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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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삼하23:13-17
우리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좋은 만남은 그들의 삶을 복된 삶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만남은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늘 좋은 만남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만남의 축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선생, 좋은 친구, 좋은 신앙의 선배, 좋은 배우자, 좋은 직장 동료,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나는 이것보다 귀한 축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출세하고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젊은 날의 대부분을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힘든 삶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장래가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곤고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한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었고, 미래가 없어 보이는 삶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지혜자들"도 있었고, 의리가 있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었고 "용맹한 장수들"도 있었습니다.
참 귀한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오늘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만남을 통해 얻은 충성스런 세 용사를 조명하여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립시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다윗의 간절한 바램과 강한 용사들입니다.
오랜 도망 생활 때문에 다윗은 수년동안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고향, 수많은 추억들이 서린 고향이었기에 단숨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곳이었고, 꿈에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오늘 그의 생활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군사 작전 회의를 마치고 고향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른팔과 같은 세 장수들 앞에서 다윗은 중얼거리듯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고향 생각이 많이 날까? 고향마을 앞에 있는 우물의 물이라도 한 모금 먹었으면 한이 없겠다!" 고향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데, 지난밤 늦게 돌아간 세 장수들이 밤이슬에 젖어서 돌아와 문밖에서 다윗을 불러 눈을 떴습니다.
그들 손에는 물 한컵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날 밤, 그들은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적군의 진지를 뚫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가서 다윗이 원하던 물을 길어온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베들레헴은 요새화 되어있고, 블레셋 군대의 총본부가 있는 그곳의 경비망을 뚫고 들어가 물 한 모금 떠오기 위해 세 장수들은 그 일에 그들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의 스승이신 세계적인 주경신학자 박윤선박사님은 이 부분을 "그들은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섬길 때 가져야 할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8-12절에 보면 그들이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는 "조폭 마누라"에서와 같이 힘으로 밀어 부치는 근력 때문에 강한 용사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혜가 출중해서도 아니었고, 태어날 때부터 겁을 모르는 용감한 사람들이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전투에 나가서 싸움을 잘했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남다른 "충성심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심"이며, "믿음의 용기"이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강한 용사는 얼마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졌고, 재력을 가졌느냐로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강한 용사는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냐로 결정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영적 싸움을 하는 용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계속되는 영적 전투에서 깨지고, 쫓기고, 두둘겨 맞고, 날마다 얻어터지며, 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충성스런 용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입니다.
즉 갓난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새롭게 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용사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며, 예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이렇게 성숙해 가면서 가져야 할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강한 용사들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런 일꾼들, 헌신된 일꾼들은 그러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강한 용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생명을 건 헌신입니다.
이 용감한 이 세 용사들이 다윗의 고향 앞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들고 온 물 한 잔은 단순한 물 잔이 아니었습니다.
왕궁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아온 핏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 용사들이 무술이 뛰어나서 적진을 뚫고 갈 만큼 용감무쌍한 용사들이었기 때문에 달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헌신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썩어져 없어질 인생과 그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 인생의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사역을 위해서 헌신할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교회가 살아나고, 교회가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논리 정연한 "머리꾼"이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을 잘 알고, 교회 정치를 잘 아는 "이론가"가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정확한 논리와 판단력으로 잣대질하는 "비평가"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어떤 어려움에도, 어떤 손해 앞에서도, 어떤 여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뛰어가는 "헌신된 믿음의 용사들"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헌신은 그냥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의 세 용사들이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한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삼하 18:2-3절을 보면 다윗이 전투를 앞두고 군대를 편성하고 난 후 지휘관들에게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전투에 나가는 다윗의 병사들이 보인 반응은
3절을 보면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왕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사용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귀한 분이었기에, 그분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도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용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이 그렇게 간절히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샘물 한잔을 마시고 싶어할 때 목숨을 내놓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왕 다윗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다윗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고,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만이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고, 내 생에 있어서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우리가 드려야할 헌신,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입니다.
세 용사가 가져온 것은 그들의 핏잔이었고,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삶 전부를 담은 잔이었습니다.
얼마 전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 사랑의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셨지만 그때에 강사로 오신 오정현 목사님께서 자기가 섬기던 교회를 건축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미국 LA의 에너하임 시 한복판에 약 13,000평의 대지에, 약 1000만 달러(약 140억)가 넘는 교회를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이민교회에서는 1000만 달러라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 감동하지는 않았습니다.
5년 전, 1차 헌신 주일에 교인 1000여명이 537만 달러(약 80억원)를 헌금했다고 했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은 아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잘 압니다.
1불, 2불 때문에 언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다운타운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번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내놓은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 헌금은 그들의 생명을 걸고 얻은 핏잔들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헌금이요,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헌금을 했다는 것 때문에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헌금을 드리고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그러한 생명과 같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고 난 성도들이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울면서 이런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요."
그때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 목사님도 울었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전을 "기적의 땅, 기적의 건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주신 자리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기대한다고 해서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삶을 사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도 하나님은 기적을 계속해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갑시다.
세 용사들이 핏잔을 가져왔을 때 다윗을 그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소중한 헌신을 누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로 드립니다.
그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장소는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다윗의 궁궐에서 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굉장한 예물을 드렸던 희생 제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다윗과 세 용사가 아둘람 굴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드렸던 예배는 최고의 예배였습니다.
그들이 드렸던 것은 물 한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전부였고, 피였고, 땀이었고, 사랑의 눈물이었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최고의 것을 드리십시오.
생명의 핏잔을 부어 하나님께 드리듯,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