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마음 (벧전 5:8-9)
본문
(본 설교문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 “예수님처럼”에 나오는 내용으로 한 설교입니다. 내용이 은혜스러워 이곳에 올립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온실을 방문하였다고 생각해봅시다.
온실 주인은 이 온실이 아버지한테 받은 선물이라고 말해준다. 아버지는 최첨단 장비를 사용해 식물 재배의 이상적 환경을 꾸몄다. 공기는 완벽하다. 조명은 정확하다. 온도도 화초 과수할 것 없이 무엇에나 꼭 맞는 온도이다. 자신이 재배하고 싶은 것은 화초와 과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온실에는 잔디씨와 민들레씨와 씨와 같은 온갖 잡초씨가 가득 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 나는 당신이 온실을 화초와 과수로 채우고 싶어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 맞습니다”
“ 그렇다면 화초씨와 과일씨를 심어야 하지 않습니까?
“ 그런 씨들이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거기다 종묘사는 또 얼마나 멀고요 됐습니다. 싸고 쉬운 길로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면 그 주인의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십은데 팥난다. 그러나 땅을 가꿀 때는 잘 아는 그것을 마음을 가꿀 때는 이것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또 하나의 온실인 여러분의 마음을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유사성이 금방 눈에 뛴다. 여러분의 마음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여러분의 마음도 완벽한 재배조건을 부여받았다. 당신의 마음도 온실처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씨앗과도 같은 당신의 생각을 잠시 떠올려보십시오. 어떤 씨는 꽃이 됩니다. 어떤 씨는 잡초가 됩니다. 희망의 씨앗을 뿌리면 낙관의 결실을 누린다. 회의의 씨앗을 뿌리면 불안의 열매를 맺는다 “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많은 어려움 때문에 저 사람의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늘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의 저럴 수 있는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불굴의 힘으로 부정적 생각을 이겨내며 늘 인내와 낙관과 용서를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왜 그럴까 궁금했던 적이 여러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선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려 지금 그 수확을 누리고 있는것 아닐까요? 그런데 늘 우울한 모습으로 죽을 상인 사람들을 보며 왜 그럴까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잡초와 가시덤불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스갯 소리를 당신도 혹 들어보았는지 모른다.
까탈스러운 아내를 둔 남자가 어느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6시 30분에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의 기분을 띄워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 내가 지금 막 집에 돌아온 걸로 하고 다시 해봅시다. ”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남편이 다시 문을 열자 아내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지금 7시반이에요 어디가서 뭐하다 이제오는 것예요?”
이 아내는 잡초 같은 생각의 수확을 거두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잠시 멈추고 중요한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마음이 온실이요 생각이 씨앗이라면 우리도 조심해서 씨를 뿌려야 하지 않을까요? 온실에 들여 놓을 씨앗을 잘 골라야 하지 않을까요? 문간에 보초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을 가꾸는 일은 전략을 요하는 작업이 아닐까요? 성경에 의하면 그렇다. “무릇 지킬만 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다. “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인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맞는 말인가? 과연 공감되지 않는지 그 원리를 한번 시험해보십다.
두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 똑같은 교통 체증에 걸린다. 한 사람은 열을 받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스케쥴 다 망쳤잖아. 또 한 사람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두 어머니가 똑같은 비극을 당한다. 한 사람은 자멸하고 만다. 난 다시 일어설 수 없어 또 한 사람은 낙심중에도 뜻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감당케 해주실 거야
두 사업가가 똑같은 성공을 이룬다. 한 사람은 자기에 취하여 자만해진다. 또 한 사람은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며 감사드린다.
두 남편이 똑같은 실수를 범한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마음에 쓴뿌리를 키운다.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새로운 깊이를 발견했다면 마음에 감사를 품는다
“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 자신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사실과 우리 자신이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지키는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려면 마음에 성벽을 잘 세워야 합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의 성벽을 깨뜨리는 것들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무너진 성읍처럼 될 것입니다. 잠언 25장 28절을 보면 “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고 말씀합니다. 마음과 생각은 성벽과 같습니다. 마음과 생각의 성벽이 외부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벽은 큰 군대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땅강아지 때문에 무너집니다. 큰 둑도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만든 구멍 때문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포도원을 허무는 것은 큰 사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작은 여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아가서 2장 15절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출장 기간 중 다른 사람에게 우리 집 관리를 맡긴다. 하자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잘 간수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내가 돌아와 보니 집은 엉망이 되어 있다. 카펫은 찢어지고 벽은 낙서 투성이에 가구는 깨어져 있다 해명이라고 들어보니 도대체 얼토당토 않은 소리이다. 자전거 패거리가 찾아와 묵어갈 곳을 찾더란다. 또 럭비팀이 전화해 파티 장소를 찾더란다. 물론 동아리 모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입단식을 할 장소가 필요했다. 주인으로서 나의 질문은 딱하나이다. “너는 거절할 줄도 모른단 말이냐? 이 집은 네 집이 아니다. 들어오고 나가고 아무나 들여보낼 권리가 너한테는 없단 말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시고 싶지 않을까요?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오고 나가고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내 멋대로 들여보낼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일부에는 이미 쓰레기가 널려 있음을 당신은 인정해야 합니다. 하찮은 오물이 와서 문을 두드려도 우리는 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분노가 들어닥쳐도 들여보낸다. 복수가 머무를 곳을 찾아도 의자를 내 준다. 연민이 파티를 원하면 부엌으로 안내한다. 정욕이 초인종을 울리면 새 이불을 꺼내준다. 우리는 거절할 줄도 모른단 말입니까? 모르는 이들이 많다. 우리 대부분의 경우 생각관리란 별로 생가지 않는 문제이다. 시간관리, 체중관리, 인사관리, 심지어 피부관리 에는 많은 생각을 들인다. 그러나 생각 관리는 어떤가? 그 어느 것의 관리 못지 않게 사고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그러셨다. 성문을 지켜선 노련한 병사처럼 그분은 자신이 마음을 살피셨다. 마음의 입구를 단단히 지키셨다 많은 생각들이 입장을 거부했다. 몇 가지 예를 보고 싶은가? 교만은 어떤가? 한번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얼마나 매력 있는 생각인가? 우리라면 누구나 왕위를 생각하며 입이 벌어졌을 것이다. 혹 왕관은 마다했을지라도 그 청빙을 생각하며 자못 흡족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달랐다.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5)
또 하나의 극적인 예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 임박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시자 충동적인 사도 베드로가 만류하고 나섰다.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베드로는 이어 갈보리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문간을 막아서셨다.예수님은 이단적 생각의 입안자와 전달자를 동시에 줄달음쳐 달아나게 만들었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
예수께서 조롱 당하시던 때는 어떤가? 여러분은 사람들 한테 비웃음을 당해 본 일이 있는가? 예수님도 있었다. 소녀를 고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집에 가보니 사람들은 예수께 소녀가 이미 죽었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반응은? “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집에 와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 저희가 비웃더라”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모욕의 순간에 부딪쳐야 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과는 달리 그분은 그 모욕을 받기를 거부하셨다. 그분의 단호한 반응을 보십시요 “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막 5; 39-4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롱은 소녀의 집에도, 주님의 마음에도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지키셨다. 그분이 그러셨다면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는가? 말할 것도 없습니다. “ 무릇 지킬 만한 것 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이 비옥하여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 같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신다. 빌 2:5) 하지만 어떻게? 해답은 놀랄 정도로 간단하다. 이 한가지를 결단하면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 나는 내 생각을 예수님의 권위에 복종시키리라
마태복음 끝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의미심장한 주장을 우리는 그냥 간과하기 쉽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최고 경영자라 주장하신다. 삼라만상 특히 우리 생각의 최종 결정권은 그분께 있다. 예컨대 그분의 권위는 당신의 부모보다 높다. 부모는 당신이 쓸데 없는 존재라 말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소중한 존재라 말씀하신다. 부모도 그분의 권위아래 있다. 당신에 대한 그분의 권위는 당신 자신보다도 높다. 당신은 스스로를 죄가 너무 많아 용서받을 수 없는 자로 볼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생각이 다르시다. 여러분에 대한 권위를 그분께 드린다면 그런 정죄의 생각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생각에도 미친다. 당신이 은행 강도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자. 예수님은 도둘질이 잘못임을 분명히 하셨다. 당신의 생각을 그분의 권위아래 둔다면 절도 계획은 당신의 생각 속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권위라는 말의 의미를 알겠는가? 순결한 마음을 지니려면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가 기꺼이 그럴 마음만 있다면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마음의 정원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잘 선택한다는 것은 미래를 잘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거 우리 마음에 품었던 생각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오늘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제임스 알렌은 “ 당신의 현제의 모습은 당신의 과거 생각의 결과이며 당신의 미래의 모습은 당신의 현재 생각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생각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생각의 법칙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입니다. 생각은 결과를 낳습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생각은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다시 온실 얘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좋은 과일을 맺을 준비가 돼 있는 비옥한 온실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마음의 문간- 뿌릴 씨앗과 버릴 씨앗을 결정하는 전략적 장소- 이다. 성령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생각들의 관리 및 여과 작업을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러분과 함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수상한 생각이 접근해 옵니다. 문을 활짝 열어 들여보낼 것인가? 물론 안됩니다. 당신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후 10;5) 문을 무방비 상태로 그냥 두지 않는다. 부적합한 생각을 사로잡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수갑과 족쇄를 들고 서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자존감에 대한 생각이 접근해 온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동네 깡패의 모습으로 그 생각이 문간으로 으스대며 걸어와 말한다. “ 이 패배자! 너는 평생 패배자였지 인간관계도 직업도 야망도 다 날려 버렸어 아마 이력서에 쓸모 없는 폐품이라고 써도 될 걸 그게 바로 너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문을 열고 그 생각을 들여보냅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잡초 씨앗처럼 옥토를 찾아 뿌리를 내려 열등감의 가시를 맺힌다. 보통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네 말이 맞다. 나는 쓸모 없는 존재야 어서 들어오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생각을 들여보내지 않고 포로로 사로잡는다. 수갑을 채워 법정으로 끌고 가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에 그 생각을 내 놓습니다
“ 예수님, 이 생각이 말하기를 저는 폐품이요 패배자이며 평생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생각에 찬성하면 그때는 들여보내라 그렇지 않다면 차내 버려라 이 경우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찬성인지 반대인지 어떻게 압니까? 성경을 펴보십시요. 하나님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에배소서 2;10절이 확인하기 좋은 곳입니다.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은 어떤가?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당신이 못났거나 하찮은 존재라고 말하는 생각은 분명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며 따라서 입장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깡패의 정강이를 힘차게 걷어차 줄행랑 치는 것을 지켜 볼 권리가 있습니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생각이 깡패였다면 이번 생각은 열성 팬이다. 팬이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못난 존재인가를 말하려 함이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를 말하려 함이다. 이 생각이 문간으로 달여와 찬탄을 쏟아낸다 “ 와 멋있다. ! 정말 멋있다! 당신이 있음은 이 세상에 얼마나 큰 복인가? ” 열성팬의 아첨은 끝이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전형적으로 환영하는 부류의 생각이다. 그러나 당신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당신은 마음을 지킨다. 성령안에서 행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다. 당신은 이번에도 예수님께 간다. 이 생각도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시킨다. 성령의 검을 뽑아보니 즉 하나님의 말씀을 펴보니 교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 3)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아무리 이 달콤한 생각을 온실에 환영하고 싶어도 당신은 그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허용하시는 것만 당신도 허용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비난의 생각도 아니고 아첨의 생각도 아니고 유혹의 생각입니다. 당신이 남자라면 그 생각은 야한 붉은 옷을 입었습니다. 당신이 여자라면 그 생각은 당신이 늘 원했던 멋진 남자입니다. 악수로 손끝이 스칠 때 향수 내음이 확 퍼지면서 은근히 초청의 말이 들려옵니다.“ 어서! 괜찮아. 우린 다 큰 어른이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있지 않다면 문을 활짝 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면 뒤로 물러서며 이렇게 말하리라. “너무 성급하시군요 우리 형님의 허락이 있어야 됩니다. ” 그리하여 당신은 그 섹스의 생각을 예수님 앞에 가져가 여쭙는다.“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그분의 대답이 고린도전서 6.7장 보다. 더 분명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 음행을 피하라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여자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6:18)
그리스도의 뜻과 성령의 검으로 무장한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유혹자가 당신의 배우자가 아니라면 문을 닫아걸라. 초청이 배우자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반가운 일이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간을 지켜라. 당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시키라. 그리스도가 허락하신 생각만을 여러분의 마음에 들여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반대하는 생각은 들여와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와야 되고 안 들어와야 하는지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씨앗을 잘 고를수록 수확의 기쁨은 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