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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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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훈목사 설교
삶에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막 10 : 17 - 22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부인이 잠자리에서 일어난 남편에게 "당신 박찬호 선수 어머니가 일본 사람인 것 알아요?"라고 말하자 남편이 "뭐, 헛소리하는 것 아니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헛소리라니요? 신문에 났는데요"라면서 일간 신문의 스포츠 난을 펼쳐서 큰 글씨로 쓴 것을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한국인 박찬호와 일본인 노모"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일본인 노모 선수를 늙은 어머니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오해는 아주 애교가 있는 오해이고, 또 피해가 전혀 없는 오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오해는 우리 인생의 길에서 매우 중대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세계 제 2차대전이 종료된 직후에 필리핀의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일본 군인에게 헬리콥터가 저공 비행을 하면서 "전쟁은 끝났습니다. 일본군들은 항복하고 나오십시오. 당신들은 조국인 일본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라고 종전 방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산악지대에 숨어있던 많은 일본군인들은 이것을 연합군의 전술 전략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은신했습니다.
어떤 일본군인은 종전 후 무려 30년 동안 동굴 속에 들어가 생명을 유지하다가 1970년대 말에 원시인과 같은 모습으로 동굴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오해 때문에 30년간의 세월을 잃어버린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참 안타까운 비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지나가실 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마19:20절을 보면 그를 "한 청년"이라고 했고, 눅18:18절을 보면 그가 "관원이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관리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으로 봐서 그는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천국을 가난한 사람의 심리적 보상을 위한 허구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고, 경건한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자기 인생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예수님 앞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이 사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혹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을 등지고 슬퍼하며 떠나간 진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만든 오해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본문 통해 조명하여 "당신의 삶의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17절을 보면"예수께서 길에 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이 호칭에 대해서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관찰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부인하셨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 가운데는 선한 이가 없다. 즉 인간의 선함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다. 자신의 선함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롬3:10절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선함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한 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려는 더 중요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나는 선한 선생의 차원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위대한 모델로서의 인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존경할만한 스승, 위대한 인류의 교사로 예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는 선생님 이상의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무엇보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구주십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위대한 인간은 위대한 모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소개하는 청년 관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선한 선생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선생으로서의 예수는 자기 손익 계산서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그런 예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를 등지고 떠나간 진짜 이유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님을 선한 스승이라고 생각했지, 그가 하나님이시고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2.영생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등지고 떠나가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행위로 얻을 수가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던진 질문 그 자체는 아주 바람직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분석해 보면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그릇된 전제를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보편적 편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질문을 다시 봅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행하고, 굉장한 커다란 업적을 세워야만 주님이 나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영생을 얻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는 길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매우 보편적인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청년과의 지속적인 대화 가운데서 구원의 근거로서 행함을 가정하고 있는 이 잘못된 근거를 파기시키기 위한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네 선을 들고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있다고 네가 생각하느냐? 선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정도로 네가 선하다고 생각하느냐?"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놀랍게도 20절을 보면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저는 이 청년이 상당히 도덕적으로 자신이 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이 정도의 대답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의 밑바탕에는 아직도 그가 자신의 정체와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비약시켜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청년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만나기 위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도덕적인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숨기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삶의 동기 중의 하나는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이 한가지 죄를 통해서 그의 죄인 됨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죄를 통해서 그의 전면적인 죄인된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옆에서 엿듣고 있었던 제자들이 드디어 이 질문을 끄집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26절을 보면 "제자들이 심히 놀라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27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 하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다. 사람은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어떤 최선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이웃을 돕는 어떤 자선 행위도 이웃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죄인이고 사람은 다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행함에 근거하지 아니하시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선물은 어떻게 받습니까?
선물은 그냥 받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누가 제일 염치없이 받습니까?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선물을 주면 이것이 선물인지, 뇌물인지를 생각하고 무슨 의도가 뒤에 있는가를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선물을 있는 그대로 잘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청년이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의 인식이 없고, 자기 행위에만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오해가 당신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3.우선 순위의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또 하나의 진짜 이유는 인생 순위를 오해한 것입니다.
우선 순위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좀더 중요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우선 순위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불행이란 무엇일까요?
인생의 불행은 우선 순위의 혼란에서부터 생깁니다.
저는 본문에 나타난 이 청년이 우선 순위를 혼돈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영생에 대한 관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심보다도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였습니다.
결국 우선 순위에서 예수는 밀려났고, 영생문제도 밀려났기에 마침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슬픈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람은 예수도 영생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 보다 더 훨씬 재물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이 우상이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이 우상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예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가 길이요 생명이요. 예수가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이시요. 나를 구원하신 분. 그리고 나의 전 일생을 다스리고 나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놀라우신 분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보다 중요한 분이 없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아직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우선 순위를 바꾸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 나의 주인 됨을 보이시고 깨우쳐 주셨다면 이제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피 흘린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 됨을 고백하십시오
믿음으로 주님을 올려다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이 행복을 받아 누리시고 올바른 우선 순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인생을 사는 놀라운 행복 속에 들어가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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