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본문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마 8: 5-10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으로 인해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면 정말 후회 않을 뿌듯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해서나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감동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그렇게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가슴이 열려 공감의 아름다움이 일어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바로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사람이란 참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도 감동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금덩어리로도 감동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고 감동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리하고 화려하고 넉넉하지만 감동을 맛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하고 순수하고 가난했던 옛시절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감동을 받게 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가버나움에 주둔하던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을 찾은 주님 앞에 나아가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고쳐달라"고 병낫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의 간청에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 집에 주님 모시기를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다만 여기서 말씀만으로 자기 종을 낫게해 달라"는 믿음을 피력합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은 요즘 말로 하면 감동을 먹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건 깜짝 놀랐다는 말이요, 신기해 하셨다는 말이요, 감동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지금까지 이런 믿음의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이런 놀라운 감동을 맛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두 가지를 놀라워했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할 선민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지 않는 것에 놀랐고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갖기 어려운 이방인들이 오히려 믿음을 갖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면서도 주님을 향해 갖는 믿음이 너무도 엄청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에서 소개하는 백부장이 주님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가를 조명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사람 곧 이웃에게 주는 감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략되고 있습니다만은
눅7장을 보면 유대 장로들이 발벗고 나서서 이 백부장의 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이 저들을 사랑했고, 존중했고, 배려했으며 저들의 회당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백부장이 주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감동시킨 것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그 어디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믿음만큼 감동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뢰하고 믿어주는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나를 안 믿어 줘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동 있는 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을 감동시킨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병든 것을 안타까와하며 주님께 그 하인의 병낫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자신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당시 물건처럼 취급받던 비천한 종을 위해 주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가치한 것을 위해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다 접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잘 것 없는 것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정이 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중풍병이 어떤 병입니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풍병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쉽게 그 하인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했습니다.
종이 일을 해야지 밥만 축내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한다고 해야 이젠 일꾼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긍휼히 여기는 백부장의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2)주님을 감동케 한 것은 주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가 나타낸 반응입니다.
백부장은 말하기를 "주님, 주님을 어찌 저희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감히 주님을 맞을만한 처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냥 여기서 말씀만 한 마디 해 주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저도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또 제 밑의 부하들도 제 명령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니 굳이 수고롭게 누추한 저희 집까지 오실 필요없이 여기서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의 병이 낫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이었다면 참 헷갈렸을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시 가버나움에 저만큼 유력한 자가 또 어디 있을까요?
로마 백부장이면 그 사는 정도가 꽤 부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누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의 말이 결코 가식적이거나 즉흥적인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정말 주님을 너무도 크게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자기가 너무도 작게 여겨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세상에서야 좀 산다 싶겠지만 주님은 너무도 크신 분으로, 너무도 귀한 분으로,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에는 송구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이 좀 살면 과시적이기 쉽습니다.
이참에 뭔가를 좀 보여주려고 굳이 데려다가 은근히 과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은 것이 인간심사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더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3)또한 주님이 감동한 그의 믿음은 약한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릴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눅7:4-5절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백부장의 청을 들어줄 것을 요청할 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사탕발림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였다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고 주님 앞에 저를 추천하러 왔겠습니까?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그를 위해 청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그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민지의 얼을 키워주는 것으로 로마의 얼을 새겨 넣어야 할 로마의 입장에서는 탐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당을 짓는다는 건 뭐니뭐니해도 금전적 뒷받침이 따르는 문제입니다.
그는 분명 회당 건축을 위해 많은 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백부장이라는 직위는 많은 돈을 만지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 한 것은 실제로 그가 근검절약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오늘 이 백부장의 처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 드림이 아까운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2.이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을 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다"는 백부장의 말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에 맞이할 자격을 갖춘 것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무가치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겸손은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좋다면서 겸손하지 못하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백부장의 신앙은 상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의 집은 누추하지도 않았고 초라하지도 않았겠지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할 때 자기 집이 주님을 모시기에는 누추하고 초라하다는 그의 판단은 겸손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정확성인 것입니다.
백부장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겸손으로 자신이 작아질수록 하나님은 커지고, 교만으로 자신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작아지십니다.
하나님이 왜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까?
그건 그의 가장 큰 자질이 겸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의 겸손이 뛰어났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런 모세가 평생에 딱 두 번 혈기를 냅니다.
한번은 애굽의 왕자로 있던 젊은 시절에, 그리고 또 한번은 물을 달라고 투정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달가와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지녀야할 겸손은 얼마나 완벽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같이 거듭나지 못한 성정으로 혈기를 부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11:29절에 보면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남에게 잘하고 하나님께 헌신적이어도 교만하면 그 모든 것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감동케 한 이 믿음의 사람은 바로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힘좋은 사람, 능력있고, 재주 좋고, 돈 많은 사람이 흔드는 게 아니라 바로 겸손한 사람이 흔드는 것입니다.
3.이 백부장의 믿음은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여기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할 때 주님이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자 그는 그대로 그 말씀을 믿었고 그 하인은 나음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될 것이고, 정확하게 믿으면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하면 의심대로 될 것이고, 작게 믿으면 작은 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을 여러분의 감정과 지식과 체험보다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감정과 체험은 내 것이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이방 백부장이 바로 주님을 감동시켰고 그로 인하여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결코 믿음을 갖기에 좋은 위치나 조건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남을 돌아볼 줄 아는 긍휼의 사람이었고, 겸손했고, 하나님께 부요했고, 말씀을 붙들었던 그였기에 그는 감동을 끼치는 성공 인생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이웃을 감동케 하고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긍휼과 헌신과 겸손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