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염려 하십니까?
본문
무엇을 염려 하십니까?
마태복음 6:25-34
여러분은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한때 60% 이상이 되던 중산층이 지난 3-4년 사이에 전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주 많이 가진 부유층에서 가족들하고 한번 외식할 때 쓰는 돈을 가지고, 모든 식구가 한 달을 살아야 되는 저소득층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그리고 체감 물가는 한해 사이에 두 자리 숫자로 뛰어 오르고, 사교육비는 점점 더 늘어나서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용불량자가 300만 명을 넘었다는 신문기사가 하루가 멀다하고 나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매일 살고 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뭔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25절에서 주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쉽게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인생을 사느냐는 반응이 더 큰 소리를 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염려는 좋은 것도 있습니다.
염려 때문에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
염려가 있기 때문에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긴장합니다.
염려를 하기 때문에 남보다도 더 열심히 뜁니다.
그러나 염려를 이렇게 정당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염려를 묶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그리고 왜 염려를 하지 않아야 되는지의 이유도 말씀하셨습니다.
1.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염려는 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아주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돈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 염려의 종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배금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열병입니다.
그래서 돈을 숭상하는 자는 반드시 그 열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그 열병은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심하면 죽기도 합니다.
눅21:34절에서 예수님은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염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술에 중독 되면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방탕과 맞먹는 악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하고, 영과 육을 망치고, 심하면 우리의 생명까지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안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2)염려는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키 작은 사람에게 염려라는 주사를 놓는다고 해서 한번에 한자나 자라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염려해서 키가 자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염려는 무익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염려를 재미있는 사실에다 비유했습니다.
염려란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아 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기름은 펑펑 들어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치도 안 움직입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마찬가지로 염려라는 것은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므로 쓸모 없는 것입니다.
3)염려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 나에게 이르지 아니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이르지도 않았고, 내 것도 아닌 시간과 날을 놓고 걱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사람은 "염려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시집 못 가면 어쩌나, 혹시 학교 간 애가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이와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삶을 망가지게 만들고,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염려를 이길 수 있는 세 가지의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의 믿음입니다.
26절을 보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고 했고
28절에서는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시지 않았느냐"고 했고
30절을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있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새들이 어떻게 매일 먹고사는지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전능하시고 부유하신 하나님이 날짐승도 먹이고 키우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모든 범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와 흠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그 머리터럭도 다 세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들어 와서 나를 괴롭힐 때마다 창문을 열어 제끼고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회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저 새를 하나님이 저렇게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나님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저는 지금 실직했습니다. 가족들이 딸렸습니다. 염려가 나를 짓밟아 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믿음 주십시오. 너희일까 보냐의 믿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믿음대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2)"있어야 할 줄을 아느니라"의 믿음입니다.
31절에서 주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했고
32절에 보면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있어야 할 줄 아신다"고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내 사정을 다 알고 계심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귀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어떤 면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악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예수 안 믿는 많은 사람들이 다 이방인입니다.
그들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얼마나 골고루 공급해 주십니까?
마5: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비를 주시고, 해를 주셔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몰려오면 길에 나가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시며 마음으로 "하나님, 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참 건강합니다. 좋은 자동차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런 사람에게 다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알고 주셨는데 하물며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반드시 때가 되면 주신다고 믿습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십시오.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상 염려는 꼼짝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기적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3)"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의 믿음입니다.
33절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아니해도 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바쁜 세상에서도 시간 내서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예배 드리는 이 생활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나오는 말씀대로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소원을 갖고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한다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훈련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됩니다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의 태도는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아무리 바쁘고 쫓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 스케줄은 이렇습니다. 이 스케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용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켜 주십시오" 하고 단 5분, 10분이라도 기도하고 일어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노력, 이것이 영적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를 일치시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제일 먼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제일 뒤에" 하는 식으로 우선 순위를 바로 정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보면 그 초대교회 성도들이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티테디오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을 뜻입니다.
초대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민이며 배우지 못했고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후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나서부터는 그들의 가슴이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는지 모릅니다.
한 평생을 주님의 복음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종사하는 모든 생업을 통해서,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가정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최선을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로마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헌신된 삶을 살자 염려가 다 날라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염려에서 해방되니 이것을 좀 자랑하고 싶어서 티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하고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아무리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티테디오스 최창훈하면 얼마나 신이 납니까?
여러분! 티테디오스 자기이름 한번 불러 보세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에서 자유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세계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 없이는 도무지 하루를 살 수 없는 불안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티테디오스. 즉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세상 앞에 우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기도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이 시간 믿음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