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난 지혜 (약 3:13-16)
본문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몇 년 만에 찾아온 더위 가운데서도 예배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시는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불변하는 믿음으로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지혜는 그 출처가 위로부터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래의 땅의 사람들 사이에 평화입니다.
앞서 야고보는 세상적인 지혜, 정욕적인 지혜, 마귀적인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그 결과는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한 시기심과 다툼을 일으키고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을 공동체 속에 초래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17, 18절은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과 그 결과를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그 특성을 설명하고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라고 그 결과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부터 위로부터 난 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선 17절에 나타난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을 오늘 함께 하나씩 살펴 보려고 합니다.
1.첫 째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성결이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본래 종교의식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성결은 하나님께 나아갈 만큼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성결’이라고 기록된 띠를 이마에 두르고 있었습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께 성결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깨끗한 자라는 것을 이마에 붙이고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추한 모습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손으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너희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들은 신께 빌 때는 목욕재계를 하고 나아갔습니다. 몸만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을 먹고 구해야 들어주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 위해서 성결은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 위해서도 성결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실 때에도 우리가 성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가까이 오실 때에 몸을 깨끗이 하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그러나 예배하는 날 수가 거듭되고, 달수가 늘어나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 나온 지혜가 아닙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줍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 지혜를 사모하십시오.
여기 성결이라고 하는 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의 하나의 특성만은 아닙니다. 성결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근본적인 특성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특성 중에 하나가 아니라 모든 특성의 원천이 되는 것이 성결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위로부터 온 지혜를 추구하십시오. 그 지혜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모든 축복의 시작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다른 모든 특성은 이 성결에 기초한 특성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특성을 살펴봅시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2.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두 번째 특성은 화평함에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평함의 근본 의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새로 나온 “더 메시지”라는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된 지혜, 하나님의 지혜는 거룩한 삶으로부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데에 그 특성이 있습니다.”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평강을 빌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는 신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입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바른 관계를 맺는데서 나타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우리를 성결하게 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동시에 우리 서로 서로를 바른 관계를 갖도록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함부로 내 뱉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닙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항상 사람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줍니다. 하나님께 가까워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집니다. 참 지혜는 논란을 일으키는데 있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화해를 가져옵니다. 세상적인 지혜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14-16절). 그러나 위로부터 온 지혜는 공동체를 세웁니다(17-18절).
신자는 바른 관계에서 오는 화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화평이 증진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신자의 별명을 ‘화평케 하는 자’라고 산상보훈에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시기와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란이 있는 곳에 화평케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갖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합니다.
성경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동시에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은 사람들과 더불어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여러분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습니까? 거기 평화가 찾아 올 때에 여러분은 바른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또 다른 특성이
3.관용과 양순 입니다. 이들은 화평의 친구들이라고 소개 할 수 있겠습니다. 화평과 늘 같이 짝을 지어서 다니는 친구입니다. “첫째는 성결하고 다음에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관용과 양순은 서로 화평할 수 있는 방안을 또한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선 관용하다는 말은 “너그럽고 부드럽고 사려 깊고”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약학자는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번역하기가 어려운 단어가 이 단어라고 지적을 합니다.
관용하다는 말은 어떤 일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생각이 깊고 공평한 것을 의미 합니다.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지닌 덕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가혹히 대하지 않습니다. 법조문만 따지고 옳고 그름만 따지는 냉혹한 검사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디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이 되십시오. 누가 보아도 잘못한 사람이지만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백번 옳습니다마는 그럴 때에 상대방을 향해서 관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너그럽게 대하는 미덕을 관용이라고 합니다.
불의와 치욕과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 미움과 원한을 품지 않고 대합니다. 모든 상황에서도 겸손히 참고 하나님만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 할 뿐”이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지만 질시하고 미워할 때에 어쩔 수 없어서 기도 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이 관용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반대자들에게 보인 관용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의 처신입니다.
우리가 화평하기 위해서는 관용할 줄 알아야 하고 또 양순해야 합니다. 양순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이것은 맥없이 고분고분하고 부드럽고 유약한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공동 번역에는 고분고분하다고 번역합니다. 연약하다기 보다는 고집 세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올바른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태도입니다. 올바른 호소에는 움직일 줄 아는 것이 양순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어 성경은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에게 기꺼이 양보합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양순은 진리 앞에서는 양보하기를 원하는 자세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은 진리 앞에서 기꺼이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사람은 올바른 호소에는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호소를 해도, 자기 처음 생각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논리적으로 따지면서 기도드리면 물러섭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 안했습니까? “이 백성 싹 쓸어버리고 너를 통해서 새로운 민족을 일으키겠다”그러시니까 모세가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 큰 능력으로 데리고 나온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사람들이 하나님보고 뭐라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십시오.”그러면 하나님도 물러서는데 자기가 뭐라고 자기 본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는 그런 성도가 울산교회가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처음 내가 가졌던 생각보다도 그 생각이 옳으면 따라갈 줄 알아야 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은 기꺼이 들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기꺼이 설득을 당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관용과 양순의 미덕을 갖춘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평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4.“위로부터 난 지혜의 다른 특징은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헬라인들도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서 긍휼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당하게 고통당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긍휼이라고 한정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긍휼을 그렇게 한정하지 않습니다. 긍휼이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비록 자신의 잘못을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성경이 말하는 긍휼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가 체험했다고 하면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불쌍히 여겨야 옳습니다. 뭐 자업자득이지’‘고생해도 싸’그렇게 말하는 것은 긍휼을 따라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나와서 고생하지마는 부모는 그를 긍휼히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비참한 자리에 빠져서 살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어떤 이유로서든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그게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을 베풀고 사면 한날 심판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로부터 난 지혜는 고통 중에 있는 동료인생을 향해서 동정심을 느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행동이 뒤따릅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긍휼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선한 행위가 뒤따릅니다.
‘참 불쌍하구나’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성령께서 움직이실 때에는 그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펼쳐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긍휼은 실제적인 선으로 연결될 때 가치가 있습니다.
참다운 긍휼은 선한 열매가 가득할 때에 거기 의미가 있습니다. 신자가 갖는 긍휼은 단순한 감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보이는 긍휼에는 항상 착한 행동이 수반됩니다. 기독교인의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타까운 상황을 바라볼 때에 구체적인 도움의 손을 펴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선 자리는 긍휼에서 나오는 친절한 행위가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누구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에게 베풀어야 되는데 우리는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그 사람 정말 동정을 베풀기에 합당하냐?’ ‘내가 베푸는 도움 받기에 타당하냐?’ 심사부터 먼저 하려고 듭니다.
긍휼은 부당하게 착취를 당하는 사람에게 돕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처지에 있던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차별 없이 돕도록 가르치십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적극적인 동정과 반응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긍휼히 여기십시오. 이런 긍휼을 베푸는 자는 심판 날 승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아, 그 참 안됐다’ 하고 맙니다. 말만 하는 것은 심판 날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안 도와준 문책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어떤 심판이라도 이기고 자랑합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긍휼을 베푼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이기적입니다. 조건 없이 남의 불쌍한 처지를 보고 도움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도움을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긍휼의 대상이었던 것을 스스로 깨달을 때에 자기먼저 챙기지 않고 이웃을 먼저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긍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에 소중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맛본 사람만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 불쌍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사모하십시오. 풍성한 자비와 선한 열매 가득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본문이 말하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마지막 특성들을 살펴봅시다.
5. 위로부터 난 지혜는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 편벽함이 없다는 말은 일사 분란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망설이거나 시시각각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 일에 손대볼까 저 일에 손대 볼까?” 하고 요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사 분란하다는 것은 확정된 마음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읊었던 시에 표현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비파와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확정된 사람입니다. 온 땅이 주의 이름을 찬송하기까지는 쉬지 아니하겠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보고 편벽함이 없다고 합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고 머물러야 할 자리를 아는 마음입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흔들리지를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머뭇거리는 마음 자세가 아닙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이렇게 흔들렸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엘리야는 자기 시대의 흔들리는 백성을 향해서 호소했습니다. 이 호소 앞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엘리야가 엄청난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면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 것 같고 이세벨과 그의 일당들이 왕권을 쥐고 나라를 흔드는 것을 보면 그 쪽 신이 더 센 것 같고, 어떤 때 보면 아합 왕 쪽을 따르고 싶고 어떤 때는 엘리야를 따르고 싶은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젊을 때나 나이 많았을 때나 분명했습니다. 젊었을 때 그는 그 지파를 대표한 선택받은 청년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열두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갔다 와서 열 사람이 부정적인 보고를 할 때에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호소했던 사람입니다.
뒷날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마침내 들어가서 거기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선명하게 신앙의 입장을 정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계절 따라 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추울 때는 춥다고, 더울 때는 덥다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한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누가복음 9장 51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지금 올라가시는데 그 길에 마지막으로 기다리는 것은 십자가이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준비한 길임을 알 때 굳게 결심을 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일사 분란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라고 하면은 어떤 희생과 각오가 필요하더라도 그 일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조금도 동요가 없는 마음 자세입니다.
대세에 따라서 흔들리고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한다면 그 일을 향해서 분명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오로지 하여 주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을 여기 편벽이 없다고 합니다.
위로부터 난 마지막 지혜의 마지막 특성은 위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만날 때 거기에 조금도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선으로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진 자는 인간관계에 가면을 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선으로 오염되지 않은 인간관계를 유지하십시오.
순수함으로 사람을 사귑니다. 두 얼굴을 가지고 살지 마십시오. 자기 모습 그대로를 언제나 유지하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서 사람들을 대할 때도 지금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울 때나 추울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하루는 뜨거워지고 하루는 차가워지는 그런 신앙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말씀 맺습니다. 이 시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을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이러한 특성들이 얼마나 자리 잡고 있습니까? 첫째는 성결하고 다음은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편백과 거짓이 없나니’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보아야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 주십시오’라고 사모합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얼마나 위로부터 주신 지혜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게 될 때 “주님 저에게도 그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그 삶에 부족함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약속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위로부터 난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누가 주십니까?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는데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위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구하십시오. 덥다고 성경책을 한켠에 밀어놓고 살지 마십시오. 예배하는 일을 쉬엄쉬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심으로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추우나 더우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사모하는 울산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