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당신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베드로전서1:3-7
주후 64년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였습니다.
왜냐하면 주후 64년 7월 19일 로마시 전역에 영향을 줄만큼 큰 화재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화재가 진압된 후 로마시에는 한 악성 소문이 소리 없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로마제국 황제 네로가 술에 취해 자신의 시흥을 돋구기 위해서 로마시를 방화한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황제 네로는 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희생양으로 등장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피비린내 나는 처형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의 동굴(공동묘지)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떠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해외 여러 지역 특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 전서는 이때를 전후해서 쓰여진 서신이었습니다.
벧전4:12-13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며 그 시대적 배경을 잘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벧전1:1의 편지 서두의 수신자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신앙의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가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이런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1세기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분명 다른 시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인 테러,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조롱과 박해가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때에 희망은 여전히 우리가 갈구하는 목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1.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이유는 소망 없이 살고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나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소망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거짓되거나 일시적인 소망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소망은 진지한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 곧 죽을 수 없는 살아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영국의 목공소에서 일하던 가난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청년이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그는 인생의 소망과 의욕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한 10년 일하고 난 후, 그는 드디어 가구 제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되어 돈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자기 공장 뒷편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책하다가 넓직한 바위를 발견하고 걸터앉아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가슴에 밀려오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가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자기가 걸터앉은 바위가 자신을 편안히 받쳐주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 받쳐주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복의 근거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 살아 계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 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 시가 바로 찬송가 539장(Edward Mote의 시)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여러분,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소망의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이 땅을 살게 하시는 것은 이 소망을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서 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3:15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런 소망을 나누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28:20절을 보면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 이것만이 우리의 가장 진지한 희망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하늘나라 기업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있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의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증된 기업입니다.
오늘날처럼 격동하는 시대에서 기업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우리의 기업들이 불확실한 기초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가를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가지는 모든 세속적인 희망이 다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기업들이 어느 한 순간 흔들리고 무너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천국의 기업만은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할 수 없는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바람이 흔들어 댈 수 없는 하늘에 예비된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이런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썩을 것이고, 더럽혀질 것이고, 사라져 버릴 기업에 미련을 두고 살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고 제가 오늘 기업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의욕을 꺽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궁극적인 소망만은 거기에 두셔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히려 소망을 이 땅이 두지 아니하신 분들이 기업을 하신다면 훨씬 자유롭게 욕심 없이 섬김의 정신으로 기업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39장을 작사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분이 그랬습니다.
그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욕심없이 가구업을 하다보니 기업은 점점 더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천국의 소망을 이웃들에게 더 전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그의 기업과 재산을 정리한 후 교회당을 짓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복음 전하는 일에 20년 이상 헌신하다가 그의 나이 77세 되던 해에 그는 평소의 소원처럼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부르심을 받아 그가 소망하던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여러분, 이 찬송가의 4절을 기억하십니까?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변할 수 없는 천국의 소망, 이 소망이 있음으로 우리는 고난의 시대를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능력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지켜지도록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두 가지 면에서 특히 성도들에게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도록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시험이나 시련 속에서도 잘 버티도록 그의 능력으로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한번 얻은 구원이 언제라도 다시 잃어 버려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언약하시면서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선물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10:28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신학에서는 "영원한 안전, 혹은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시험과 시련을 버티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시지 않느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오늘의 본문은 우리의 인생의 삶에 이런 시련이 허용되는 이유가 우리의 인격적인 연단을 위해서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마치 불을 통과한 금이 아름답게 제련되는 것처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빚어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를 능력으로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처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당시의 세상을 이긴 비밀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소망과 능력을 경험하며 승리하는 삶을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나에게 하늘나라 기업이 예비 되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능력이 나를 보호하심을 믿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