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해결 자이신 왕이 오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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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해결 자이신 왕이 오셔야 합니다
마가복음 11:1-10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는 로마로부터 임명받은 분봉왕이라고 일컬어지던 헤롯왕이 다스리고 있었고, 로마에는 매우 강력한 군주였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새로운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23:5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날, 이른 아침부터 예루살렘에는 이 새로운 왕에 대한 커다란 흥분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와 그리고 진정한 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에 대한 이 기대는 바람직한 기대였고 이것은 오늘 우리도 그런 기대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또 우리의 살림살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지도자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지도자의 존재는 매우 소중한 것이고, 언제나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분적인 통치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통치자로써의 왕, 즉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이 나라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 나라로 바뀌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천년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맞이했으며, 그리고 어떤 태도로 맞이했어야 했었는가? 를 조명하여 은혜 받기를 축원합니다.
1.우리는 왕의 계획을 신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옛날 구약의 유월절에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죽어야만 했었던 어린양과 같은 존재로 "세상의 죄를 구속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가 정확하게 유월절을 앞둔 엿새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성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감람산에 오르셨습니다.
이 산 마루에는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들어서면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한 마리의 나귀를 찾고 계셨습니다.
1절을 보면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필이면 여기서 나귀 새끼가 등장했을까요?
스가랴서 9:9절에 보면 예수님의 이 사건이 있기 520년 전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찌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타셔야 할 나귀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2절을 보면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고.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나귀 새끼 한 마리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과 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4-6절에 보면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분이 약속된 메시아요, 그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은 이 사건이 하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이라면 그분이 만물의 영장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계획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되는 그 정도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그 계획 속에서 오늘 하루하루의 삶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 삶이 이 땅에서 허무와 갈등과 고뇌에 찬 인생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예수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왕의 구원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뭇가지와 종려나무가지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바닥에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로써 예수를 왕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군중들은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예수에게 기대했던 구원에는 다소간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에게 걸었던 메시아로서의 기대는 로마 정권을 때려부수고,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치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대한 그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걸어야 할 기대는 단순한 정치적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기득권 세력들은 "만약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우리의 입지는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왔던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관련이 없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세속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휠씬 더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나라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어떤 정치나 경제나 외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깊은 것으로 시작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왕. 그래서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 속에서 높임과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그 분이 오시면 당장에 로마를 박살 낼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한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셨다면 그 분은 탱크와 군마를 타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쓰면서도 그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동물이 나귀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귀 중에서도 건장한 나귀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고 터덜터덜 들어오시는 예수를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 모습이 우스광스런 촌스런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계획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는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것이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어린아이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이나 권세가 없는 사람, 누구나 쉽게 친근히 다가설 수 있는 겸손한 예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희망을 약속하는 예수.
그는 단순히 정치적인 압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문제 가운데 본질적인 문제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천사는 그 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여기 예수란 말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 나를 방황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 내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삶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들, 이런 것은 결국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죄로부터 나를 해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는 분.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는 구원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고 분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왕의 눈물을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막11장은 호산나 찬송 속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눅19:41절에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것은 아마도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2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줄 수 있는 예수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폭력의 힘을 가지고 오신 예수가 아니라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참된 평화, 정치적인 자유이상의 본질적인 자유, 새롭게 할 수 있는 샬롬의 주님, 평강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3절에 보면 "날이 이를 지라 한 날이 올 것이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부터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 함을 인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그들이 환영하고 있지만,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맞지 않는 예수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 군중들이 자기를 향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빌라도 총독 앞에서 외치는 폭도로 돌변할 군중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거절한 이 백성들과 예루살렘 도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A.D 70년 로마의 티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수님이 예언한 그대로 예루살렘은 잔인하게 파괴됐고,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 돌 위에 남기지 않고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거절하고, 멸망할 도시의 운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시고, 호산나! 부르짖는 이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내일 아침이면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그 분은 또 한번 우셨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때 예수님이 우신 광경을 "그가 심한 통곡으로 우셨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흘리신 이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에게 구원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우시던 예수님의 그 눈물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분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를 살리셨으며,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내 주변의 안타까운 내 가족과 수많은 우리 이웃과 우리 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21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전 교회적으로 같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그래서 어려운 우리 나라의 정치와 경제도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내 가족과 이웃과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의 감격을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새벽을 깨우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