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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가 힘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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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살아가기가 힘드십니까?


고린도후서1:8-11
최근의 우리 한국사회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달라진 것이 자살율의 급격한 증가입니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 신문 보도에 의하면, 10년만에 자살율이 2배 이상으로 뛰어 올라 최근에 한국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하였는데, 처음으로 자살로 죽은 사람이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많아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석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의 징후는 특히 젊은이들의 자살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 생기 발랄하게 희망을 말해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이 절망한 이런 사회 속에 우리는 과연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런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유명한 바울 사도에게도 절망은 낯선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살 소망이 끊어 졌다"라고 바울 자신도 절망적인 때가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망했지만 절망 속에 빠지지 않고, 그는 오히려 그의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절망을 희망의 시작이 되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1.우리는 절망의 현실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한국사회가 미래 지향적인 밝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이나 아픔을 표현하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성숙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람들은 보통 누가 배고프세요? 물으면 우리는 대부분 사실은 배고프면서도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한국에 초기 외교관이요, 선교사이었던 알렌은 한국인에게는 Yes가 No요, No가 Yes라는 것을 알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한 어려움을 조금도 은폐하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고 있습니다.
8절에서 그는 자기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는데 그것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심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이 환난이 어떤 어려움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행19장의 은장색 데메트리오 사건 때 받은 어려움이거나 아니면 그가 전도하다가 체포되어 고전15:32에서 맹수와 싸워야 하는 죽음을 앞에 두고 경험한 절망감이었을 것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여하튼 그는 이런 절망감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표현과 고백이 건강한 것입니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해야 치유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병은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절망스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이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원하신다면 무엇보다 자신의 절망감을 은폐하지 말고 절망을 시인하며 주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2.우리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절망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9절을 보면 바울은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적당한 고난을 만나면 자신의 힘과 지혜로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정말 큰 고난을 만나면 절망합니다.
그런데 이런 때야말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죽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시간인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체험이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자식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생산의 능력이 다 죽었다 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삭이라는 기적의 아들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 아브라함의 사건에 대하여 롬4:18-19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고
히1:12에 보면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같이 생육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와 같은 절망한 사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바울은 이런 믿음의 조상들의 경험과 과거에 자기를 도우신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도우시는 것과 미래도 나를 도우실 것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이같이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여러분, 이제 더 이상 바울의 고백은 절망이 아닙니다.
그는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존 F.케네디는 "큰 위기는 우리를 큰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큰 사람으로 만드는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큰 위기가 왔습니까?
절망하십시오. 그러나 그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이제 곧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기적이 시작될 것입니다.

3.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움을 받을 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돕습니다.
그때 우리를 돕는 자들은 우리에게 작은 하나님,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에는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베푼 작은 도움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주의 도움을 구하고,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제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 후 그의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돕기 때문에, 사람의 도움은 내게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제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면 하나님의 은사가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사로 우리자신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으며, 우리 또한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희망의 도움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말의 격려를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로 도움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이웃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따스한 이야기를 전하는 "연탄길"이라는 책에 보면 "소중한 희망"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3층집 벽돌건물 1층에는 "병희"라는 이름의 화가가 경영하는 화실이 있었는데 같은 건물 3층에 최근에 새로 이사온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늘 아기를 업고 3층을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층계를 오르내릴 때 보면 늘 한쪽 눈을 꼭 감고(외눈이 아닌 듯 한데도)마치 시각 장애인처럼 더듬으며 걷는 이상한 습관이 눈에 띄어서 별 이상한 여인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여인이 비를 피하기 위해 화실에 들어와서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뜻 밖에 이 여인이 업고 다니는 아기의 오른쪽 눈이 흉하게 감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 여인은 아기의 사진 한 장을 내 놓으면서 "화가 선생님, 이 아기의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 줄수 있느냐"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가능하다고 했더니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우리 아기의 오른쪽 눈을 정상으로 예쁘게 그려줄 수 있으세요?"하더랍니다.
이 엄마된 여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그럴수 있지요"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화가는 그날 온종일 정성을 다해 이 아기의 인물화를 그렸습니다.
물론 이 아기의 오른쪽 눈을 긴장하며 진지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려주었습니다.
여인은 너무 좋아하며 그림을 가져가더니 얼마 후 자기 집에 이 화가를 초청했습니다.
화가 선생님이 3층집을 방문했을 때 좁은 거실의 한쪽 벽에는 자기가 그린 아기그림이 소중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 그림이 너무 좋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화가 선생님, 저는 이 아기에게 꼭 이런 눈을 주고 싶어요. 아기가 조금 더 크면 저의 눈을 이식해 줄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아기도 예쁜 눈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한쪽 눈으로 사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한쪽 눈으로 밥먹고, 한쪽 눈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한쪽 눈으로 길을 걷고요. 그래도 저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 순간 비로소 화가는 이 여인이 한쪽 눈을 감고 다닌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이 엄마는 자신의 눈으로 아기의 희망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을. 그리고 또한 이날 화가 선생님은 난생 처음으로 자기의 그림이 한 여인과 아기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기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이웃들에게 이런 희망이 되어주는 마음들이 존재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는 사탄의 일은 희망을 파괴하고 희망을 빼앗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롬5:5절에서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에서 주님은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최후의 절망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질머지고 죽으셨을 때 우리의 절망도 거기에서 죽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에서 다시 사셨을 때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자들에게 절망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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