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사랑합시다
본문
서로를 사랑합시다
요13:34-35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이라는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교회는 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기독교가 소위 국교화된 다음부터의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정교회가 없어지고, 예배당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한 다음부터 일어난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가정"과 소그룹모임인 목장교회라는 사랑의 현장을 잃어버리자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작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가룟 유다가 자리를 뜨자 그들을 위해 유명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12명으로 구성된 목장 교인들에게 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생활수칙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그 동안 저는 2년 전부터 고현교회 공동체 안에 왜 목장교회가 중요한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사랑의 명령은 왜 중요합니까?
주님의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란 결코 처음 이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옛 계명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나타난 모든 계명을 요약하여 그것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본래 이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란 독선에 빠진 나머지 이웃사랑의 책임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오늘날 우리교회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명령이며, 새로운 기대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선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해도 좋고, 사랑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명의 제자공동체는 바로 이 사랑의 숙제를 풀어야 할 사랑의 교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과거에 교육현장에서 콩나물시루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한 교실 안에 학생들이 과다하게 많을 때 선생님에게는 학생들 하나 하나에게 신경 쓰는 것이 불가능했고, 숙제검사조차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스타일이 만일 교회의 주일예배 중심이라면, 우리에게는 사랑을 배울 기회도 실천할 공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목장교회 안에 들어가 10명 내외의 이웃들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면, 자신도 변하고 공동체도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작은 목장교회를 진실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이 세상을 향하여 할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2제자를 택하여 공동체가 되게 하신 주님의 기대요, 우리교회가 목장교회로 새롭게 출범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 기초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기대요, 마지막 기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사랑의 명령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하면 됩니다.
3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앞서 선행하는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랑의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이웃의 발을 씻기는 일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팔아 버리고자 한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주신 일입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버렸어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자기를 버렸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이런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의지적 결단이란 감정적 결단과 비교하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감정적으로는 사랑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올바른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에메드 팍스라는 분이 사랑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한 글을 보면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히 사랑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만찬의 식탁에서 그에게 사랑의 잔을 건네어 주셨습니다.
네델란드의 할머니 코리 텐붐이라는 여인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언니와 자기의 생명을 집요하게 위협했던 나치당원이었던 라벤스 부르크 수용소의 간수를 만나 먼저 용서의 악수의 손을 건넸습니다.
그리고 코리 할머니는 말하기를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의지적 결단을 먼저 했을 때에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도움도 따라올 수 있었다"는 유명한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사랑의 명령의 실천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철야기도를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뱃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통달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성경지식을 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지식도 우리의 뱃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아직도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세상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작은 공동체인 목장교회에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선교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선교의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사랑의 실천을 외면한 까닭일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1세기의 세상을 바꾼 현저한 이유중의 하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 직전에 기록된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 목장교회 안에 있었던 사랑의 교제, 이것이 불신자들을 믿음의 교제 안에 끌어들인 자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애절한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가운데 앨리스라는 공주(Princess Alice)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장티푸스라는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왕실의 주치의는 공주에게 그 병의 전염성 때문에 딸과의 신체적 접촉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중에 딸의 고통스런 소리를 듣고 공주는 잠을 깨었습니다.
딸에게 달려가 보았더니 고열로 헛소리를 하며 공주 엄마에게 "엄마, 키스해주세요"(Mamma, kiss me!)라고 했고, 공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딸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얼마 후 공주는 이 병에 감염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공주에게 "공주님,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라고 말하자 공주는 대답하기를 "내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앞으로 열 번이라도 키스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주는 갔지만 딸을 살렸고, 영국인들에게 사랑의 영원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랑으로 내 가정이 살아나고, 내 이웃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면, 우리도 이제 사랑의 실습장인 우리의 가정으로 그리고 확대된 우리들의 영적 가정인 목장교회로 돌아가셔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의 가신 길을 따랐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꼭 가야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