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본문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본 문 :
행2:22-32



우리 교회 홈페이지 인터넷 유머란에 들어가면 재미있는 유머들을 성도님들께서 올려 놓습니다. 참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짜증나는 세상에서 우리가 웃으며 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 하나를 둔 어느 부부 집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분다 부모님이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며 집사 직분을 받았지만 열정적인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식사할 때도 가족끼리 식사 기도하는 법도 없고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기도하고 식사했는지 그저 했는지 자신들도 잘 모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가정 예배는 한 번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외아들 하나 잘 기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외아들 하나 잘 기르기 위해 공부에 정열을 쏟으면 아이를 볼 때마다 공부 이야기만 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교회에 갔다오면 빨리 오지 않았다고 야단을 치고, 교회에 갔다고 오며 물어 보는 것은 늘 "오늘 재미있었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주일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아들에게 오늘 뭘 배웠냐고 물어 보았답니다. 대단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는가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 때 어머니의 믿음을 잘 알고 있는 아이는 신이 나서 말했답니다. "오늘은 모세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해서,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죠.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적군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그러자 어머니가 눈이 둥글 해져서 "아가,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라고 물었답니다.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 믿을걸요?"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믿는 것같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사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사망권세를 깨고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첫 번째 설교를 하면서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설교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행 2:36)"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첫 번째 설교를 하는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예수님을 따른 것 때문에 어려움이 오자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사람입니다. 고기 잡으러 고향으로 가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32절을 같이 읽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2)"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 신앙생활하면서도 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습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예배에 참석합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 아이들 학교 가는 것은 지각하지 않도록 열심히 깨우면서 주일에는 왜 예배를 빨리 시작하느냐고 불평합니까? 왜 신앙 생활하면서도 설익은 음식처럼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들여 놓고 늘 번민과 고민 가운데 살아갑니까? 이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고 언젠가는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산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비평의 원리, 인과의 원리, 유추의 원리에 익숙한 인간의 사고틀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말씀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화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말하면 잘 믿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어는 전문가가 나와 채소가 좋다하면 무조건 채소를 먹습니다. 건강에 걷기 운동이 좋다고하면 만보기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립니다. 건강에 비타민이 좋다고 하면 약국에 비타민 사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잘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믿기를 망설입니다. 아내의 말은 잘 믿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어느날 공처가를 애처가로 훈련시키는 기독교 가정 세미나가 있었답니다. 강사는 먼저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는 사람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오른 손을 들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손을 들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사람이 오른 쪽 손을 번쩍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손을 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강사가 이상하여서 다가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그 때 마누라 무서워서 교회를 따라다니는 그분이 말했습니다. "오늘 제가 아침에 나오는데 마누라가 절대로 남자가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지시했거든요" "남자들이란 모이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니까? 피하라고 엄히 말했거든요" 그런데 한 사람이 오른 손을 올렸다 내렸다하며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사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내려다 올렸다 하고 있습니까? "저도 잘 몰라유, 아침마다 집을 나올 때 마누라한데 오늘 할 일을 다 지시를 받고 나오는데 오늘 아침은 제가 늦잠을 잔 바람에 지각을 할까보아 서둘러 나온 바람에 마누라한테 지시를 못받았구먼유. 그래서 이렇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1)기절설을 말합니다.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2)무덤을 잘 못 찾았다는 설을 말합니다.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3)도난설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4)환상설을 말합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 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5)신비설을 말합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에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착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로마 군병들이 특별히 지켰습니다.(마 27:62-66) 그리스도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채찍에 맞았으며 허리에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았습니다. 그리고 세마포에 싸여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동굴이 서늘하여 무덤에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 날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일어났다고 하여도 어떻게 동굴의 문을 밀고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여인들이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개인 묘지입니다. 제자들이 도둑질할 수 있겠습니까? 다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한 사람이 본 것이 아닙니다. 500여명 이상이 보았고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무려 11번이나 실제적으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13-35) 도마에게는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습니다.(요20:28) 떡과 고기를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4:39-49)
예수님을 신화화하기 위한 기록이겠습니까? 부활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그것이 아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왜곡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였다고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사람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제자들이 아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빼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대로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신화화시키기 위한 책이라면 예수님의 족보에 창기를 집어넣겠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 먹는 이야기를 기록하겠습니까?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고 기록하였기에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큰 증거는 제자들의 생활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있겠습니다. 신약 성경에 부활에 대한 말이 40회 나옵니다. 그중 사도행전에 10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삶들은 부활을 증거하였고(행4:2), 베드로는 부활을 말하지 말라는 사두개인들에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 중에 어느 것을 듣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행2:14-36) 사도행전은 '부활의 복음서'라고 불이울만큼 부활을 확증하고 있습니다.(2:23, 32,3:15, 26, 4:10, 33, 5:30, 10:40, 13:30-34, 17:31) 그들은 부활을 증거하다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도 하였고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고, 사자에게 물리고, 화형을 당하고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며 순교당하였습니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까?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누구 보다도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막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변하였습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였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만약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이렇게 오랬동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살겠습니까? 지금도 지구촌에는 20억이 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부활절은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깨고 승리하신 날입니다. 인류에게 생명의 빛을 던져 준 날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회의가 변하여 확신이 되는 날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변하여 평안이 되는 날입니다. 무능력한 삶이 변하여 능력있는 삶으로 향하는 날입니다. 증오가 변하여 용서가 되는 날입니다. 죽음이 변하여 삶의 소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믿으면 우리에게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산다는 사실만큼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개인에게 혁명적 사건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도 이제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1.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부활을 증언한 후(22-24) 바로 이어 다윗을 예로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미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30절 3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는 이 땅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소망입니다. 26절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 다윗의 신앙 고백을 보십시오. 마음이 기뻐합니다. 입술이 즐거워합니다. 육체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있습니다. 영혼은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썩음을 당치 않습니다. 28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앞에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십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진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하여도 기쁨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기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살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고 말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도 기뻐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부활절 아직도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 앞으로 부활하여 살 그 나라를 보고 기쁨이 회복되기기 바랍니다. 아직도 기쁨이 없습니까? 구기자 전설이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한국 남자들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다 무기력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약 한 첩을 다들 잘 못 먹어서 라고 합니다. 그 약은 구기자라고 합니다. 구기자 한 잔 씩을 잡수어서 다 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아내가 너무너무 근심이 되어 남편에게 뭘 하나 선물을 했답니다. 그러자 그 날부터 남편은 생기가 돌고 어깨를 피고 활기찬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궁금해서 무엇을 먹였겠습니까? 물어 보니 [피자] 랍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얼굴이 활짝 피고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근심 걱정 부활하신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근심한다고 머리 한치 자라게 못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내 마음 속에 있네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맘에 ...."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면 그 누구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이제 그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일평생 살았습니다. 24절 보십시오. 사망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37절 보십시오. 마음이 찔렸습니다. 41절 보십시오. 3000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42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부활의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으로 삶의 원동력을 삼겠습니까? 무엇에 끌려 살겠습니까?
지나온 과거에 억매여 인생을 허비하겠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지만 과거에 갇힐 필요가 없습니다. 죄의식에 끌려 다니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원한과 분노의 쓴뿌리에 시달리면 살겠습니까? 아픔 상처로 원한을 품고 복수의 날만 기다리며 살겠습니까? 두려움에 끌려 다니며 살겠습니까? 물질의 욕심에 끌려다니며 인생을 허비하겠습니까?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에 끌려 다니며 인간의 노예로 살겠습니까? 잠시 잠깐 후면 우리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인생이란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자식에게 평생 붙들려 살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을 보면 끝없이 자식에게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목회자들도 끝없이 자식의 종이 되는 사람들을 봅니다. 큰 교회를 이루어 놓고 말년에 자식의 종이 되어 교회 세습한다고 얼마나 주님께 욕을 돌리고 전도문을 막아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큰 교회 장로님께서 천국에 갔답니다. 천국식당에 가서 앉아있는데, 30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와서 뭘 드시겠냐고 물어보지를 않더랍니다. 참다 못한 장로님은 지나가 버리는 한 종업원을 억지로 붙잡고 따졌답니다. "왜 물도 갖다주지도 않고 뭘 드시겠냐고도 물어보지도 않는거요? 천국에서 서비스가 뭐 이래요?" 종업원이 "장로님, 여기는 셀프서비스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그러면 왜 저기 있는 사람들은 셀프서비스가 아니고, 종업원들이 서비스를 직접 하는거요?" "아 저분들 말입니까? 저 분들은 주방에서 열심히 일한 집사님들과 화장실 청소, 차량안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온갖 더러운 것을 감당했던 성도님들입니다. 저분들께서는 지상에서 서비스를 항상 남에게 베풀고 남을 잘 섬겼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종업원의 이 말에 장로님은 다시 물었답니다. "그렇다면 저보다 조금 빨리 온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어디에 있소? 보이지를 않는데..." 종업원이 말했답니다. "아 그 목사님요? 아들에게 교회 세습해 주었는데 '그 아들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때를 써 지금 그 아들 보러 갔습니다. "
예수님 말씀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0)"
우리 인류는 한 가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 자매된 사람들입니다. 너무 내 자식 내자식 하면서 죄지으며 근심 걱정으로 인생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점을 맞추세요.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인생으로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슴을 조금 넓게 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우는 문창모 장로님 1주기 추모 예배가 지난 3월 13일 원주에서 있어합니다. 사회장으로 치루어진 그이 장례식에는 추모객만 2000여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북한에서 태어난 분이십니다. 죽음의 위기를 많이 겪으신 분입니다. 일제시대 때, 북한 공산당에게 죽음의 위기를 겪었고 남한에 넘어와 많은 고생을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의사로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장, 인천도립병원장, 국립마산결핵요양소장, 원주연합기독병원장 직을 맡아 봉사했습니다. 96세로 하나님 나라에 부름받기 까지 무려 의사로서 70년 동안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평생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었던 일제시대에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최근 의약분업으로 의사들이 휴폐업을 할 때도 묵묵히 소망을 가지고 환자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오전 6시 부터 밤늦게 까지 병원에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의사면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절대로 게으름을 피울 수 없지요. 잠못자고 울면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차비도 줘가며 참 열심히 환자를 돌봤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확고하게 있는 사람입니다. 소망의 사람입니다. 그는 간증 집회에 초청되어 갈 때 밤11시부터 새벽3시까지 집회를 인도하고 새벽에 원주로 와서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본경찰에게 공산당에게 죽을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 때 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해 주어 "하나님께서 의사로 사용하시려고 살려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자를 돌 볼 때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며 소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10여 년 전에는 경찰관이 손을 묶은 채로 환자 한 명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장로는 치료를 마친 후 그를 꼭 붙잡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예수 믿고 회개해야 한다며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경찰관이 찾아와 그가 밤새 소리 지르며 울었다며 무슨 약을 먹였냐고 물었답니다. 문 장로님은 신약과 구약을 줬다며 웃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그 죄수환자가 사형집행장으로 가면서 “나는 지금 천당가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분은 자서전을 펴내며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쉬파리도 천리마 꼬리에 붙어있으면 천리를 단숨에 날아갈 수 있듯이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지금 이곳까지 올 수 있게 해주셨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슬픈 일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절망에서 일어나 소망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부활에 대한 첫 번 설교를 한 베드로가 기록한 베드로 전서 1장 3절 이하의 성경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4)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 1:5)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 1:6)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살며 부활의 증인으로 한 평생 헌신하다가 주님 만났을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