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본문
적은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눅8:22-25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던 중에 피곤하여 배 고물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잠이 들었을 때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변에는 해발 3000m가 되는 우리 백두산과 거의 같은 높이를 가진 헐몬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이 갈릴리 바다 주변이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찰 때 3000m가 되는 높은 헐몬산의 찬바람과 대류현상이 일어나 갈릴리 바다에 그 기세가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대부분이 어부인지라 이런 태풍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거센 바람이 계속 뱃전에 물을 퍼부어 그 배가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급하게 소리쳐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라며 주님을 깨우자 일어나신 주님께서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꾸중하신 후 바다를 보고 "잔잔하라. 평안하라" 선포하시자 물이 잔잔해졌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 사건을 보고 "저 분이 뉘시기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 지는가?" 의아해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정확하게 붙잡아야될 진리가 있습니다.
1.그 분이 누구인가입니다.
당신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세상에 많은 지식은 지식 그 자체로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지식은 내 생명과 죽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람이 그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문둥병자를 만지시면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여 내게 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주께서 말씀만 하시옵소서"라고 말해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을 받았던 백부장은 그 하인이 질병에서 구함을 받았습니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딸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명령하니까 시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여기서 성육신의 신비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피곤한 육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노한 풍랑이 배를 흔드는 지도 모르는 채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육신의 비밀은 "빛이 있으라" 한마디를 명령함으로써 천지를 창조하신 그 거대한 힘을 가진 예수님께서 엄마의 젖꼭지를 빨고 있는 오물거리는 입으로 변해있고, 젖꼭지를 물려주지 않으면 굶어죽을 인생으로 오셨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개념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론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신학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가난이 싫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셨습니다.
날 때가 없어서 구유통에 나셨습니다.
우리 중에 이렇게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완전한 인생으로 오셨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맥베드는 말하기를 "배반자의 가슴은 세상의 어떤 삭풍 보다 더 차고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배반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도 그처럼 깊이 애정으로 키운 제자 가룟 유다에 의해 은 삼십에 팔아 넘겨지는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고민해보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고민해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고민 때문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는데 땀방울이 변해서 핏방울로 바뀌도록 "내가 고민하여 심히 죽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가 고민했던 것보다도 더 깊은 고민의 자리에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절망의 장소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보셨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 속에서도 찌르는 칼처럼 예리하게 파고드는 아픔으로 울고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옆에 있는 요한에게 "요한아, 내 어머니다. 네가 나를 좀 대신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살았던 주님의 생애 속에 내 인생이 당했던 모든 고통, 내 인생의 모든 풍랑이 다 녹아있습니다.
그래서
히4:15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다 당하셨으나 단지 그 분은 그 시험에서 범죄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완전하게 이 땅에 오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2.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배에 풍랑이 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도 우리 인생에는 풍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모든 만사가 형통하고 무병하고 무엇이든 다 잘 된다고 마술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단언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생의 풍랑은 계속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훈련시키시는데 우리를 얕은 물가에 땅 짚고 헤엄치도록 만 부르시지 않고 깊은 물에서도 수영할 수 있는 인생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빌1:29절을 보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고
요16:33절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라...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벧전1:6-7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 너희 믿음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같이 귀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이런 환난을 계속 당하는데 그 이유는 "네 집이 여기가 아니다. 네가 가야될 집, 내가 마련한 집이 따로 있다"라는 주님의 경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3.그 환난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필요할 때 네가 믿을 수 없다면 진정한 가치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청명한 날에 예수를 믿다가 바람 부는 날에 믿지 못하면 그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성공할 때 예수 믿다가 실패할 때 예수 안 믿으면 그 믿음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형통의 날에 예수 믿다가 고통의 날에 믿음이 사라진다면 네 믿음은 어디 있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동안에 서울 어느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제 마음에 큰 감동을 준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폐가 뼈처럼 단단하게 굳어져서 석화 되어가는 희귀 질병을 앓고 있는 분이 계셨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믿음 생활하면서 이 병이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이 분은 생업으로 식료품을 떼어다가 노점상을 하시는데 식료품을 팔면서도 그냥 값싸고 확인 안된 식료품은 절대로 손대지 않고 내 식구에게 음식을 먹인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좋은 것을 골라 최소한의 이익을 붙여서 팔았습니다.
많은 이익은 못 얻지만 정직하게 노점상을 하며 생활을 열심히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달 전에 그 앞에 큰 빌딩이 들어서니까 단골 손님들도 오지 않고 장사가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두 달 동안 영업을 못한 채 집에서 쉬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 분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그 분은 지금 수화교실에서 수화를 지금 열심히 배우고 계시는데 청각 장애우들을 도우려고 준비하며, 매일 저녁이면 온 가족을 모아놓고 아름답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공했다고 세상 사람이 놀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 되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재벌 되었다고 아무도 놀라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성도가 그 고통에 무너지지 않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똑같이 슬픔을 가져야 될 사람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주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에게 충격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글은 뉴욕의 재활병원에 써진 글을 한국의 실로암 안과병원에 붙여놓은 글입니다.
한 환자의 신앙고백입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미처 표현 못한 기도까지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실패 때, 여러분의 고통 때, 여러분의 좌절 때, 여러분이 억울할 때,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 있습니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애굽의 대군이 몰려오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제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믿음을 가진 모세가 출14:13절을 보면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깊은 고통이 있었기에 모세의 믿음은 영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의 때,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 왜 나만 이 일 당해야 됩니까? 다른 사람은 편하게도 하는데 왜 나만 이 길을 가야 됩니까?" 항의하고 싶은 때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전능자이신 주님께서 그 배에 있는데도 믿음 없이 우왕좌왕하는 그 제자들을 주님이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꾸중하셨지만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든든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 받아주신다면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야, 너 믿음이 그것 밖에 없느냐?" 꾸중하시면서도 폭풍도 깨우지 못한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탄원하는 간구 소리에 일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그 적은 믿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고요하라. 잔잔하라"는 그 말씀 앞에 바다는 고요해졌습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기도가 안될 때 있습니까?
모래 씹는 것처럼 아무리 기도하려 해도 헛바퀴 도는 것 같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께 나아가서 "주여, 내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요.
우리의 신음마저도 들어주시는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내 못남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내 절망과 좌절의 깊이를 모두 당해보신 주님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것을 체휼하시는 우리 예수님은 나와 똑같이 시험을 당했기 때문에 내가 인생의 시험을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네가 다 해결하고 오라"고 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내가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반드시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베푸셨던 이 기적이 내 인생 속에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 모든 고통과 아픔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내가 당하는 가장 큰 풍랑, 내 인생에 있어서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 되는 아픔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옵시다.
그리고 주님께 구합시다.
주님 앞에 외칩시다.
신음하면서 외칩시다.
창피하지만 말합시다.
꾸중들어도 괜찮습니다.
꾸중하시지만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