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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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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향해 쏴라                                                                                                                               예레미야32:6-15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상실에 이르게 하는 병을 가리켜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또 절망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절망이란 자기의 상실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내일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한 마디로 위기의 시대입니다. 위기의 시대에 경계해야 할 것은 사탄이 쏘는 절망의 독화살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의 독화살에 맞으면 내일을 잃어버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내일에 대한 비젼이 없는 사람이요, 내일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내일을 향해 쏴라>입니다. 내일을 향해 쏴라 -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이 아닙니까?  <내일을 향해 쏴라>는 조이 로이 힐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열연했던 영화 제목입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각본, 촬영, 음악, 주제가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으로 실존인물이었던 부치와 선댄스라는 두 은행 강도의 생애를 다룬 영화입니다. 국내에서는 지금부터 약 35-6년 전에 상영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곡인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며 즐겨 부르고 있는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시납시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은행 강도지만 사람을 죽이지 않는 비교적 선량한 강도입니다. 은행을 털던 두 사람은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려는 듯 은행 강도에서 열차강도로 전업합니다. 부치의 명석한 머리와 선댄스의 날렵한 총 솜씨는 환상의 커플로 손색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현금수송열차의 습격을 계획합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겨 성공합니다. 또 다른 열차를 습격하여 강도짓을 하자 보안관이 추격대를 결성하여 쫓아옵니다.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던 두 사람은 남미의 볼리비아로 도망칩니다. 그곳에서 다시 은행을 털며 살아갑니다. 추격대는 두 사람을 잡으려고 볼리비아까지 쫓아옵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도피생활이 싫어 강도짓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볼리비아 경찰에게 쫓기게 되고, 경찰의 협조 요청을 받은 군대가 출동합니다. 출동한 수백 명의 군인들에게 쫓겨 외딴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총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중상까지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위기에 빠지지만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부치가 말합니다. <이곳을 빠져 나가면 호주로 가서 살자> <좋지, 호주로 가서 멋지게 살아보자> - 선댄스가 화답합니다. 밖에는 수백 명의 볼리비아 군인들이 두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습니다.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죽음 외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앉아서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호주 행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밖을 향해 뛰쳐나가며 총을 쏩니다. 지휘관의 사격명령에 군인들의 총구도 불을 뿜습니다. 희망의 내일을 향해 달리는 두 사람의 역동적인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희망의 내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의 구덩이에 빠져있을지라도 희망의 내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Ⅰ. 내일을 잃은 하나멜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는 암울한 격동의 시대에 살면서 동터오는 내일의 아침을 예언하던 말씀의 종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까닭에 그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로 부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말년에 애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 십 년에 예레미야가 왕궁 시위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무슨 죄를 범한 까닭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은 후 몇 날이 못 되어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와서 말하기를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고 했습니다.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멜의 부탁은 참으로 엉뚱하고도 이상한 부탁이었습니다.
 하나멜이 아나돗에 있는 자기 소유의 밭을 팔고자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멜이 밭을 팔고자 할 때 남 유다의 형편은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민심은 흉용하고, 경제는 도탄에 빠졌으며,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습니다. 때가 시드기야 왕 십년이라고 했으니 예루살렘의 멸망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던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하나멜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예루살렘의 현실을 보며 멸망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군대에 함락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유다 침략이 패역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징치의 회초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그 징치 후에 회복의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불신앙적이고도 편협한 그의 소견으로 볼 때 조국의 미래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관심은 오직 오늘이었습니다. 오늘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만족을 위해 그가 취한 방법은 자기 소유의 땅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아무리 좋은 땅(부동산)도 무용지물로 전락합니다. 전시상황에서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생필품과 현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발발하면 생필품을 사재기에 급급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현금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아나돗에 있는 자기 소유의 밭을 팔려는 것도 보다 많은 생필품과 현금을 보유하겠다는 현실적인 계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전시상황에서 쓸모없는 땅을 한 순간에 팔아 현금을 챙긴 하나멜은 능력의 사람입니다. 확실히 그는 시세와 재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급변하는 현실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요, 재치가 있고, 머리 회전도 빠른 사람입니다. 돌짝밭에서도 맨손으로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능력의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하나멜처럼 현실감각이 뛰어난, 현실적응력이 탁월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시세에 밝고, 재리에 밝은 사람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과외, 외국유학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만 그렇습니까? 성도 중에도 자기 자식을 하나멜처럼 현실감각이 뛰어난, 현실적응력이 탁월한 사람으로 키우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자기 아이가 성경을 읽는 것보다 영어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보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고, 교회생활에 몰입하는 것보다 학교생활에 몰입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볼 때마다 <공부하라>고 합니다. <기도하라. 예배드려라. 찬송하라. 전도하라>는 소리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의 때가 되면 주일에도 공부하라고 합니다. 내신 성적을 잘 받아야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니 교회에 나오지 말고 공부하라고 합니다. 신앙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라고 합니다.
 하나멜은 과연 인생의 모범 답안인가? 하나멜은 성공의 조건을 두루 갖춘 능력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고,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불행한 사람이요, 실패한 사람입니다. 왜 불행한 사람이며, 실패한 사람인가? 그의 가슴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다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몰랐습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고 해서 자기 소유의 밭을 파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행동입니다. 망령된 행동입니다. 하나멜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멜은 오늘을 소유하고도 내일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멜이, 내일을 잃어버린 하나멜이 어떻게 인생의 모범 답안이 될 수 있습니까? 미래적 비젼과 소망을 잃어버린 하나멜은 어떤 경우에도 인생의 모범 답안이 될 수 없습니다.  Ⅱ. 아멘의 사람  예레미야는 증인이 보는 앞에서 은 십칠 세겔을 주고 아나돗에 있는 하나멜 소유의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매매 증서를 두 통 써서 한 통은 봉하여 자신이 갖고, 한 통은 서기관 바룩에게 주어 토기에 담아 보존케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멜의 밭을 산 예레미야에 대해서 두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첫째, 예레미야에게 밭이 필요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그는 농부가 아니라 선지자입니다. 그의 직무는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에게 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②예레미야는 지금 자유의 몸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부동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③선지자였던 예레미야는 밭을 살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④전쟁으로 인해 하나멜이 죽으면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의 상속권이 예레미야에게 있으니 예레미야의 분깃이 됩니다.  이상으로 볼 때 예레미야에게 밭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멜의 밭을 살 수 있는 처지와 형편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밭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왜 샀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멜의 밭을 산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하나멜의 밭을 산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입니다. 그는 아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에 무조건 아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즉 시드기야 왕에게 가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전하라고 하시니 가서 전했고, 아나돗에 있는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시니 하나멜의 밭을 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조건 아멘하십니까? 이유를 따지고, 조건을 따지고, 옥석을 가리듯이 가려서 나에게 유익이 될 만한 말씀에만 아멘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필요에 따라 아멘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의 백성 된 자는 무조건 아멘해야 합니다. 어떤 말씀을 하실지라도 아멘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아니할지라도 아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아멘의 사람입니다. 믿기를 축원합니다.

 Ⅲ. 내일이 있다  아멘의 사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나돗에 있는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셨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지금 성 밖에는 바벨론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은 이미 하나님께서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습니까? 땅이 있어도 곧 빼앗길 것인데 어찌하여 은을 주고 밭을 사라고 하시며, 매수하는 일에 증인을 세워 공증하라고 하십니까?> 예레미야가 그 까닭을 묻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의 요지는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여 자기 소유로 삼을지라도 그 땅이 바벨론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거하던 그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고자 약속하셨던 땅입니다. 그런즉 그 땅을 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아나돗에 있는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신 것은 <유다 백성들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일의 정체는 바벨론포로지에서의 귀환, 성전 복구,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 등 회복의 은총을 말함이요, 장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남 왕국 유다는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하나멜이 아나돗에 있는 자기 소유의 밭을 팔고자 했을 때에는 세 번째 침략의 때였으며, 그 침략으로 말미암아 남 왕국 유다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수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남 왕국 유다가 다시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다에게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70년이 지난 후에 유다를 역사의 무대로 복귀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은 잃어버렸던 옛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멜이 밭을 판 것은 내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일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확신했다면 밭을 팔아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부딪치면 하나멜처럼 <내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에 급급하지 말고 내일을 바라보고, 내일을 소망하고, 내일에 투자하라고 하면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일을 소망하며, 내일에 투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우리 중에도 내일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까? 내일을 잃어버렸다면 잃어버린 내일을 되찾아야 합니다. 희망의 내일을 소망해야 합니다. 꿈꾸는데 돈이 들어갑니까? 내일을 소망한다고 해서 누가 세금을 더 내라고 합니까? 왜 내일을 잃어버립니까?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께 투자하고, 내일을 매수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한결같이 내일을 매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부동산이나 사람이게 투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투자해야 합니다. 오늘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내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 투자해야 합니다. 내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여 주실 것을 믿고 투자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 즉 희망의 내일을 매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회복과 번영의 은총을 매수해야 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매수해야 합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새 영광 교회의 성도들아! 내일의 밭을 사라! 희망의 내일을 소망하라! 영광의 그 날을 갈망하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내일의 밭을 사라고 하시니 내일의 밭을 사야 합니다. 소망의 내일을 바라보라고 하시니 소망의 내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이 주는 중대한 교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중대한 교훈은 우리 모두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내일이 있다. 내가 너희의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겠다. 지금 답답한 중에 있느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느냐? 낙심 중에 있느냐? 너에게 희망의 내일이 있다. 희망의 내일을, 소망의 내일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그런즉 오늘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내일의 밭을 사라. 희망의 내일을 소망하라>는 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박집사님에게 내일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김집사님에게 찬란한 내일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이집사님에게 희망의 내일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정집사님께 소망의 내일을 주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신의학자 매슬로(A.H. Maslow)는 <희망은 인간의 가치관을 좌우 한다>고 했습니다.  신학자 틸리히는 <희망은 인간에게 살아야 할 의미를 제공 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철학자 스미드(Huston Smith)는 <희망은 만족한 생활의 기본적 구조>라고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희망은 성공으로 인도하는 신앙이다. 희망이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으며, 희망이 없이는 인간 생활이 영위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요 신학자인 죠지 허버트는 <희망은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양식이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풀러는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엘리오트 웨렌 라이스는 <희망은 질병, 재앙, 죄악을 고치는 특효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왕 같은 족속이요,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이 아니라 시온의 대로입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길입니다. 30배 60배 100의 결실을 맺게 하는 축복의 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오늘 나에게 주어진 여건들이 너무 어렵고, 힘들고,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일은 잘 된다. 내일은 비가 그친다>고 말하며, 내일에 소망을 두고, 내일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가슴에 내일을 품은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함 속에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현실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지라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가루 한 웅쿰과 기름 조금밖에 없을지라도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 혼자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지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먼저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 심습니다.  찬란한 미래는 내일을 향해 믿음의 총을 쏘는 사람의 것이요, 내일의 밭을 사는 사람의 것입니다. 내일을 가슴에 품고, 그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영광의 그 날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회복의 은총이 강수처럼 흐르고, 소낙비처럼 내려지기 원합니다. 내일의 밭을 매수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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