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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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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가 그 인격을 결정합니다. 생각은 씨앗이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행동이 쌓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곧 우리 인격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은 하나님 생각을 하기 때문이요, 마귀가 마귀인 까닭은 마귀의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홉 번째 정의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악한 것을 품지 않거나(과거), 악한 것을 바라보지 않거나(현재), 악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미래)이 사랑입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곧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우주의 원리나 진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로기조마이’는 단순한 생각 정도가 아니라 수학에서 계산하듯이 엄밀한 생각의 과정을 말합니다. 곰곰이 묵상하는 것이며 치밀하게 계산하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시편에서 악인이 밤을 새워가며 악을 도모하듯이(슥8:17) 그렇게 악한 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사랑 : 원한을 품지 않으며

알을 품으면 새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계란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오고, 독사의 알에선 독사가 나옵니다. 악한 것을 속에 품고 있으면 악한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하며 공동번역은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로 번역합니다. 우리 인생을 보면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했던 것을 결코 잊지 않고 앙갚음을 합니다.

과거에 받았던 아픔은 쉬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 위에 새기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원수된 것은 돌 위에 새겨 두고두고 품고 있습니다. 친구가 자기를 섭섭하게 했던 일은 결코 잊지 못합니다. 특히 자기가 어려울 때 냉대하거나 외면했던 기억들은 오래 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위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합니다. 친절한 말만 하도록 주의 하십시오. 반대로 어려운 때는 누가 물 한 모금만 떠다주어도 그 친절이 오래도록 기억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말씀하신 데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작은 자처럼 연약해져 있을 때는 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남편들은 아내가 임신하거나 아이를 갓 낳았을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아내가 매우 예민해져 있을 때입니다. 이때 친절하지 못하거나 부주의한 말이나 행동 하나가 평생 상처로 남습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하는 꺼리가 됩니다. 여자들은 남자가 연약해져 있을 때, 예컨대 실직을 했을 때에는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도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미련한지라 아차 하는 순간에 실수를 하고 맙니다. 반대로 이런 공격들은 우리 삶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그때에 그 악한 것을 마음에 오래토록 품고 있지 말라 말씀합니다. 오래도록 품고 있는 것 이것이 곧 ‘원한’이 됩니다. 악한 것, 곧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나 부정적인 생각은 강물에 흘러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도 행복하고 인간 관계도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두 친구가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친구는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빰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 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그 친구가 돌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주었던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 위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 위에 적었지?”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테니까.”

우리 인생이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한 인간관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한과 북한은 6.25 한국 전쟁이라는 엄청난 아픔을 겪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 중에서 이 한국전쟁의 상처를 겪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서 땅을 빼앗기고 죽창으로 이웃이나 자기 친척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아픔들을 생각한다면 북한에 대해 보수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을 단지 ‘친미 반공’이라는 딱지로 규정하기에는 그들의 상처가 너무 큽니다. 반면에 북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 폭격과 국군과 반공 청년단에 의해서 죽어간 수많은 아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가 받은 상처만 기억하고 서로를 미워합니다. 이제 분단의 상처도 60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과거는 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서로를 용서하며 나아가야 할 터인데 우리 한국 사회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에 매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주님에게 행한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날 때 그 탕자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에서 아버지가 살았을 때 재산 양도는 가능하지만 그럴 경우 아들은 소유권만 갖게 됩니다. 처분권과 수익권은 여전히 아버지 몫입니다. 즉 아들이 재산을 팔 수는 있어도 그 권리는 아버지가 죽은 연후에야 타인에게 넘어갑니다. 그 사이에 발생하는 수익도 여전히 아버지 몫입니다. 그런데 이 탕자는 이 처분권과 수익권마저 요구합니다. 성경에서는 탕자가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무자비함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떼어 줍니다. 탕자는 그 재산을 가지고 가서는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두 번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모은 재산을 허무하게 낭비해 버린 것입니다. 큰 아들은 동생의 이런 방탕한 삶의 태도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자기 동생이라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15:30)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때 버선발로 달려가 환영하고 성대한 잔치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악한 것, 곧 자기에게 잘못한 것들을 물에 흘려보냈던 것입니다. 그가 목숨을 붙이고 돌아온 사실 그 한 가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했던 배신들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았던 불순종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 다 기록한다하여도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모래에 새겨 바람 불 때 날리시는 분이십니다.

사사기의 역사를 보면 우리 하나님이 기억력이 없으신 분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사기의 싸이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사기 3장 7절에서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바알 우상을 섬깁니다(배신). 이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웃 나라의 수탈을 당하게 만듭니다(심판).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못살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기도).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평화를 허락해 주십니다(구원).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이들이 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배신합니다(배신).

사사기에서는 이런 배신 - 심판 - 부르짖음 - 구원의 싸이클이 무려 7번이나 반복됩니다. 7번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류 역사가 하나님을 배신하는 역사인데 하나님은 그 배신을 빨리 잊어버리십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삼사대와 천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자는 삼사 대까지만 기억하시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를 천대까지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이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계에 흐르는 저주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들은 삼사대의 저주만 생각하지 천대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한 것은 크게 보고 선한 것은 작게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이나 악한 것을 비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원한이나 원망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악한 것을 두고두고 품지 않습니다.

현재를 잃는 사랑 : 상대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자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상대의 부정적인 것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눈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상대방이 가진 좋은 기질에 대해선 눈을 감고, 악한 면은 크게 확대하여 봅니다. 상대방의 단점만 눈에 보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매사에 느리고 답답하지만 반면에 성격이 좋고 적이 별로 없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깨끗하고 능력 있게 일을 처리하지만 반면에 성격이 급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완벽주의적인 사람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습니다. 덜렁덜렁한 사람은 일처리가 미숙하지만 반면에 스트레스는 덜 받습니다. 인간에게는 단점이 곧 장점이고, 장점이 곧 단점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이런 다양한 모습 중에서 긍정적인 면이나 장점을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 곧 부정적인 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도 삽니다. 자꾸 부정적인 성격만 강조하면 그 사람도 주눅이 들어 자기 강점도 활용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는 등 천재적인 물리학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대인관계는 거의 빵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낸 곳은 유명 대학 연구실이 아니라 특허사무소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그의 대인관계가 엉망이었고 그의 지도교수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도교수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자네는 똑똑한 친구야. 그런데 자네한테 단점이 하나 있어. 도무지 남의 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단 말이야”

고등학교 때 아인슈타인은 물리나 화학만 잘했지 어학 과목은 거의 낙제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아인슈타인을 향해 그의 그리스어 교사는 이렇게까지 말을 했습니다. “장차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방해만 되잖아. 당장 학교를 그만 둬!” 만약 아인슈타인이 이런 평가에 낙담하고 연구의 길을 포기하였다면 오늘날의 물리학의 발달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단점과 장점이 다 있는데 사람을 살리는 것은 장점을 보고 그것을 인정하는 우리의 눈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결정이 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의 단점만 보인다면 그 사랑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눈과 친정어머니의 눈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한 시어머니가 아들 집에 방문했는데 아들이 빨간 고무 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며느리는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시어머니는 속에서 열불이 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길러서 장가 보냈더니 하는 짓이 고작 그 모양이냐?” 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친정어머니가 방문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직장 일로 힘든 자기 딸을 그렇게 친절하게 챙겨주는 사위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위 고맙네!”

동일한 상황을 이렇게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한쪽은 아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며느리가 미운 것이고, 다른 쪽은 딸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사위가 고마운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단점만 보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눈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단점은 불쌍히 여기고 장점은 위대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은 우리 장점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만들 때 장점 가지고 살라고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곧 개성입니다. 봄에 피는 꽃이 있는 반면에 가을에 피는 꽃이 있습니다. 꽃을 더 중시하는 식물이 있는 반면에 잎이나 자태를 더 중시하는 식물이 있습니다. 개나리 꽃은 그 노란색만을 기억하지 여름 철 잎사귀만 나 있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것이 개나리 꽃인지 다른 꽃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잎이나 가지가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 그 결대로 풀어가십니다. 즉 우리 성격대로 인도해 가신다는 말입니다. 창세기를 읽다보면 그런 사실을 잘 깨닫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의지와 신앙이 굳건한 사람에게는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내리십니다. 이삭은 온유하고 성품이 온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심으로 언약의 조상이 되게 만드십니다. 야곱은 야망이 많고 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막 굴려도 됩니다. 그래서 밧단아람이란 곳에서 20년 동안 연단을 시키십니다. 요셉은 지혜의 사람이며 또한 강직한 사람입니다. 어떤 위기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기에 멀리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만드십니다. 결국 이 고난이 오히려 축복으로 변하여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맞게 일을 맡기시고, 또 우리가 가진 장점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만드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곧 악한 것보다 선한 것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미래를 포기하는 사랑 : 잘 되기를 소망하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믿고 그 미래를 축복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상대방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 이것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심성에는 다른 사람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는 못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경쟁자로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도시라는 좁은 공간, 또 자본주의라는 경쟁 사회는 참으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일등만이 살아남고,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만나는 사람은 더 이상 따뜻한 정과 피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밟고 정복해야 하는 물질적 대상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악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마음은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사람의 미래가 잘 풀려지고 형통한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요한 삼서에서 사도 요한이 장로 가이오에게 간구하는 그런 마음이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사랑하는 자의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복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향하여 이 축복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이런 사랑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이 잘되기를 소망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가정이 행복하고, 자녀들 지혜롭고 강건하며, 사업이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렵고 힘들면 제 마음도 힘이 듭니다. 제 일가친척 그 누구보다도 여러분을 향한 기도가 더 간절하고 더 많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할 적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성공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였지만 우리가 주님께 불순종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는 오히려 죄가 우리를 주장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형제 아벨의 성공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 그만 형제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곧 살인하는 자라고(요일3:15) 말씀하시듯 미움이 자라 살인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함께 살고 서로를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생각이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미우라 아야꼬라는 일본의 유명한 신앙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가 쓴 소설 『빙점』은 이리본과 우리 한국에서도 유명한 소설입니다. 이 미우라 아야꼬는 젊은 시절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당시 폐결핵은 죽음의 질병으로 그로 인해 죽지는 않았지만 24세부터 37세까지 한창 꽃다운 시기를 침상에 누워 지내야만 했습니다. 척추에 손상이 생겨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브스를 하고 지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으며, 바깥 풍경은 조그만 손거울을 통해서만 겨우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보아주던 한 친구에 의해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병상에서 세례를 받은 미우라 아야꼬는 이후 내내 성경만 읽으며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병상에서 일어난 미우라 아야꼬는 남편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남편은 미우라아야꼬의 마지막 투병 생활 5년을 지켜주어던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하였지만 생활이 어려워 작은 가게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우라아야꼬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친절하게 했기 때문에 장사가 아주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가 너무 잘되어 이웃가게들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것 같소”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미우라 아아꾜는 그 이후부터는 가게에 모든 물건을 팔지 않고 몇 개의 주요 상품만 팔기 시작했습니다. 오는 손님들도 이웃 가게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하자 가게에 한산해지면서 그동안 미루어왔던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소설『빙점』입니다.

남을 잘되게 하면 자신도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면 상대방도 경계심을 풉니다. 아니 사람은 반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잘되기만을 소원하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과거에 행한 악한 잘못을 기억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악한 모습보다 선한 모습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은 상대가 잘되기를 소망하는 선한 생각을 항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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