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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교제가 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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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아름다운 교제가 있는 교회


요한일서1:1-4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그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함께 계시다"는 단어는 "서로를 향하여 움직이고 대화하고 교제하고 계시다"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 사회적인 교제속에 살아갈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도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게 하지 않고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지체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귐의 공동체로서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교제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마다 누구와 교제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모여야 하고, 둘째는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직적 교제와 수평적인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두가지 차원의 교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빠지면 십자가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교제는 이 두가지 차원을 함께 동시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진정한 인간됨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교제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입니다.
3-4절을 보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까지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 철학자 말틴 부버는 그의 유명한 저서 "나와 너"에서 "나와 너"사이에 아무리 최선의 인격적인 교감을 가져도 "영원자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우리의 만남은 온전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두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그 "영원자이신 주님"을 의식중이나 무의식 속에서 찾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주님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사실 요한일서의 중요한 관심은 이 문제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그것은 우리의 어두움, 즉 죄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빛과 공존할 수 없고, 그리고 빛과 어두움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5절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고
1:7에서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빛이신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우리가 어두움가운데 있고, 이 어두움이 우리와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9:1-2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절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요한일서1:1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는 그분을 들었고, 보았고, 주목했고, 손으로 만졌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1:14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였다"고 말했고
요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패션" 즉 고난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멜 깁슨이 제작한 영화 "예수의 패션"에서 그가 전달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기 때문에 그 영화의 첫 장면을 이사야 53:5절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다같이 요한일서1:7절을 읽어봅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제 우리가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드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그분에게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순간이 바로 이 빛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나의 사귐이 회복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요한일서1:8-9절을 읽어봅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으로 동시에 죄사함의 거룩한 기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능력과 죄의 자백은 지금도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거룩한 사귐을 유지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보혈의 능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자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맘껏 누리는 것은 성도의 특권인 것입니다.

2.다른 성도와의 수평적 사귐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너희와 우리의 사귐"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똑같은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 예수를 만났고, 함께 그를 보았고, 그의 살고 피를 함께 먹었고, 함께 그를 만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서로 만나면 예수님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서 예수님를 찬미하고,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코이노니아, 즉 성도의 교제요,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해 얻은 힘을 가지고, 우리는 아직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다른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4절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또한 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1773년 영국 웨인스게이트(Wainsgate)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저술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게 목양하던 존 퍼셋(John Fawcett)라는 침례교 목사님이 런던 대도시 교회의 초청을 받아 44년이상 목회하던 시골 교회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마차에 얼마간의 이사짐을 실은 다음 목사관을 막 떠나려고 하던 참에 마중 나온 성도들이 차마 더 좋은 여건의 목회지로 떠나는 목사님 내외를 붙잡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모님 메리 퍼셋(Mary Fawcett)이 갑자기 땅에 주저앉으면서 자기 남편에게 "여보, 난 여기 못 떠나요. 이 형제 자매들을 두고 난 떠날 수 없어요"하고 통곡하며 울기를 시작하자 삽시간에 교회 마당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잠시 후 존 퍼셋 목사님은 자기 부인에게 "여보, 짐을 다시 들여놓읍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이곳, 그보다 더 좋은 교회가 어디 있겠오"라고 말하고 다시 목사관으로 들어온 목사님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작시한 찬송이 525장 찬송입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 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리"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지만, 또한 인간과의 교제를 경험하며 살아갈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느 성탄절에 우체국에 연세 높으신 할머니 한 분이 긴 줄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직원 한 분이 "할머니,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대답하기를 "네, 우표, 두장 살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직원이 "할머니, 우표는 저기 스탬프 기계에 돈 넣으시면 나오는데요"했더니 할머니가 대답하시기를 "알아요. 그런데요. 저 기계는 저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저에게 잘 지내셨느냐?,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시냐?, 손자들 잘 있느냐?고 묻지를 않아요"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작은 소그룹공동체인 목장교회에서의 교제를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이런 교제를 기뻐하시며 기대하십니다.

시133:1절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를 믿는 두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곳에 당신이 거기에 있을 것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교제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때로는 인간상호의 교제가 위기를 만날 때에도 그는 우리의 교제의 중보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현의 성도 여러분!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며, 인간관계의 모든 위기를 넘어서서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그 끝없는 사랑의 기쁨과 승리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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