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게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예수님에게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마가복음 1:35-39
A.W. 토우져는 "열심 있는 그리스인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과오는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짧막한 생애를 사시면서 그분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성취할 수가 있었던 비결이 기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예수께서도 기도생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생활이 어떠했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모범, 즉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을까요?
1.예수님이 하셨던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의 열망입니다.
21절에 보면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라고 했습니다.
안식일날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하시던 중에 예배를 방해하는 귀신들린 사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주목하시며 그에게 들어갔던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귀신과 대결하여 쫓아내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일은 굉장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예배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안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을 위해서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어서 예수님은 안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이 열병에 붙잡혀 누워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고쳐주시기를 요청했고, 예수님이 그 병자를 위해서 또다시 자신의 힘을 소모하시면서 기도하여 그를 고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날 사역에 마지막이었을까요?
32절을 보면 "저물어 해질 때 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지금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이 소식이 퍼지자 병자들이 앞을 다투어 시몬의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병자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습니까?
33절을 보면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마을 안에 있었던 온갖 병자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별별 환자들이 총출동해서 시몬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 왔습니다.
그런데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도를 저물어 가는 밤까지 계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 있어서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 하루였을까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그날의 스케줄 같은 그런 바쁜 하루를 보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아침, 그날은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여러분이나 저 같으면 어떻게 그 아침을 맞이할까요?
늘어지게 잠이나 자자.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보여 주고 있습니까?
35절을 보면 이토록 바쁜 하루를 지내고 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님은 일어나 기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기도를 의무로 생각했다면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이렇게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특권이었고, 기도는 안식이었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고 기도하면서 지나간 하루의 스트레스를 극복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스트레스가 무엇입니까?
요즘 현대인들을 가장 괴롭히는 병이 스트레스입니다.
어떤 분이 스트레스를 정의하기를 "감당하기 어려운 자극에 의해서 내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진 상태"라고 했습니다.
아주 잘 정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기도가 스트레스의 처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피곤해도 즐거운 일하면 그 피곤이 극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에게 있어서 예배는 아주 즐거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나면 새 힘이 나고, 예배에 오면 안식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가 안식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새 힘을 얻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기도는 그 바쁨과 바쁨이 가져다주는 피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용기와 비전과 힘을 얻는 자리였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루터는 매일 한 시간쯤 기도하다가 정말 바빠졌을 때는 두 시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그의 생에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는 하루 24시간 중에서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고자 애를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안식이요, 능력이요, 기도가 즐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기도를 사모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만남이 내가 육신적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어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더 즐거운 사모함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이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살면서 어떤 열망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열망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돈을 얻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인기를 얻는 것이, 어떤 사람은 가장 커다란 소원을 이루고,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집요한 열망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열망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지배하고 있었던 가장 커다란 열망은 하나님과의 교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만나고,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랍고 아름다운 그 임재 속에 내가 들어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기도의 동일한 열망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2.본문에서 우리는 이 교제를 위한 주님의 계획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예수님께서 그 피곤한 안식일을 지내고,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아마 침상에 들어가기 전에 주님이 그 이튿날 아침을 계획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은 기도의 교제를 위해서 주님에게 가장 적합한 시간 과 장소를 의도적인 계획으로 결정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언제 기도하셨습니까? 새벽 미명에.
그리고 어디에서 기도하셨습니까? 한적한 곳에서.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여러분, 만물이 새로운 출발을 기다리며 아직도 잠들어 있는 여명의 시각,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잠들고 있는 새벽의 미명, 이것은 얼마나 기도하기에 좋은 시간이었을까요?
그리고 한적한 곳, 그 누구의 방해를 받을 필요가 없는 골방처럼 아늑한 산자락, 산등성 어느 곳에 주님께서는 낮에 눈여겨 두었던 그 장소를 선택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최적의 시간, 자기에게 필요한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갖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 기도의 학습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 "예수님은 일생동안 새벽기 도하셨으니 나도 마땅히 매일 새벽기도를 해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새벽기도는 필요한 것이며, 유익한 것이며, 거룩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새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감을 얻고 놀라운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벽기도 하는 일을 율법화 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화 시킨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쉽게 말해서 새벽을 통해서 내가 유익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새벽기도 안하는 사람을 정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에 와서 하는 일이 누가 새벽기도에 나왔나? 안왔나? 검사하고 다니는 것이 관심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벽기도를 율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서 전혀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남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중보기도팀이 있고, 또 새벽이라는 시간이 아니어도 제자훈련을 통해서, 또한 매일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Q,T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아름답게 교제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질은 기도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많은 성도님들이 더 열심히 새벽기도와 말씀묵상 그리고 QT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방식보다는 본질이 중요한 것임을 믿고, 기도할 때는 자기에게 필요한 알맞은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의 열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기도를 계획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야구 선수 출신으로 예수님을 만난 빌리 썬디라는 사람이 교회에 나갔을 때 교회 지도자 한 사람이 그에게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세가지를 계획하라. 그것은 첫째, 날마다 15분 기도하고, 둘째, 날마다 15분 성경을 읽고, 셋째, 날마다 15분 내가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단순한 충고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나 단순하면 교회 지도자의 말대로 15분 기도하고, 15분 성경 읽고, 15분 전도를 평생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리그래함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미국에 전도자로써 부상하기 전에 미국땅에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큰 각성의 주도적 역할을 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제가 언제나 강조합니다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입니다.
복잡한 사람은 하나님이 복잡해서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기도시간, 그리고 나만의 기도장소를 계획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영감과 능력을 얻기 위해서 주님 앞에 기도의 시간을 계획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이 하나님과 교제한 결과 어떤 결과가 이루어졌습니까?
36-37절을 보면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님을 찾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기도하던 그 장소까지 제자들이 쫓아와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했던 이 단어는 원문에서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제 안식일 저녁에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새벽부터 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38절에서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찾아와 "선생님 새벽부터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가서 기도해주시고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고요하고 침착하게 "아니야, 오늘은 다른 계획이 있어. 오늘은 다른 마을에 가서 거기서 전도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골든 맥도날드는 말하기를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 삶을 사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소명에 의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그 소명을 따라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바쁘긴 무지무지하게 바쁜데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모르고, 우선순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급한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여유를 잃어버리고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초점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물론 병 고치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병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만큼 이곳에서 전도했으면 됐다. 오늘은 다른 마을에 가서 전도하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걸음 한걸음 옮겨가는 인생 목표가 분명하고, 초점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 병자를 고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복음이 골고루 여러 마을에 전파되는 것이 더 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정한 기도, 참된 기도, 기도의 성숙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기도를 통해서 발견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내가 쓰임을 받는 것이야말로 기도생활의 절정이요, 기도생활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인생 이것이 기도생활의 절정이요, 기도생활의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드디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보를 옮기시는 주님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지막 39절에 보면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많은 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종하셨기 때문에 갈릴리 전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여러분의 기도, 저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축복 가운데 쓰임을 받는 기도의 전사, 그리고 기도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