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길을 바꾸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잘못된 길을 바꾸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본문

잘못된 길을 바꾸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본 문 :
눅7:11-17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유대인들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처형될 때였답니다. 독일군들이 사람의 이름은 없애고 번호만 남겼습니다.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동물처럼 끌려 물로 샤워시킨다고 하고 가스에 넣어 죽였습니다. 당시 포로들은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불려 가면 끝입니다. 이 때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자식을 죽이지 않기 위해 얼른 옷을 벗어서 딸의 옷과 아들의 옷과 바꿔 입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딸의 번호를 달고 걸어 나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번호를 달고 걸어갑니다. '나는 이렇게 가지만 너만은 좋은 세월을 만나다오. 너는 행여 좋은 때가 있을지 어떻게 아냐. 좋은 때를 좋은 시대를 만나라. 새로운 시대를 만나라.' 이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옛말에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갔으면.'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나인이라는 동네에 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인이라는 말은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즐거운 동네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기막힌 일은 아들 하나가 있는데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마직막 희망이고 삶의 의미 전부였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미래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즐거운 동네는 통곡의 동네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려 동네 사람들은 그 아들의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죽음의 행렬 오열의 행렬, 마지막 행렬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끝이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절망의 행렬이 소망의 행렬로, 동정의 행렬이 영광의 행렬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절망의 행렬이 소망의 행렬로, 동정받는 행렬이 영광을 드러내는 행렬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잘못된 길을 바꾸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우리 인생은 예수님 만나면 이렇게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1.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바뀌는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찾아오시는 예수님 만나면 그 때가 죽음의 길에서 행명의 길로 바뀌는 때입니다. 인생의 대 역전 드라마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바뀌시기 바랍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만나면 됩니다. (11)-예수님 만나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여인의 아들은 이것으로 장사 지내면 영원히 이 땅에서는 만나 볼 수 없는 송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 집안은 끝이 났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인 역시 산다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행렬입니다. 장례 행렬입니다. 곡하는 장례 행렬입니다. 장례를 치르면 이제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그 때 생명의 행렬을 만난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서 인생은 역전된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어 집니다. 죽음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습니까? 생명이 살아나는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늦다고 생각하는 시간일 지라도 예수님만 만나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 번도 눈을 떠 보지 못한 자도 예수님 만나면 눈을 뜨게 되고 나병으로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되어 그 병으로 인생을 끝마쳐야 할 사람도 예수님 만나면 새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도 예수님 만나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마지막 죽음 앞에 서있는 강도도 예수님 만나면 낙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인하여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자, 죄로 인하여 절망 가운데 처한 자, 죽음의 고통으로 불안하며 절망하는 자들, 인생 실패로 삶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그리워하는 자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은 새 길이 열리게 됩니다. 배우자를 통해 자식을 통해 열리는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잠깐 치유되는 길이 아닙니다. 영생의 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통해 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다 죽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 만나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마른 나무에도 새순이 솟아나고 고목 나무에도 꽃이 핍니다.
일본 사람 중에 도모다까 시모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형수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사형수를 일본 북해도 탄광에 보내어 일하게 하였습니다. 탄광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절망적으로 보낸 때였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데 하루는 자신에게 면회를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된 어머니였습니다. 시모지는 어머니를 보고 짜증을 내었습니다. 아들이 구박을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래 내가 돌아갈께, 그러나 이 보따리 하나는 받아라"하고 보따리를 놓고 갔습니다. 그 보따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열어 보니 성경이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동안에 예수쟁이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재수 없다는 듯이 방구석에 성경을 내 던져 버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몇 일을 지나다 보니 거기서 함께 일면서 한 방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서 담배를 말아 피웁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모지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니가 3,000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전해 주고 간 성경책인데 이 놈들이 담배를 말아 피워' 야단을 치고는 재수 없다고 짚어 던졌던 성경책을 빼앗았습니다. 어머니는 뭐가 좋길래 성경에 빠져 버렸는가 싶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자석에 붙은 듯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계속 읽어 나가면서 성경에 빨려 들어갑니다.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 날도 성경을 가지고 탄광 갱도 속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빨리 먹고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 시모지는 귀찮아서 다른 갱도로 옮겨갔습니다. 그 곳에서 성경을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순간 벼락치는 소리가 납니다. 바로 자기가 일하고 있던 갱도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함께 일하던 37명이 몰살해서 죽었습니다. 시모지는 거기에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시모지는 '하나님이 날 살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고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감형이 되고 또 감형이 되어서 결국은 살아서 출옥했습니다. 살아 나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동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속태웠던 것을 후회하면서 양로원을 세웁니다. 양로원만 세운 것이 아니라 또 돈을 벌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6개를 세웁니다. 일본 정부가 주는 교육자 대상을 받았습니다. 사회 사업가에게 주는 대상도 받았습니다. 77살에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사형수로서 탄광 생활은 늦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에도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니까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삶의 길로 바뀌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늦은 때는 없습니다. 절망할 때는 없습니다.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인생은 바뀝니다.
우리의 죽음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질병으로 죽어갈 때, 실패로 좌절할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냉소적인 태도로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별수 없다. 아무리 애써도 소용 없다" 라고 단정짓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냉소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살았다는 이름만 있을 뿐 모든 힘과 소망을 다 잊어버리고 체념에 빠져 죽을 사람처럼 사로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찾아 오십니다. 자기를 파괴하고 학대해서 스스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져 자포자기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 때가 늦은 때가 아닙니다. 주님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불안에서 밀려오는 공포,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 마음은 가라앉고 기도할 의욕은 나지 않고 자기처럼 불쌍하고 불행하고 무가치한 자가 없다는 자학증세가 고개를 치켜들 때, 신앙의 기쁨도 없고 교회와도, 말씀을 듣도 아무런 감각이 없을 때, 삶의 환희가 없고 신앙의 즐거움을 잃었을 때 죽음의 행렬에 끼어 걸어갈 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찾아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행렬로 인생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2. 절망의 행렬에서 소망의 행렬로 일어서는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12-13).
우리는 어떤 절망의 늪에서도 소망을 주시는 우리 예수님을 만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만나면 절망길이 희망의 길로 바뀌는 때입니다. 절망의 행렬이 희망의 행렬로 바뀌게 됩니다. 절망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크리스찬의 주된 적은 절망과 실망이다."라고 했습니다.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키게르케골은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만나 절망의 행렬에서 소망의 행렬로 바뀌시기 바랍니다. 이 가정은 절망의 늪에 빠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울음을 누가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워 있는 이 청년을 누가 일으켜 세워 줄 수 있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은 같이 울어주고 슬퍼하며 장례를 치러 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절망의 눈물을 영원히 마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을 장사는 치루워 줄 수 있었으나 죽음에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하면 슬퍼하는 그녀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진정 울음을 멈추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세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따르면 실제적으로 눈물이 떠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관에 손을 대며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합니다. 소망의 말씀입니다. 그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삶의 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초상집이 잔치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어쩔 수 없다. 우리 가정은 어쩔 수 없다.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할 때 그 때가 늦은 시간이 아닙니다. 일으켜 세워 주시는 예수님 만나면 우리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늙어 죽을 때가 아닙니다. 청년이 관에 누워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시체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청년이라고 말합니다. 청년은 조금 어렵다고 한번 실패했다고, 병들었다고, 일이 재대로 되지 않는다고 운명주의 관속에 드러 누워 절망할 사람이 아닙니다. 허무주의 관속에 드러누워 허무적 거리며 절망할 사람이 아닙니다. 청년은 열등의식의 관속에 드러 누워 무기력하게 허송세월해서는 아니됩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청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청년의 때는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청년은 성령을 받으면 환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은 나약한 것같지만 말씀 붙들고 일어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붙들면 절망에서 희망이 생깁니다. 샘솟는 용기가 생깁니다. 희망을 줍니다. 많은 위대한 선각자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포된 말씀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한 시대 영국을 변화시키고 세계적으로 영적 각성을 일으킨 설교자 스펄전은 17세 때 말씀붙들고 일어났습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을 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주시는 주님을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리빙스턴은 23세 때 일어나라는 하나님 말씀 붙들고 아프리카 대륙으로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난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썩어져 가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일어나 26세때 기독교 강요를 집필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요셉은 30세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일어나 애굽 총리가 되었으며, 다윗은 그 어려운 죽음의 고비를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일어나 통일 이스라엘의 대왕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세상을 보며 절망하며 관속에 누워 있으면 안됩니다. 현실의 절망적 상황을 바라보며 애늙은이가 되어 절망의 방만 좋아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만화방, 비디오방, 인터넷방, 노래방, 찜질방, 소주방 온갖 방만 찾아 다니며 절망하며 절망의 행렬로 인생을 살다 폐인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소망의 행렬에 올라와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씀은 부정과거 수동태로써 자기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을 부여해 주심으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청년이 죽어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허무와 절망의 관에서 일어나십시오. 패배의식과 부정의식을 떨고 일어나십시오. 슬픔과 두려움의 관, 정욕의 관을 박차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져 가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하자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만 만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하시면 죽은 소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일어납니다.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 있는 인생, 소망이 넘치는 승리의 인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절망한 베드로 예수님 다시 만나 일어났습니다. 도망간 모세 하나님 다시 만나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여러분 잘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만큼 우울하고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도 없을 것 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해되어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청년기에는 혁명당에 가담한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사형집행 전에 그의 천재적인 문학성 때문에 황제의 특사로 사면이 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4년 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지만, 그의 아내는 결혼 전에 사귀던 사람과 계속적인 불륜관계를 맺었습니다. 어린 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추위와 배고픔으로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그에게는 일평생을 그를 쫓아다닌 천형과도 같은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일평생을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의 이 고통스러운 삶을 연명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이 읽을수록 인생의 깊이와 고뇌,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되는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그런 인생의 고통을 절망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런 그의 고통을 '거룩한 병'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그 고통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은 그를 좌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영혼의 돛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그의 믿음 때문에 그는 자서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으로 그 고통스런 인생을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길에서 소망의 길로 바꾸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소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3. 동정받는 행렬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행렬로 소문나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16-17).
예수님 만나면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는 인생에서 사람들로부터 나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으로 바뀌어져 버립니다.
여인의 인생은 이제까지 동정의 대상이 된 인생입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이제 자식이 죽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아는 사람마다 혀를 찾을 것입니다. "참 안되었다." "참 불쌍하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예수님 만나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환희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제 동정의 눈빛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대상이 아닙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큰 선지자가 자신들 가운데 일어난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본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 절망스러운 가정 죽음의 행렬로 이어지는 가정에 임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볼 때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의 진보와 우리 삶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절망적인 사건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큰 영광은 더욱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인생을 전환하여 동정의 대상에서 영광의 대상으로 전환되는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내 인생 이렇게 살다 끝날 것인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다 끝난 것같은 인생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삼손이 인생을 보십시오. 눈이 빼임당하고 착고에 매여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습니다. 그의 젊은 날은 부모에게 짐 덩어리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8)"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삿 16:30)"
성경에 보면 안나라는 여인을 보십시오. 출가한 지 일곱해에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짐덩어리 같은 인생입니다. 84년 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고 금식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었습니다.(눅 2:36-38) 짐덩어리 같은 인생, 남의 동정만 받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예수님 만나면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에게 짐스러운 상황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지옥 같은 집을 천국으로 바꿔 주신 예수님의 소문을 내는 인생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자폐증을 앓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녀는 "차라리 이 아이가 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거듭 외친 적도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절망적인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삶과 죽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고통으로 위대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진주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는 그것은 아픔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아픔을 통해 진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영국 작가 서머셋 몸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말더듬이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미국이 자랑하는 102층 건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경제 공황 때 만들어 진 사실을 아십니까? 1930년대 경제공황으로 수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고 절망할 때 J.J.롸스코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건축하였습니다. 고통의 순간을 좌절의 순간을, 절망의 순간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순간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절망적 상황에 처했을 때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하란에서 아버지 돌아 가실 때(창12:1-3)에도 롯이 떠날 때에서(창13:14-17), 롯을 구출하고 소돔왕의 재물을 거절할 때에도(창15:1,4), 이스마엘을 보낼 때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가 그 고통의 순간을 하나님 만나 영광의 순간으로 바꾸시길 원했습니다.

살아계셔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잘못된 갈을 바꾸는데 늦은 시간이란 없습니다. 예수님 만나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바뀌어지기 바랍니다. 절망의 행렬에서 소망의 행렬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동정받는 행렬에서 영광은 드러내는 행렬로 소문난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잘못된 길을 바꾸는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누가복음7:11-17/ 2002년 12월 1일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