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눈이 열린 사도 바울
본문
신령한 눈이 열린 사도 바울
행9:10-22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을 받으려면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행하며,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가장 예수님를 정확히 알았고, 정확히 믿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바울은 그날도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어 눈이 멀어 그 자리에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안수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말하기를
"주님! 제가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사람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하며 두려워하는 그에게 주님께서는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 말고 가거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가 소경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고 안수하자 바울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신령한 눈이 열린 사도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조명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바울은 믿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20절을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눈은 떳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눈은 떳으나 잘못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자신의 가치관, 그리고 자신의 세계관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눈 먼 사람들에게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눈은 떳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눈은 떳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있고
육신의 눈은 떳으나 지식이 없는 맹인이 있고
육신의 눈은 떳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안이 먼 맹인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육신의 눈은 떳으나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양심의 눈이 먼 맹인이 있습니다.
여기 바울이 오늘 뜬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요,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맹인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본 사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선교사로 바뀌어졌고,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의 열방을 보는 사람으로 변화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파하니"라는 말씀은 이제 바울이 성경에서 예수를 보게 되어 영안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엡1:17-18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에 눈을 밝히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빛 되신 계시의 영 즉,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시기 때문입니다.
2.바울은 사랑의 눈이 열렸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서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겨지고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용서의 눈이 열렸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하여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 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가진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여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하는 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지만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그리고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되어 가고 자신의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태양을 등지고 살 듯이 남의 어두운 면만 보고 삽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3.바울은 소망의 눈이 열렸습니다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였으며, 그리스도를 보면서 죽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그곳에 서 있던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스데반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 분이야 말로 위대한 분이구나!"하고 생각을 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시17:14-15절을 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행복이었으며,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세상 속에서,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고현교회 성도님들에게도 임하여 일생을 영안이 열린 사람으로 사도바울처럼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