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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쓰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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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주님이 쓰시는 사람

마21:1-11

인생에서 최대의 저주가 있다면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너는 쓸모 없는 존재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 축복의 언어가 있다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쓸모있고 가치있는 사람입니다"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오늘은 이천년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소중히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성경의 비밀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일입니다.
쉬는 시간 아이들고 함께 운동장에서 눈을 맞으며 신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창훈아"하고 나를 불러 사택에 가서 뭘 좀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때 얼마나 신이 났던지요.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나한테 심부름을 시켰다. 선생님 사택으로 달려가며 얼마나 흥분이 되었던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흥분이 되살아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길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 마을까지 왔을 때에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이 건너 마을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 의하면 베다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네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면 큰 나귀와 작은 나귀 한 마리가 묶여 있을텐데 풀어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며 예수께서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첫째, 예수께서 거기 나귀가 매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당시 나귀 한 마리는 우리네 농촌 소 한 마리처럼 농사 살림 밑천이었을텐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에 모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가 490년전 이미 예언했다는 이 내용은 공관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왕국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귀 새끼가 이날 이렇게 영광스럽게 쓰임받을 것이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이 되고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향하여 이토록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어떻게 세워 놓으셨을까요? 여러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생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만세전에 작정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시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고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예수님하고 맞바꾼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요?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시시하게 아무런 의미없이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런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 예수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고 황홀한 사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딤후2:20절 이하에 보면 이 땅에서 몇 번 쓰임 받다 깨어지는 그릇 하나까지도 쓰임이 있고, 쓰임의 목적이 있다고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습니다.
여기 큰집은 하나님의 집이요, 그릇은 우리 인생을 비유합니다.
그리고 귀한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얼마를 가졌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 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형통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순간 순간, 자리 자리마다 우리는 감격하며 "하나님의 예언의 응답이 나다! 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다!"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의 주권입니다.
주님은 마을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기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을 아셨을까요?
그리고 왜 남의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라며 주인이 화를 낼 때 "주님이 쓰신다"고만 하면 나귀를 내어줄 것이란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뿐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가 쓰신다"는 말 한마디로 괭이나 삽 한 자루가 아닌 나귀를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 주경가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그런 것쯤 쉽게 아셨을 것이며. 또 헌신되고 준비된 무명의 제자가 있었음을 알고 계셨다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런 것까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셨을까요?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목장의 관점,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전체 그림이 아주 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한번도 예루살렘에서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베다니에 오셔서 주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베다니는 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있고, 발 밑에 앉아 말씀을 즐겨 듣던 마리아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그를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 가난한 사람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을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어 소망과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저희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리우셨다고 눅24:50-53절은 기록합니다.
그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막14:1-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성 속에서 "주여, 여기 있습니다. 마음대로 쓰십시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 무명의 헌신자 나귀 주인이 나귀를 내어 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을 내어 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준 것인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권의식이란 단순한 헌신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 내 삶의 목적이 그분에게 온전히 연결되어지는 영광의 단계를 말합니다.
내 것과 예수님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바로 그때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신비의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 누구의 나귀가 매여 있고 어디에 어떤 나귀가 있는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억지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흔쾌히 내어놓을 것도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가족입니다.
예수님과 베다니 사람들은 이미 천국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며 이것이 헌신이며, 이것이 사랑입니다.

3.가슴마다 예수의 피가 묻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 다시 말해서 "큐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참된 헌신과 봉사와 섬김은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헌신, 사랑이 없는 봉사, 감사가 없는 섬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베다니 사람들을 방문하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따라 마을을 찾아오시지 않고 나귀만 요구하십니다.
그들은 이번 여행이 어떤 길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나귀를 드리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헌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흘러야 합니다.

예배시간 찬양시간마다 찬양대가 찬양을 드릴 때 그 가슴속엔 예수의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마다 선생님의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목장 식구들을 가슴에 안고 기도할 때마다,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주님의 주권이 나타나 "주님이 쓰시겠다"하면 어제든지 "예. 언제든지 저를 쓰십시요. 저는 주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4.풀어 끌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슴마다 예수 사랑으로 끓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과 맺은 그 사랑, 그 관계가 벅차 주를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 오늘도 "풀어 끌고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매인 나귀를 풀어 끌고 와야 주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사업과 물질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묶인 것들이 풀어지고 주를 위해 바로 쓰임 받길 축복합니다.
질병에 묶여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묶인 질병이 풀어지고 건강이 주를 위해 올바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쓰셔야 할 것들이 엉뚱한 곳에 쓰일 땐 풀렸던 것들도 묶여질 수 있습니다.
기회도, 명예도, 건강도, 물질도 주께서 묶으시면 능히 풀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이 쓰지 않으시면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귀가 나를 쓰게 됩니다.
내 시간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사탄이 침략합니다.
내 물질 주를 위해 쓰지 않으면 세상이 빼앗아가 갑니다.
내 육체 하나님 영광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노예 됩니다.

지난 주 목장을 심방했을 때 어떤 성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내가 여러 교회에서 이사 다니며 신앙생활했고, 긴 인생 살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해 봤고 저런 일도 해 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다 해보았는데, 돌이켜 보면 미쳐서 교회 생활 할 때에, 지치도록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 할 때, 신앙생활 가장 열심히 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노라"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성도만의 고백이고, 이 한 분만의 간증이겠습니까?
나의 고백이요 너의 고백이요 우리 모두의 고백 아닙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기름을 부어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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