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을 잘 관리하려면
본문
축복을 잘 관리하려면
느 5:14-19
우리나라 과거사에서 우리 민족이 주변 국가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 최고의 번영의 기간은 IMF가 이땅에 찾아오기 전 20세기말까지의 반짝 10년 동안(1987-1997)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우리나라 과거사에서 중국이나 소련 사람 그리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우리도 한국 사람들처럼 잘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때가 있었습니까?
사실 우리는 어느 정도 성공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소리 높은 개혁의 구호와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고, 요즘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운 고실업의 절망을 겪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너무 단순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저는 우리 민족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회를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축복은 가장 정의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 축복과 성경적 관점에서 본 축복은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 받기를 소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축복을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그 비판으로 자기가 성공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성경적인 의미로 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축복할 수 없는 성공은 결국 성공일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는 성공의 의미는 직장에서 보다 많은 영향을 끼치고, 우러러보는 자리로 승급할 때, 혹은 돈을 많이 벌거나 만질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될 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유다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에...."
처음에 그가 페르샤 정부의 장관의 직책을 버리고, 고국 유다에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을 때 처음에 그는 자원봉사자의 자리에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정식으로 유대땅 총독의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을 잘했고, 왕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유대땅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총독으로서 성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서 전체를 공부하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그는 계속 끝까지(12년간) 성공자로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축복을 잘 관리하는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 "축복을 잘 관리하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축복의 기회를 책임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본문 전체를 읽어가며 이 느헤미야라는 사람에 대하여 느끼시는 가장 두드러진 소감이 무엇입니까?
저에게서는 느헤미야의 책임감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조국 백성들의 암울한 현실 앞에서 그가 무엇을 안하겠다는 것과 안하였다는 고백적인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그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다"고 했고
15절에서는 이전 총독들처럼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였다"고 했고
16절에서는 "성의 역사에 힘을 다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총독의 자리는 벼슬이 아닌 책임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비극의 하나는 우리 민족이 출세나 성공을 책임의 의미보다 더 높은 벼슬을 따는 것, 혹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가 우리 선친이나 조상들을 자랑할 때, 우리의 선친이 그 벼슬자리에서 무슨 일을 이렇게 하셨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벼슬을 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맹목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것을 사모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 앞에 재능과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책임 있는 우리 사회의 영역들에 진출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출세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갈망하는 사람마다 무거운 책임의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축복과 성공의 기회를 열망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앉게 될 자리나 신분 때문이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우리가 맡게 될 역할 때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때를 주님의 영광을 위한 그 역할의 책임으로 수용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축복의 기회를 섬김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본문을 성찰해 보면 느헤미야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이전 총독들은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그의 식탁에 손님이 150여명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18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절에 보면 그의 기도에서는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바로 이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총독이 되면서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이 이전 총독들처럼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만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결심을 실천합니다.
15절에 보면 그는 이런 실천이 가능했던 이유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섬김의 결심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분의 소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백성을 섬기도록 부르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섬김으로 이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 최근세사의 불행은 이런 부르심 앞에 진정으로 사심없이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동기로 응답한 지도자가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판이 자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성공을 섬김의 기회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막10:45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섬김의 삶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섬김이 존재 양식이어야 하고, 섬김이 우리의 삶의 실존이요, 본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으로 어디에서 섬길 것인가?"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섬김은 언제나 자기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론 새니(Lorne Sanny)는
"종에 대한 진정한 테스트는 그가 종처럼 부려질 때 정말 종처럼 행동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란 주인이 맡긴 사명, 그 고귀한 명령을 위해 자신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며, 이 시대가 기다리는 사람이며, 축복의 기회를 섬김으로 응답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3.축복의 기회를 최선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16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최선을 다하여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개인의 안위를 위해 "그는 달리 땅을 사지 아니했다"고 했고 "나의 모든 종자도 그렇게 일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의 참모들도 동일한 심정으로 주의 소명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인들 편안한 인생을 누리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저는 본문에서 소개하는 느헤미야를 생각하면서 매 순간 순간마다 그를 지배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증거를 그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내가 백성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으니 내 나머지 인생은 주님께서 은혜로 책임져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바울의 고백이요, 기도였습니다.
딤후4:7-8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달렸으니 "이제 후로는"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상급주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대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역량을 넘어선 것은 어쩔 수 없지 모르지만 주어진 사역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최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시대의 성실한 그리스도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곧 바로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서 퇴임한 후 더욱 큰 존경을 받고, 해비타트 운동에 헌신하고, 세계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의 전령의 사명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그의 인생의 모토가 바로 최선이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Why not the Best?)
그가 이 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채택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임관 직전 해군 제독과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던져진 후 제독은 그에게 해군 사관학교 시절의 성적을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독은 "잘했군"하는 칭찬 대신에 제독은 카터에게 "그것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청년 장교 카터는 땀을 흘리며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 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하자, 제독은 벼락같은 음성으로 되물었다고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그날 그 제독의 음성이 카터에게는 주님의 음성처럼 들려 졌다고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어느날 우리는 우리 몫의 인생을 다 살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창조자요, 심판자이신 그분 앞에 섰을 때에 꼭 같은 질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가 나를 믿고 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 온 최선의 결과인가?" 그때 여러분과 저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주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만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이라고 주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성공을 사모하는 우리 민족 우리교회 우리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