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즐기는 삶 (시 2:10~12)
본문
1. 즐거우십니까?
옛날 그리스에 24시간 내내 주지육림을 즐기면서 쾌락만을 탐닉하면서 살아가는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하여 상금을 내 걸고 천하에 공표를 했습니다. 자신을 더 즐겁게 해 줄 사람, 자신에게 더 짜릿한 쾌락을 느끼게 해 줄 사람을 천하에서 널리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온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 희한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들들 가지고 와서 그를 기쁘게 하려고 했으나 그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더, 더, 더”를 외쳤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기쁨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즐겁게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족, 기쁨, 즐거움, 쾌락, 희열 등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기쁘게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기쁘신가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드리자면, 여러분은 사는 것이 즐겁습니까? 아니면 인생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처럼 힘든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는 인생을 즐긴다는 말이 여유 있는 사람들의 사치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현실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즐거우십니까?”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생활은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의무감으로나 어쩔 수없이 하는 것으로, 정말 재미없고, 때로는 지기 싫은 짐을 진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 신앙생활
신앙생활을 즐기자는 얘기는 사실 저의 주장이거나 새로운 이론이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를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만들어 놓은 교리지침서인 <대․소요리문답>의 제 1문은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없는 영화나 영광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든다거나 혹은 그에게 영광을 추가시켜 드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고 무한히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와 모든 피조 세계에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요. 그것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은 영어로 “enjoy God forever”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엔조이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즐긴다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엔조이한다’는 표현이 어떻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구를 즐기고 음악을 즐기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죠. 어떠십니까? ‘하나님을 즐긴다’, ‘하나님을 엔조이한다’는 표현이 잘 받아들여집니까? 쉽게 용납이 되십니까?
움베르또 에코가 지은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수도원의 분위기를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금욕과 절제와 무게와 신중함이 강조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하나님을 즐긴다는 것이 말이 되냐?’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든지, ‘이것은 아주 불경스러운 것이다’ 라든지,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잘못되었고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오래된 교리입니다. 소요리문답의 정식명칭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인데요. 웨스트민스터라는 것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8개월 동안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모인 회의를 가리킵니다. 이 회의는 교회의 신조와 정치와 의식을 제정하기 위하여 121명의 칼빈주의 목사와 신학자, 18명의 귀족과 20명의 하원의원 등 모두 159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입니다. 이 회의에서는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 등 다섯 가지 표준문서를 결정했습니다. 이 문서들을 “Westminster Standards”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 이 문서들은 모든 민족과 세대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교리 표준이 되었습니다.
제가 왜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그 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교리를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즐긴다”고 하는 이 교리는 최근에 자유적인 신학, 인간중심의 신학, 현실적인 신학이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는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신학과 신앙을 아무렇게나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해서 내놓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미 400년 전에 159명의 개혁주의자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자그마치 5년 8개월 동안에 걸쳐서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토론하고 또 토론하여 만들어낸 교리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도, 그리고 인간중심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엔조이한다, 하나님을 즐긴다’는 것은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전통적인 교리입니다.
3. 여호와를 떨면서 즐거워하다
그러면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옛날, 유대인들이 가장 즐거워한 일, 그들이 축제로 삼은 일은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누는 기쁨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침 내기 게임을 해서 이긴 후 밥을 먹을 때의 기분과 비슷할지 어떨지 …. 둘째는 첫 아들을 낳아 할례를 행하면서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기업, 그리고 나를 너무나 닮은 아이를 얻은 기쁨은 이루말 할 수 없겠지요! 셋째는 추수 때에 곡식을 수확하여 거두는 기쁨이었습니다. 한 해 내내 수고하고 땀 흘려 거둔 곡식을 바라보는 기쁨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손님을 청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즐긴다, 즐거워하다’라는 말은 그 정황이 이러한 것들과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구약성경에는 '즐기다’ 또는 ‘즐거워하다’는 단어가 약 ‘410 군데’ 정도 나오는데요. 여기에다가 ‘기뻐하다’는 말까지 포함한다면 이와 유사한 표현은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즐기다’는 단어가 들어간 구절들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이라는 것이 뭔가 하면, 이 즐거움은 전쟁에서 이겨서, 성공해서, 자녀를 낳아서, 그리고 추수하여 즐거워하는 그러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부분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한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충분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될 만한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서 기뻐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의 조건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이 시편을 지은 이가 하나님을 즐거워 한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여기서 “떨다”는 말은 원어로 ‘몸부림치며 떨다’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너무 좋으면 까르르 웃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지 않던가요? 그렇게 너무 너무 좋아서 몸을 떠는 것을 오늘 본문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즐거워한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이해가 되시죠?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언어의 묘미’가 들어있습니다. 본문에 있는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겁을 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겁이 나면 어떻게 됩니까? 벌벌 떨지 않습니까? 그래서 본문에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떤다’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벌벌 떤다'는 말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떨림’은 그 뒤의 ‘즐거워한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지금 시인은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떠는 이유는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두려워서 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겁나서 떠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서, 하나님 때문에 너무나 즐거워서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즐거워하다(לינ, gil)’는 말은 ‘힘차고 열광적인 기쁨’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좋아서 몸부림치며 열광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때문에 기절할 듯이 환호하는 오빠 부대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조용히 묵상하듯이, 아니면 혼자서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아니면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찬양하는 정도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뛰며 춤추고 환호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와 세상을 지배하시고 통치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 오늘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열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합니까?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열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대신에 아직도 현실을 바라보고서 한 숨을 내쉬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라는 이탈리아 영화가 있었습니다. 로베르토 베니니라는 이탈리아 영화인이 감독과 주연과 각본을 맡은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칸느 영화제 대상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를 휩쓸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카데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가치는 인생의 아주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비극을 희극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스가 엄청난 유태인들을 학살했지 않습니까? 이 유태인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소재를 베니니는 기발한 상상력과 코미디 연기를 통해 '유쾌한' 비극으로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38년 이탈리아 토스카니 지방입니다. 영화는 이탈리아계 유태인 귀도와 아들 조슈아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자, 유태인이 아닌 아내 도라가 자청해 수용소로 함께 들어가 시련을 겪는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코미디와 같았습니다. 주인공 귀도가 영화의 분위기를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었는데요. 그것은 아들 죠수아가 수용소의 비극적이고 무시무시한 현실을 잘 이기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수용소 생활이 게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울지 말 것, 엄마 찾지 말 것, 간식 달라고 하지 말 것, 꼭꼭 숨어서 들키지 않을 것’ 등을 해내면 아들이 점수를 얻는다고 하여, 아들이 그 어려운 수용소 생활을 재미있는 게임을 하듯 이겨내게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감독하고 주연한 로베르토 베니니는 “웃음은 인간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사물의 다른 면을 생각해보도록 인도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사정 좋지 않고 죽을 맛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웃음으로 이겨내는 것이 인생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예기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하는 '즐거워한다’는 말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도가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인생이나 인생의 환경이나 그 어떤 다른 조건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 한 분이 우리의 기쁨의 유일하고도 가장 큰 이유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1장 6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시편 16편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40편 16절은 '주님을 찾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노래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8장 4절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60장 10절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하박국 3장18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비록 집안에 양식이 다 떨어져가고, 몸과 마음이 다 지치고, 당장 외적이 쳐들어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기독교 시인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아침마다 죽지 않고 깨어나게 해 주시는
아침마다 햇살이 되어 울지 않게 해 주시는
아침마다 돌멩이로 빵을 만들어 주시는
아침마다 배부르게 햇살과 빵을 먹고
죄인의 길을 걸어가게 해 주시는
이 기쁨
죄인이 되어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이 기쁨
아침이 와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밤이 와도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이 기쁨
죄인이 된 이 기쁨
당신이 나를 용서해 주시는
내가 나를 용서하게 해 주시는 이 기쁨
단 한 번밖에
죽지 않을 수 있는 이 기쁨
바로 이와 같은 기쁨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소유하고 갖추고 만족하여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큰 것이라고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에게 바로 이 기쁨이 넘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을 즐기는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은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 참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것임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하여 실제로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성경의 위인들이,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운 삶을 살았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서라도 하나님과 그의 역사를 생각하면 신이 나서 즐겁게 웃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운데서라도 오직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더 큰 기쁨을 찾아 방황하는 시대입니다. 이기적인 기쁨을 위하여, 더 자극적이고 은밀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 중의 기쁨, 쾌락 중의 쾌락은 바로 성도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자지러질듯이 열광하고 환호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성도의 모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도 이러한 기쁨을 소유하게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