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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조수현목사) 나뭇잎 치마와 가죽옷의 차이는?

본문

제목 : 나뭇잎 치마와 가죽옷의 차이는 ?
주제 : 죄사함 용서 구속
본문 : 창세기 3:1-21
말씀의 깊이 : ★★★★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숨었다. 그런데 그 부분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피한 것이 아니라, 벗은 것이 부끄러워서 피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피했을 때 그는 이미 자기가 손수 나뭇잎 치마를 해 입은 뒤였다고 분명히 성경에 쓰여 있다.


그렇다면 왜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벗은 것이 부끄러워서 피했다고 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의 나뭇잎 치마 대신에 가죽옷을 해 입히셨을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이 아담의 범죄 기사에 약간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부르실 때에 아담은 갑자기 숨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숨은 이유가 좀 이상합니다.



아담은 분명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령을 어긴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볼 면목이 없고 두려워서 숨고 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단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3장 10절에 보면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 보면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나이다』라고 좀더 정확히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발가벗은 몸인 것이 부끄러워서 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써 과연 선악과의 효능을 우리가 확인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더니 과연 눈이 밝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 부끄러운 것임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정말로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벗은 것이 선이 아니고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단도 말한 바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 선악을 알게 된다』



정말로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말도 이 부분까지는 맞았는데 그러나 그 다음부터 완전히 틀려 버렸습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벗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이 보일까 봐 숨어 버리는 불행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었다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서야지 숨기는 왜 숨습니까? 하나님처럼 되지 못했기에 두렵고 부끄러워서 숨은 것이 아닙니까?



인간들은 알고 보면 누구나 다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발가벗고 떳떳하게 거리에 다니는 사람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벗겨 놓으면 부끄러워서 못 다닐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들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동물들은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러운 것을 모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밝아지지 않아서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벗은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운 것을 알고 난 후에 오늘까지도 옷을 해 입고 다닙니다. 가식의 옷을 해 입습니다. 부지런히 옷을 해 입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벗은 것을 깨달은 직후에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렇게 둘이서 치마를 해 입은 후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은 그들 손으로 치마를 해 입고서도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어 버렸다』고 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비록 나뭇잎이기는 하지만 옷을 해 입고 있었는데도 왜 하나님이 찾으실 때 여전히『벗었으므로 부끄럽다』고 했습니까?



그들의 나뭇잎 치마는 하나님 앞에서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기에 너무나도 미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그 미흡한 나뭇잎 치마는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버리고 맙니다.





에덴 동산 중앙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큰 대조를 앞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시절에 그 두 가지 대비되는 나무를 예표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부끄러운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고,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부끄러운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나의 깨달아진 죄를 가려 줄 수는 없습니다. 단지 깨닫게 해 주는 효능만 있을 뿐입니다. 눈이 밝아지는 효능만 있을 뿐이지 그래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보게되는 효능만 있을 뿐이지 그것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서 하나님처럼 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설수 있게 하는 효능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교육을 하며 선과 악을 가르칩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선과 악을 가르칩니다. 그 가르치는 선과 악은 사실 다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악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내 자신의 부끄럽고 죄된 악한 모습이 발견되었을 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틀리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죄가 드러나면 공양미 삼백 석을 드리거나, 천번 절을 하거나, 한달 간 좌선을 하고, 물고기를 방생하거나 하는 등 선행과 고행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손으로, 내 자신의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서 입으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자기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 입었으나 그것 가지고 어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나설 수 있었습니까? 치마를 해 입고서도 두려워서 숨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나뭇잎 치마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벌거벗은 것을 본 이상 내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서 가리워도 온전한 가리움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나뭇잎 치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는 동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이 동물은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기 위해서 피를 흘리면서 대신 희생되었습니다. 죄를 씻으려면 반드시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에 동물을 희생시키고 피 묻은 가죽을 손수 벗기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나뭇잎 치마로는 안되기 때문에 피 흘린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끄러운 죄의 문제는 오직 예수의 피로만이 가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가죽옷은 피 흘리신 예수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장 14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장 3절).



나뭇잎 치마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그 치마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온전히 가릴 수 없었던 바 구원은 절대로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이미 창세기 시절부터 하나님께서 보여준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가죽옷을 입어야 다시 말하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죄지은 부끄러운 벗은 자로 정죄되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났습니다. 자기의 공로와 행위인 나뭇잎 치마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예복, 예수를 믿는 피 흘림의 이 가죽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죄지은 모든 인생은 피 흘린 예수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나뭇잎 옷으로는 안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10장 19절에 말씀했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지 않고서는 부끄러워서 감히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습니다.

이처럼 아담 하와에게 은혜로 입혀 주신 그 가죽옷은 바로 예수님의 예표 였던 것입니다. 아담과 같은 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던 것입니다.

무스탕이나, 토스카나는 좋아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손수 내려주셨던 이 가죽옷에 대해서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 가죽옷의 뜻과 효능을 반드시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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