교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싫어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 당시의 대표적인 종교였던 바리새 종교를 향해서 "저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 위에 지워 주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종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회를 하면서도 예수 만나지 못하고, 예수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생활을 하면 교회생활 하는 것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 예수를 체험한 사람에게는 교회생활이 자유의 표현입니다.

종교를 짐으로 생각해서 자기 가정의 종교를 버리고 떠나 젊은 날 인생의 긴 방황 끝에 돌아와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쓴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얘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했지만 젊은 나이에 신앙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신앙론이란 글을 쓰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내가 18세 되던 나이에 내 친구는 나에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것이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그 예수가 안식이라고 믿는다면 여러분에게 오늘 이 처방을 드립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2.내게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어떤 사람들은 배우라는 말만 들어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이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배우라"라고 하면 스트레스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워낙 특공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공대가 무슨 말인지 아십니가?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서 대가리만 큰 사람"을 특공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냥 배우라고 하지 않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오해할까봐 친절하게 30절에 보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내 멍에는 쉽다"라는 단어를 더 정확하게 옮기면 "내 멍에는 편리하다" "잘 맞는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신사복 매장에 가면 우리 몸 사이즈를 측정합니다.
그리고 사이즈에 맞는 양복을 골라서 입게 됩니다.
양복을 입어볼 때 매장의 주인이나 혹은 같이 오신 손님들이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 양복이 참 잘 맞으시네요.
그런데 여기 "내 멍에는 쉽다"라는 뜻이 그런 뜻이라는 것입니다.

멍에는 본래 소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도 농사가 있고, 소가 있고, 멍에를 만듭니다.
그리고 소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을 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멍에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소의 사이즈를 측량합니다.
그 다음에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나의 멍에에 구멍을 두 개 뚫어서 한 멍에 안에 두 마리의 소를 함께 연결시킵니다.
이때 이 멍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그리고 내 짐은 가벼울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일하는 소들은 그 멍에를 결코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멍에는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나를 돕는 도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마치 하늘을 나르고 있는 새들이 날개를 부담스러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소들은 멍에가 있어서 편리하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들을 제대로 부릴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주인은 결코 소들을 일 가운데로 일중독 환자처럼 몰아넣지 않습니다.
적당한 휴식과 일에 리듬을 균형을 맞추어 쉬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여기서 쉼이란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 무한정한 휴식이 아니라 다시 일하기 위해서 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성취해야할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적당한 여유를 갖고 쉬게 하는 안식을 제공하며 내 인생 목표를 향하여 인도해 주시는 놀라우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최근에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전기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가 종교적인 숱한 논쟁을 벌이고 또 캐톨릭에 정치적인 핍박을 받고 그리고 언제 자기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의 긴장 속에서도 마틴 루터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분이 저에게 아주 깊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던 동료 가운데 필립 멜랑크톤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마틴 루터에게 "이번 주말에는 모여서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가 토론을 벌입시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때 루터가 이런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멜랑크톤에게 "섭리의 역할은 섭리 자에게 맡기고 이번 주말에 자네와 나는 낚시질이나 갑시다"
얼마나 여유가 있어요.
그러자 멜랑크톤 이 깜짝 놀라서 아니 지금 이 위험한 마당에 당신은 어떻게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다시 마틴 루터는 메모지로 답변을 해 왔는데 "이것은 주님이 내게 주신 여유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히2:2-3절의 메모를 남겼습니다.
여러분, 히12:2절을 아십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그리고 3절을 보면 "너희도 피곤하고 낙심치 않기 위하여 이 주님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넘어서 견디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리고 그 분이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하신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 여유와 안식 속에서 걸어 갈 수 있는 행복한 인생의 모습이 될까요?

이번 성령축제에 대구 반야월교회를 담임하시는 이승희 목사님을 초청하여 내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이젠 행복을 말합시다"라는 주제의 말씀을 받으며 우리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을 얻고 싶습니까? 안식을 그리워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행복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분,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여 우리 곁에 다가오시면서 오늘 이렇게 약속하시는 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여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초청하시는 예수님을 기대하며 기도하여 큰 은혜를 경험하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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