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 (벧전 2:9-10)
본문
저희 교회는 요즘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 중에 있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신중하게 정말 아름다운 성전을 짓기 위하여 서두르지 않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성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자신을 위한 집을 짓지 않고 남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예배당이 아닌 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동안 교회가 많이 성장하여 마음먹고 매진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를 위한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지만, 우선 그것을 포기하고 우리가 아닌 남을 위하여 그만한 힘을 쓰려고 하는 것이 보이지 않은 성전건축의 개념입니다. 우선 크게 세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빈민 자활, 북한과 탈북자 섬김을 통한 평화통일 준비 그리고 인재양성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일에 예배당을 건축하는 만큼의 힘을 쓰려고 이미 헌금을 작정하고 헌금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와 같은 일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남은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을 건축하는 만큼의 돈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중요한 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 올바른 장로교회의 정치를 통해 민주적인 교회를 이루는 교회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높은 뜻 숭의교회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은행 같은 교회입니다.
한국은행 같은 교회란 교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집사님 한분이 저에게 해 주신 말이었습니다.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웬만하면 말귀를 알아듣겠는데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란 말은 선 듯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한국은행은 자신을 위하여 영업을 하는 은행이 아닙니다. 한국과 한국에 있는 은행을 위한 은행입니다. 우리 교회도 한국은행과 같이 우리교회를 위한 교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교회 하나 더 세운다고 하나님께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그 말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느 정도 그와 같은 정신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주 정확하게 그것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는 저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매우 중요한 목회철학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배당 건축하는 일을 우선 뒤로 미루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통 교회들이 자신의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듯 우리도 최선을 다하여 건축헌금을 하고 그 돈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자 매우 중요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현재를 사는 교회가 아니라 미래를 앞당겨 사는 교회가 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지은 다음에 하려면 최소한 앞으로 십 년을 더 있어야만 생각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뿐만 아니라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보다 최소한 5배 이상은 커져야만 쓸 수 있는 단위의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힘이 생겼음으로 위험할 수도 있고 그러므로 조심도 하여야 하지만, 우리 교회가 그와 같은 건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현재는 보통 다른 교회들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미래 그것도 성공적인 미래를 살고 있는 특별한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자랑스럽고 그리고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을 하려고 할 때 당연히 예상되는 사탄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 예배당 건축을 우선 포기함에 따른 불편과 불안의 극대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탄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우리 예배당 없는 불편과 불안을 더 키웁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정작 우리교회는 길거리로 나 앉게 되어 공중분해 되는 것은 아닌가?
저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사기꾼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을 실제로 믿고 그 때문에 불안해한다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만에 하나 그와 같은 일어난다고 하여도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교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다가 보이는 성전이 없어서 그 때문에 우리가 공중분해 된다면 저는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를 위하여 눈에 보이는 영원하지 못한 교회를 포기해야 한다면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하나 없어 진다고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말고도 다닐만한 좋은 교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가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생명을 걸지 않고 그냥 생존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말 근사한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이루고 필요하다면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에스더의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한국은행 같은 교회라면 교인들도 한국은행 같은 교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치 한국은행 같아야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바로 한국은행 같은 역할입니다. 제사장은 물론 자신의 죄를 위하여서도 제사를 드리지만 자신의 죄만 해결하려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보다 더 중요한 사명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의 죄로 말미암아 나빠진 사이를 회복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제사장인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한국은행과 같은 직분과 직업이며 제사장이란 자신을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건축하는 직분과 직업이 아니라 만인을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직분과 직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그와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성직자라고 부릅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같은 목사만 성직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제사장이라는 말씀이 곧 우리가 생각하는 성직자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목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직자라는 말씀이고, 모든 직업이 다 성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세속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여러분의 직업이 다 속된 것이 아니고 다 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의 목적인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에 있지 아니하고 영적이고 제사장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진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는 외국어 대학교 교수님들의 모임에서 몇 년 동안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가 끝난 후 교수님 한분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학기 초에 학교 게시판에 성경공부 안내문을 붙였답니다. 저는 아무개 교수입니다. 예수 믿는 교수입니다. 나하고 성경공부 할 사람 무슨 요일 몇 시에 연구실로 오라고 하였답니다. 30여명의 학생들이 왔는데 그 중에 9명이 한번도 교회를 다녀보지 않은 학생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많이 감동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내가 그 학교 게시판에 그런 광고를 붙여도 학생들이 올까?” 물론 저를 알고 예수를 잘 믿는 학생 몇은 혹 올는지 모르겠으나 믿지 않는 학생들이 올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대학생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는 직업적으로 목사보다 교수에게 많습니다. 목사만 주의 종, 성직자라고 생각하는 편협성을 고집한다면 복음을 절대로 땅 끝까지 전파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의 종이고 제사장이고 성직자라는 의식을 가질 때에만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현대 사회의 목사는 유일한 주의 종과 제사장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의 목사는 목회를 전문으로 하는 특별한 그리고 아주 근사한 직업 중에 하나입니다. 목회는 유일한 성스러운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의 한 영역입니다. 목사를 제외한 다른 직업은 다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세속적인 직업은 하나님 안에 없습니다. 모든 직업은 다 성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직업은 소명입니다.
우리는 소명을 받았다는 말을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목사가 되는 것에만 씁니다. calling이 있느냐 없느냐 말 할 때에 그 의미도 목사로 부름을 받았느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사라는 직업으로만 calling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으로 calling 하십니다. 여러분의 직업은 하나님의 calling입니다. 직업을 밥 벌어 먹으라고, 돈 벌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소명입니다.
영락교회 고등부를 섬길 때 학생회장 하던 아이가 서울대학교를 갔습니다. 법대 대학원 엘 가더니 가자마자 고시를 단번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10등 안에 붙었습니다. 저에게 세배를 왔길래 이 다음에 대법원장 한번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그런데 욕심 없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모든 직업이 성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법조계에 선교사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이 된다면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가 더 좋아질꺼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학생은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해 11월 달 쯤 법대에 다니면 고시를 준비하던 학생 하나가 상담을 왔습니다. 여름방학 때 교회 청년대학부에서 가는 농촌선교봉사를 가서 축호전도를 하다가 전도하던 친구들과 함께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답니다. 가슴이 뜨거워진 아이들은 교회로 돌아온 후에도 예배 후에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열심히 기도하곤 하였었는데 어느 날 기도하다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하였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고시를 치러야 하는데 갑자기 선교사 서원을 하고 보니 고민이 생겼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서원 기도하고 어기면 벌 받지요?’
제가 아이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꼭 선교사가 되는 것만이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러 주었습니다. 꼭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같은 곳만 선교지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 주었습니다. 법조계로 매우 중요한 선교지이며, 누군가는 그 법조계에 선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선교사가 되려면 고시에 패스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그 학생이 놀라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었던 아이가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하며 자기는 꼭 그런 법조인과 선교사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아무개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년 초에 저에게 세배를 왔던 그 친구였습니다. 당시 대학부에서 교사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잘 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가 연초에 세배 왔길래 내가 대법원장 하라고 하였다. 끝나면 네가 해라’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가 생존을 위한 교회가 될 때 초라해 집니다. 무력한 교회가 됩니다. 존재의 이유가 없는 그런 교회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교회가 되고 맙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조차 발에 밟히는 그런 교회가 되고 맙니다.
교인인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출세를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고작 자기 자신만을 위한 집을 짓는 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초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성공하였다고 해도 그냥 자기 밥이나 먹는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직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성전만 지으라고 교회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듯 자신만을 위하여 살라고 우리에게 직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직업을 통하여 보다 크고 높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주신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 피택 장로님들을 교육하면서 ‘장로의 직은 소명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큰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는 그리고 오해 받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장로를 우습게 여기고 목사만 주의 종이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명은 직업에만 붙이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고, 장로의 직이 아무리 중요해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직업보다 중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와 집사와 권사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직업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실력과 인격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제사장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5월 27일은 우리 교회가 전도축제로 지키려고 하는 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아직도 전도할 대상자를 찾지 못하셨다면 여러분들이 너무 신앙생활을 교회 중심적으로만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교회로만 치우치게 되면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전도의 대상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야를 세상으로 돌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충실하듯 세상에 충성하고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이끌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가진 왕 같은 제사장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