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일에 집중합시다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중요한 일에 집중합시다

본문

최창훈목사 설교
중요한 일에 집중합시다

눅2:41-51

최근에 나온 신간 중에 "단순하게 살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정보 홍수시대에 인생을 의미있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핵심가치에 집중하여 살라는 것인데 그것은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집중하고, 인생은 인생의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핵심가치, 본질을 잃어버리고 군중 속에서 허둥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1.예수 잃은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 성경 중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울음을 터뜨린 것 말고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씀하신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 탄생 기록의 웅장한 마감이요, 공생애의 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날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그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 부모님은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하룻길을 내려와 예수님을 찾아보았으나 동행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예수 못 봤느냐?" 물으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허둥대며 예수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와서야 박사들과 더불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모는 "아이야 왜 부모를 이렇게 놀라게 하느냐?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왜 알지 못했습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가? 에 대한 큰 암시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고 있고,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모친만 이 말을 마음에 두니라 는 얘기로 오늘 본문은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동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소원하는 기도 속에, 비전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삼손이 드릴라에게 빠져서 그가 깊이 잠든 사이에 힘의 근원이었던 머리카락이 잘려버렸습니다.
성경은 삼손의 생애에 대하여 불행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이미 나를 떠난 줄을, 성령님이 우리 가정을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은 비극중의 비극이요 불행 중에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잃었고, 삼손은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예수를 잃고,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을 붙들고 산다면 이는 분명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2.예수를 잃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너무나 번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월절 축제속에 삼백만 인파가 몰려들었고, 가는 곳곳마다 축제의 마당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예수를 잃어버릴만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위가 번잡하면 정신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바른 일에 관심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얼마나 번잡한지 모릅니다.
저마다 바빠 죽겠다고 말합니다.
취미생활은 또 어쩌면 그렇게 많은지, 주부들도 아침 식탁을 다 정리한 다음, 커피 한잔 끓여놓고 성경책 펼쳐놓고 하루일과를 묵상하며 기도하는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손에 설거지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번잡한 일에 시달립니다.
산란하고 불안정하고 산만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동행할 리가 없습니다.

본문 44절에 보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으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고,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교회의 교인 속에서 예수 없는 신자가 얼마나 많아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좋아하는 현대 교인들 가운데는 군중 속에 끼어서 함께 따라가다 보면 천국에 도착하려니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아내가 열심히 기도하니 아내의 손을 붙들고 열심히 교회 왔다 갔다 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어머니가 열심히 신앙 생활하니 어머니 따라가다 보면 천국에 도달하려니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현대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쾌락을 구경하며 함께 즐기는 종교 도착증 환자들이라고 날카롭게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나의 문제가 있고, 너의 문제가 있고 우리 모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동화책에서나 나올 만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한 마을을 지나오며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을입구에 서 있는 한 집에 교패가 붙어 있기에 너무 반가워서 벨을 눌렀습니다.
마침 집을 지키던 새댁이 나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당황했던 이 새댁은 "이 가정은 장로님가정입니다 제 남편이 집사이구요 저도 교회 집사입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아니, 교회의 직분 말고 이 댁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엉뚱한 질문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이분이 떠나고 난 다음에 새댁의 귓전에 쟁쟁거리는 소리가 남아있습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신가?
정말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언어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가 행복해하는 이 심장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 우선순위 속에, 가치판단 기준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진지하게 자기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걸어가는 삶의 자국마다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십니까?
내가 몸부림하고 고통하고 힘들어하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십니까?
내가 기뻐하는 그 기쁨 한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까?
예수와 함께 기도하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고 사십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곁에 있겠지, 뒤에 따라오겠지, 앞서 갔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앞에다가 세워놓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왔더라면 예수님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예수님보다 내가 앞장서지 말고, 말씀보다 앞장서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았다면 예수없는 예수꾼 노릇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여행할 때 행군도를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언제나 앞장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앞장서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머물 때는 백성들 중심에 법궤를 갖다 놓았습니다.
내 등뒤에 예수님이 계시고, 내 우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내 좌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바로 내 앞에 예수님이 계시도록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비대해 지면서 예수를 잃어버린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시련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고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죽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단 하루도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우리를 죽이는 사람도 없고, 예수를 믿는다고 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알곡과 쭉정이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오실 때에 예수님 영접할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기름이 바싹 말라 버리고도 신앙 생활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의 구별이 모호해 지고, 가짜와 진짜의 구별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을 다간 후에야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이 세상 길은 돌아갈 수가 있고, 집에다 물건을 놔두고 와도 집에 다시 돌아가 찾을 수가 있고, 어제 갔던 길이 궁금하면 다시 가 볼 수 있고, 지난달에 실패했던 그 일 다시 도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길은 되돌아갈 수가 없고, 인생은 연습도 시행착오도 없고, 한번 걸어가는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종착점에 서 있을 때에 내 곁에 예수가 안 계시고,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하면 그 인생은 망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교회가 모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얘기는 여기 모이는 성도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이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라는 얘기는 여기 모이는 성도들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얘기는 여기 서 있는 목사가 영광스럽기 때문에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동안 모자라고, 부족하고, 갈등이 있고, 언제나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고
장로교 신학의 창시자 요한 칼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중심에 성전을 두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중심에 말씀을 두고, 인생살이 중심에 교회를 두고, 신앙생활을 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교회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면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잃어버린 예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친척과 지나가는 사람들 붙들고 "이렇게 생긴 아이 못 봤수!"하며 아는 자 중에서 찾아보았으나 동행인 가운데 없었습니다.
어디서 찾았습니까?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오늘 교회에 오신 여러분! 내가 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부자는 세상에 가야 있고, 쾌락과 재미도 밖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예수님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보러 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오면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설교 속에, 찬송 속에, 기도 속에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낙심이 되고, 불평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자기 왕국을 무너뜨리지 못해서 근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익산에 와서 목회하며 지난 11년 동안 적지 않은 수의 교인들이 의외로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 어디 가서 신앙생활 해볼까? 몸부림을 하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을 만나보고 두 분을 만나보는 사이에 그게 방황이 아니고 몸부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가면 내 영혼을 맡길 수 있을까?
어디가면 살아 역사하는 꿈틀거리는 생동감이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을까?
어디에 생명수가 넘치는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예배는 어디 있을까?
주일마다 주님 전에 찾아갈 때마다 예수 만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예배는 어디 있을까?
좋은 예배를 찾아서 좋은 말씀을 찾아서 저들이 몸부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목사로서 한편 부끄럽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다른 것 보여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 설교 속에 예수님이 녹아서 역사하는 그런 설교를 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찾아오는 성도들마다, 상처난 심령마다, 갈증난 심령마다, 방황하는 심령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로 충만하여 돌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좋은 말씀을 주시고 좋은 예배를 주시옵소서!"
성도 여러분!
한번 큰소리로 따라 합시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현교회는 예수가 계시는 교회입니다.
고현교회는 예수님의 가치와 비전이 분명한 교회입니다.
고현교회에 가면 예수 만난다더라. 할렐루야!
고현교회에 가서 설교 들으면 예수가 보이더라. 할렐루야!
고현의 성도 여러분!
-예수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예수님 만난다고 말해 줍시다.
-행복 잃고 허둥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만나면 행복하다고 말해 줍시다.
-길 잃고 당황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오시오"라고 말해 줍시다.
-헛된 것 붙들고 허탈해 하는 사람들에게 천국 붙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 줍시다.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