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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함께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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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함께 보라!
민수기 13:25-14: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배고플 때는 만나를 내려 주셨고, 메추라기떼를 보내 주셨습니다.
목마를 때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앞길을 가로막는 대적자들을 만났을 때는 그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방 경계인 바란 광야의 가데스에 이르러 진을 치고,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전혀 다른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보고를 살펴볼 때, 똑같은 상황임에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 물량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몸이 크고 강한 거인 족속인)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민 13:27,28).
우리들 중에는 모든 상황들을 크고 작음과, 강하고 약함과, 많고 적음의 물량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작고, 약하고, 적을 때는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부정적으로 가나안 땅을 악평하면서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이성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성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볼 때, 가나안 원주민과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나안 원주민과 비교할 때,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논리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리석고 부족한데, 내게서 나오는 합리적이라는 것이 전적인 신뢰를 준다고 믿기에는 부족합니다.
또한 이성적인 논리는, 대개의 경우 비판적이고, 선동적이며, 부정적이라는 데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셋째는 대중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니까 옳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12명 중 10명이 주장하니까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10명의 이야기를 듣고 밤새도록 소리 지르며 통곡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민 14:1-5).

많은 사람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틀린 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게도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대중의 관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더 많습니다.
대중의 성향이 전부 믿을 것이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한계는 물량적 관점,
이성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
그리고 대중의 관점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관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입니다.
두 명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의 관점입니다.
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을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심시키며 말합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그들은 울며,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그 땅은 우리가 차지할 땅이요,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하나님과 함께 보는 사람은, 물량적인 시각과 이성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시각이 보지 못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대중이 경험할 수 없는, 깊고 심오한 개인적인 결단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과 함께 보는 사람은 미래적이며,
소망적이며,
모든 것이 가능하며,
능력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본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주신 땅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본 관점에서 그들은 아무리 가나안 원주민이 강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승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 시절에는 낙제생이었습니다.
그의 학적부에는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하여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 성적표를 물량적인 시각이나,
이성의 논리나 대중적 관점으로 본다면,
그에게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판단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에게 말합니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 같으려고 하면 열등생이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려고 하면 우등생이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으로 아인슈타인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주신 독특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인슈타인에게만 주신 독특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아들을 본 것입니다.
자기 아들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본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아인슈타인은 20세기의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이자,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입니다.
올바로 보아야 올바로 되고, 올바로 보아야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올바로 보는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은 믿음으로 보며, 소망으로 보며, 사랑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환경을 보기보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주어진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자가 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요청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 14:8).

중요한 것은 가나안 백성의 크고 강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이냐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 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야 약속된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지 못하기에 더욱 부정적이 되며,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의식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민 14:9).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 68:6).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하나님께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순종하는 자가 믿음의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 두렵지 않습니까?
왜 긍정적으로 감사하며 삽니까?
왜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에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의 제물로 삼기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가나안 땅의 약속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취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봄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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