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열왕기상:17:8~16
제목: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2000. 8. 20 주일낮 설교설교:최일환 목사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17:11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7: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설교:
남북의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지난 한 주간 내내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왜 남과 북이 그토록 원하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지? 누가 막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는 한주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우리 나라는 비슷한 점이 매우 많습니다. 이스라엘도 남북이 분단되어 오래 동안 아픔을 겪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나라인 이스라엘이 북쪽은 이스라엘로, 남쪽은 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우상숭배함으로 그 아들대인 르호보함왕 때 하나님이 북쪽을 유다 자손에게서 빼앗아 나누신 것입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같이 초대 왕 여로보암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여 하나님의 노를 샀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나라에 영적 지도자 엘리야를 세워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가르치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엘리야와 당시의 왕 아합이 정면 충돌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엘리야를 잡아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피신시키는데 처음에는 그릿이라는 시냇가에 피신하게 하면서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더니 그 시냇가가 마르자 '시돈'이라 이름하는 땅에 사르밧 동네에 가게 하셔서 그곳 과부로 하여금 먹을 것을 공궤 받게 했습니다.
당시 그 사르밧이란 성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형편이 넉넉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과부"라는 호칭이 그를 입증합니다. 요즘도 과부라는 소리를 듣기를 싫어하는 시대라 참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니 당시에 가장 힘없는 존재가 '과부와 고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서 과부와 고아를 도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남성위주의 사회였습니다. 그러기에 남편 없는 과부, 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에 보면 그의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였습니다. 아마도 죽은 남편이 남겨놓은 재산이 넉넉치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도착한 그 시점에 그녀는 성밖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집에는 가루 한 움큼 병에 기름 조금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요즘말로 말하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힘없는 과부를 통해 공궤 할 것을 약속하고 계실까요? 당시에 재력가도 있었을 터이고 하나님을 공궤하는 정치가나 실력자들이 많았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힘없는 여인을 들어 쓰실까요?
여기에 소망의 메시지가 보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르밧의 과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를 살리시려고 엘리야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여인이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당장 먹을 양식이 떨어져가고 흉년은 더 심해 가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듣고 엘리야를 그에게 보내 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하나님은 이처럼 힘없고 약한 자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서도 큰일을 하시는 분이심을 알수 있습니다.
3)더 나아가 우리도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이루시기 위해 몇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1. 하나님의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9절)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의 과부에게 가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미리 과부에게 메시지를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형편인데 거기다가 한입을 덧붙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과부에게 붙이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거운 짐이 되는줄 뻔히 알면서도 붙여 주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깊은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그 과부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분명 그 과부는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은 고사하고 한입이 더 생겼으니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닙니까 ?
그러나 영적 감각을 갖은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이 이런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붙여 주신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해결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지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종이 다가서면 그것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해결책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여러분의 문제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문제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못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원하는 바를 도우시고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2. 부당한 요구를 하게 하십니다.(10~11절)
"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17:11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야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당시 비가오지 않아 물을 구하기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만나자마자 물을 달라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떡 좀 달랍니다.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저도 가끔 교회에 손을 내미는 손님들이 오십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한 마음으로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마치 당연하듯이 돈을 달라고 청구합니다. 그래서 줄 수 있어도 안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엘리야가 후자에 속한단 말입니다. 마치 뭔가를 맡겨놓은 사람처럼 당연하듯이 달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그 여자가 하나님이 언급하신 그 여자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그렇게 요구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그 과부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 성에 과부가 그 한사람뿐이었겠습니까?
그러니 공궤할 여인 그 여인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여인의 믿음의 분량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릴만한 믿음의 그릇이 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거지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종도 거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걸하는 것으로 여기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먹이실 수 있습니다. 본문 앞 구절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까마귀를 통해서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굳이 그 사르밧 과부를 통해 먹이시려고 하신 것은 그 사건을 통해 그 여인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무리한 요구가 있다면 그 뒤에는 믿음테스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까 ?
혹 내 형편에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십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목회자의 권면과 설교를 통해서, 때로는 주변 환경을 통해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께 우리 성도들을 향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는데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중에 누군가에게 자녀를 내 놓으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묵은 십일조, 떼먹은 십일조를 내놓으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선교지에 교회 하나늘 세우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교회의 부채를 해결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감추어진 죄악을 벗으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어려운 주의 종을 살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형편을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형편을 여러분 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런 요구를 하실까요? 게중에는 여러분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일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실 복을 감당 할 만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참으로 부당한 요구 앞에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나 그래도 먼저 가져오라는 말에 순종하여 놀라운 복을 누립니다. 그가 순종 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때로 여러분을 찾아와 말도 안되는 부당한 것을 요구하실 때 그때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3. 말도 안되는 약속을 믿으라고 하십니다.(14절)
14절을 읽읍시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여인은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결과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약속은 우리가 보면 말도 안 되는 약속입니다.
통의 가루, 병의 기름, 어찌 그것이 없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누가 갖다 붓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말을 믿으란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다면 말도 안 되는 이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사건들은 인간의 과학이나 경험, 지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출애굽시 홍해 갈라진 사건, 요단강 건너간 사건, 여리고 성 무너진 사건,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한 사건 등등...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능히 하실 수 있는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의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게 한 서건, 풍랑을 명하여 잔잔케 한 사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 어디 이뿐입니까?
현대 과학으로도 입증 할 수 없는 기적들을 하나님은 능히 동원하시어 일을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약속을 단순히 현실에 입각하여 판단만 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수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 머리로 이해되는 것은 믿고 안 되는 것은 안 믿는다면 어찌 그것을 믿음이라 할 것입니까?
믿음의 최고의 방해물이 내 머리, 내지식, 내 경험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섣불리 똑똑하면 그것이 교만의 도구가 됩니다. 태권도 초단과 2단이 까붑니다. 3단 4단 5단 되면 겸손해지고 낮아집니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약속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으시고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을 보세요.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이말은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라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1. 죽을 목숨이 살았습니다.
2. 3년 동안의 삶을 풍성함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번의 순종으로 3년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3. 자녀의 생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17절 이하에 보면 그 여인의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는데 엘리야가 살리게 됩니다. 3년 동안 공궤를 하니 그런 놀라운 일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의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조건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순종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눅5:5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였던 것과 같은 구절입니다. 이 말씀도 무조건 믿고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순종이 능력이요, 순종이 해결책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오늘 우리의 삶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