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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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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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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2:11-12

지난 금요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는 길에 어느 집사님과 차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집사님께서 얼마전 부부가 함께 기도하며 앞으로 집을 소유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사업을 하며 남부럽지 않게 누릴 만큼 누려 보았는데 참 기쁨은 없었답니다. 그런데 집을 소유하지 않고 그 돈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마음이 기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처럼 부부가 좋은 때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가구점의 좋은 가구를 보면 언제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가구를 보아도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평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단한 결심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잠깐 나그네로 이 땅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집사님에게 제 이야기를 조금 해 드렸습니다. 저도 나이 곧 50이 되어가지만 전재산 천 오백 만원 월세를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유산 남겨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신앙을 남겨주고 공부는 시켜 주려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매일 일용할 양식이 있고 근심 걱정하지 않고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해드렸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빠는 너희들이 공부한다면 최대한 가르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유산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인생은 나그네라는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나그네라고 인정하고 사십니까?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11절에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하고 있으며(창 23:4) 야곱도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창 47:9) 다윗도 인생은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대상29:15; 시39:12)
그저 잠깐 나그네로 살 뿐입니다. 잠깐 있는 것 누리다가 주님 오라 하시면 어느날 문득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은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닙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 잠깐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영원히 거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간을 기준으로 사람을 단순하게 나누면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과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떤 부류의 인생입니까?
사람의 생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저와 금요일 새벽 이야기를 나눈 집사님께서는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그렇게 기쁘고 평안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더 큰 집 더좋은 가구 더 좋은 옷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집중했지만 이제는 시각이 달라진 것입니다.이 땅은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 적극적으로 믿으며 사니까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을 보십시오. 우리 인생을 안개라고 했습니다. 햇빛이 비치면 살아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시편 102편 3절에서는 인생을 연기라고 했습니다. 불이 있을 때는 피어나지만 불이 꺼지면 살아집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서는 인생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영광의 자리, 건강한 몸 계속 누리는 것 아닙니다. 잠깐이면 사라집니다. 대통령도 때가 되면 그 자리 내려 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모든 것 다 놓아두고 가야합니다. 지난주 대구 참사를 보았습니다. 집을 나갈 때 그렇게 떠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것 다 놓아 두고 떠나는 것입니다. 나그네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홀연히 하늘 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 21:4) 천국, 우리가 그리던 예수님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뵙게 되는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하여 잘했다 칭찬을 받을 그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있기에 오늘도 소망이 있는 것이고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 천사들을 세계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찬송가 168장 1절)]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
이 세상은 잠깐 숙박하는 곳입니다.(대상29:15;히11:13-14)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눈을 뜰 수 있겠습니까? 순식간에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은 다가 옵니다. 초교파 외국 선교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24시간에 32만명이 출생하고 16만명이 사망을 한다 합니다. 매시간 7000명 매분 120명, 매초 2명씩 사망을 합니다. 누가 그 대상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마다 들어가는 영원한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여야 합니다.(11. 자신, 소극적)
세상에는 이 육체의 정욕과 관계하여 세가지의 삶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육체의 정욕을 죽이며 사는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셋째는 육체의 정욕을 제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나그네로 살려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어하는 것은 멀리 떠라나 멀리하라,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욕구를 충족함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욕구를 완전히 죽임으로 금욕주의자가 되면 행복할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가지 모두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욕구를 절제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가지 양극단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이라는 말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욕구들을 말합니다.(갈5:16-21) 이것들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게 하고 하나님을 거슬려 우리의 거룩성을 파괴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부패해 버리도록 작용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입니다. 우리의 영적 삶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음란한 생각과 생활로 나타납니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한 욕심들로 나타납니다.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성품과 생활, 그것은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훼방하거나 당을 짓거나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상 숭배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적인 생활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육체의 정욕과의 싸움에서 실패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100m를 달리는 선수가 출발점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출발 신호와 함께 뛰기 시작했는데 한두 발자국 내딛다가 그만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육체의 정욕을 제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어할 수는 있습니다.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 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욕망을 그대로 놓아 두면 세상은 다시 지옥으로 변해 버립니다. 식욕이, 성욕이, 소유욕이, 명예욕이, 권력욕이 적당히 절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향락과 퇴폐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만큼이나 다재다능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열두 살 때 인쇄소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틈틈이 산술과 기하학, 글 쓰기 등을 독학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인쇄소의 견습공이었던 시절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는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주인이 일러준 지름길을 따라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막 담을 지나려는데 이웃집 주인이 머리를 숙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길 중간에 키보다 낮은 들보가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서 아무 생각 없이 걷던 프랭클린은 들보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주인은 급히 달려와서 상처 난 프랭클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친절한 어조로 말했답니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머리를 자주 숙이게. 머리를 자주 숙일수록 부딪히는 일이 적어질 걸세." 이런 일이 있은 후 프랭클린은 평생 겸손을 제1의 덕목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20세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 13훈이라는 것을 만들어 실천하였습니다. "겸손, 침묵, 규율, 절약, 근면, 성실, 정의, 중용, 청결, 보건, 평정, 순결, 결단"이었습니다. 스물 세 살에「펜실베니아 가제트」라는 신문을 창간하였고 1950년 필라델피아 주 의원에 당선되었고, 피뢰침을 발명하고, 안경을 만들고, 1775년, 독립선언 기초 위원이 되어 미국 독립에 헌신하였습니다. 병원을 설립하고, 소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1788년 1월, 82세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미국 정부와 국민은 물론 프랑스 국회에서도 3일 동안 검은 옷을 입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 주 정부 사상 최대의 조문객이 모인 가운데 크리스트교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자신의 생전에 출판과 발명으로 벌어들인 돈을 유산으로 기탁했는데, 신탁된 유산은 투자되어 그 이자가 공공사업에 쓰여졌고, 오늘날까지도 이 신탁 유산은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나그네로서 절제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제어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은
① 물질을 사용하는데도 절제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29 절부터 보면 말세 성도들에게 물질 생활에 절제할 것을 말씀합니다.
②생각을 절제해야 합니다. 천사같이 되느냐 악마같이 되느냐 하는 것 은 그 사람의 생각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도 생각을 통해 계시하시고, 마귀도 생각을 퉁해 들어와 범죄케 합니다. 요한복음 l3 장 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 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했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룻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③ 말에도 절제해야 합니다. 밑천 안든다고 함부로 말을 막하면 그는 항상 후회하게 되고, 받은 은혜도 다 쏟아 버리게 됩니다. 야고보서 I장 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④ 보는 데도 절제해야 됩니다. 아담과 이브가 보고 범죄하였고 다윗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다가 범죄하였습니다.
⑤ 먹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⑥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잠언 I4장 30절 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단순하게 살아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와 로타르 J. 자이베르트가 지은 책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단순하게 사는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단계를 말합니다. "물건들을 단순화시켜라. 재정 상태, 시간, 건강, 대인관계, 배우자와의 관계, 자신을 단순화시켜라"라는 것입니다. 일대삼 폐기 원칙을 말합니다. 새로운 것 하나 드러오면 낡은 정보 세 개는 없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의 정욕을 잘 제어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에 대하여, 불신자들에게 대하여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합니다.(타인, 적극적)
나그네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만도 힘든데 선한 일까지도 하라하십니까 ? 왜 나만 손해보고 왜 나만 양보해야 합니까? 왜 나만 고난받아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혼자만 선하게 산다고 뭐가 변합니까? 거대한 구조적인 악이 도사리고 있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선하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너희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가운데서, 유대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가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2장 12절) 어디에서 입니까? 이방인 중에서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 도저히 선한 행실을 가질 수가 없는 육체의 정욕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구조 속에서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핑계로, 사회 구조를 핑계로, 자신의 무능력을 또는 우리의 분위기를 핑계로 선을 행하는데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1)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에게 선한 행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그들은 성도를 비방하였습니다. (1)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고 했습니다. 성찬식에 대한 오해했던 것입니다. (2)부도덕한 무리라고 했습니다.-아가페 사랑, 성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했습니다. (3)가족 파괴주의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형제를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4)노예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노예가 그리스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5)반정부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고 했습니다. 황제 숭배 반대, 로마시를 불사른 사람들이라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에게 오해를 받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가족식구에게 오해를 받습니다. 직장에서 꽁생원이라고 합니다. 18세기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구를 떠나 살라고 합니다. 너만 예수 믿느냐고 합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전도 하면 비방합니다. 차라리 나처럼 교회에 나가지 말고 속편히 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우리의 큰 선을 보지 않고 우리의 작은 악을 보려고 애를 씁니다. 얼마나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잘 아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누가 사기치고, 누가 이혼했고, 누가 사업에 부도났고, 누가 행실이 더럽고, 누가 첩이 있고, 어느 목사님이, 어느 교회가 어떻고"하면서 차라리 예수 안 믿는 편이 낫다고 역으로 전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벧전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불신자들에게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말이 비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이 우선 보여집니다. 우리의 행실이 우리 멀리 있는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의 자녀들에게 먼저 보여 집니다. 비방의 구실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2) 비방하는 자를 주님께 돌아오게 하여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마 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방하는 자들이 결국 우리의 선함을 보고 회개하고 돌아와 복음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삶을 살 때에 불신자들이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이 능력 있는 분이구나.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참 힘있는 말씀이구나 하고 깨닫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이방인 중에서 선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3절).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 오늘 교회가 힘을 잃어 가는 것, 교단이 힘을 잃어 가는 것,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 이 세대 가운데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소금이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한 일을 바로 행하지 못할 때에 나 자신만 밟힐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백성들까지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예수 믿는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끝내지 않은 마침표] 박영만씨가 지은 책입니다. 유·무명 인사 102인이 그들의 묘비에 남긴 말을 엮은 것입니다. 그 책에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마스 모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다재 다능한 인물입니다. 정치가, 인문학자,판사, 외교관, 교수였습니다. 모어는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직을 맡아 봉사한 사람입니다. 그는 왕 바로 아래의 고위직인 대법관에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 왕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을 청구했습니다. 그는 대법관으로 이혼 청구를 거부했습니다. 성직자들까지 가세해서 왕을 지지합니다. 모어는 왕의 잘못을 지적하며 대법관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타협을 원하지 않았고 인기를 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집에는 돈이 없습니다. 주교가 국가에 봉사한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35만 파운드라는 많은 돈을 주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새 왕비 즉위식에 참여하면 관직을 복귀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신앙 양심을 위해 제 2인자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왕의 가슴에는 분노가 들끓었습니다. 그는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진술합니다.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고 해로운 말을 한 적도 없다. 오히려 나는 모든 사람들의 행운을 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때문에 살 수 없다면 나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런던 탑에 갇혀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왕은 결국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구실을 붙여 단두대에 처형합니다. 목이 잘리는 날, 단두대로 올라가는 모어는 여전히 평온했고 부축이는 간수에게 "오를 때는 부축을 받지만 내려갈 때는 나 혼자 내려가리다." 그는 왕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장례식과 무덤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1935년에 이르러서야 로마 교황은 그에게 성자의 칭호를 내렸고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을 새겼답니다.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토마스 모어는 그가 그린 유토피아는 재산의 공유와 교육의 평등, 종교의 관용 그리고 고결한 양심이 살아 있는 나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앙 양심 앞에 초연히 육체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삶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의 삶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변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때문에 예수 믿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자녀는 없습니까? 우리가 선한 행실을 가지면 우리가 권위가 있게 되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당시 핍박을 받던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국 핍박하던 로마를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핍박 가운데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무슨 힘입니까? 순교의 피를 흘려 가면서까지도 묵묵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하게 살았던 성도들의 그 선한 삶이 결국 로마의 강력한 힘을 정복했던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참으로 선한 행실을 할 때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어느 때 까지 입니까? 하며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능력이 없어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9:8)"
"성경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고 말씀합니다."
언제까지 선을 행하여야 합니까? 하며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 언제입니까? 권고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현대인의 번역) 성도들을 비방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 의해 변화를 받아 회개하는 날입니다.
나그네로 절제하며 삽시다. 나그네로 적극적으로 악에 대항하여 선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합시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에 침몰해서는 아니 됩니다. 세상을 건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벧전2:11-12/ 김필곤 목사/200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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