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비전을 가지라
본문
본문 :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말입니다.
" 나는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그 옛날 노예의 후손과 노예를 부리던 사람들의 후손이 형제우애를 나누며 한 식탁에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가득한 미시시피 주 당국이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바뀌어질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내 어린 네 명의 아이들이 그들이 지닌 피부색으로 분별되는 나라가 아니라 그들이 품고 있는 인격으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에서 사는 날이 오리라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흑인이건 백인이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신교도이건, 구교도이건, 다같이 손에 손을 잡고, 옛날 우리 조상이 부르던 흑인 영가 ‘마침내 자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는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를 노래할 수 있는 그 날에 대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탄식소리가 참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전에 가난에 지친 19세 소녀가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침에 신문배달하고, 낮에 약국 점원으로 일하면서 6식구를 부양하던 소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왜 이 19세 소녀가 자살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길을 택해야 했을까요? 단순히 "가난하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자기의 탄식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살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다면 이런 소녀의 자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을 살펴 더욱 서로의 격려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고, 항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의 세미한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탄식소리를 들을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웃의 탄식소리를 듣지 않고 사는데, 왜 그럴까요? 다른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신적 여백이 없이 너무 바삐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세상 소음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루의 얼마만이라도 우리 귀를 소음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장 소리라도 들으려 하다 보면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었거든 이제 침묵을 끝내고 세상에 사랑과 위로를 전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풀이 죽어 있어 현자가 "너 왜 요새 노래가 없지?"하고 물었습니다. 꾀꼬리가 불평하며 "개구리 소리가 하도 커서 제 소리가 소용없잖아요?"라고 하니까 현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세상이 악하다고 침묵만 하거나, 불평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탄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내가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것 아닐까요?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소중한 뜻을 품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비전 있는 사람이란 겨울과 같은 상황에서도 봄을 노래하면서 봄을 준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때로 큰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마음에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 작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삶이 세상의 탄식을 잠재우게 될 것입니다. 그 꿈을 꾸어보세요. 그리고 헌신해보세요. 길거리에 떨어진 종이라도 주어보세요. 꿈은 꿈꾸는 자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전 있는 사람이 취하는 작은 몸짓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작은 몸짓으로라도 꾸준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런 노력들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탄식은 곧 생명의 노래가 되지 않겠습니까?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뜻이 있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믿고 꿈을 가지고 영상을 그리며 나아갈 때 그렇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꿈꾸는 일은 한밤중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깨어 있을 동안에도 꿈꾸는 일은 가능합니다. 흔히 우리는 꿈꾸는 사람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꿈이 없으면 개인도 민족도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꿈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땅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서 큰 민족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될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 꿈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시한 땅으로 갔으며 거기서 그 꿈들을 성취하고 또한 자신의 나이 100세에 90세인 아내 사라로부터 이삭을 얻었습니다.
둘째, 진정한 꿈의 실현은 십자가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 꿈을 꿀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여전히 살면서도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그 꿈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죄는 꿈의 걸림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인류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꿈의 걸림돌인 죄악과 불의와 저주와 절망과 질병을 모두 청산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목표 없는 삶은 불행입니다. 그것은 마치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도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하나님과 이웃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마음속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목표를 하나님께 고백함으로서 응답을 받고 또한 이웃에게 시인함으로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표를 향해 집중적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가운데 자신의 꿈이 성취된 모습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꿈을 바라본다는 것은 꿈을 그리는 것을 뜻합니다. 꿈을 그림으로써 그 꿈은 구체화됩니다. 그때부터 그 꿈은 자신을 이끌게 됩니다. 그런 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꿈을 실현시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을 통해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나아갈 때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꿈이 나의 꿈이 되고 나의 복이 되는 시발점이 됩니다. 이런 기초위에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고백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감사하는 행위를 함으로서 우리의 꿈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월리엄 페더가 쓴 글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5달러 짜리 지폐를 길에서 주웠습니다. 어릴 때 5달러 짜리 지폐를 주웠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에 중독이 되어서 길바닥만 들여다보고 다녔습니다. 일생 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데에 전 생애를 소모했습니다.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나 되었고 수천 개의 동전도 길에서 주웠습니다.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그는 일생 동안 하늘이나 푸르름을,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과 아름다움을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생이 차단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곧 넝마주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넝마주이는 꿈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대상이 없어서 울었습니다. 정복하다 보니 정복할 땅이 없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사회 구조 속에서 20퍼센트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영토이든지 정신 세계이든지 간에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개척하는 데 전 생애를 소모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미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일생의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꿈은 온 세계가 질서를 지켜서 공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은 했지만 전쟁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질서를 확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33 살에 죽었지만 그는 거의 종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징기스칸도 영토욕에 광분한 사람이 아니라 종교가였습니다. 종교적 동기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말을 합니다만 그에게는 이글대는 꿈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에게 절대 대권을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유럽의 통일이었습니다. 새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몇 년을 두고 싸우기만 하니까 유럽을 정복해서 질서를 확립하고 살기 좋은 유럽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유럽의 정치 ·경제 ·사상계의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내는 정치범이 되고 말았지만 철인 나폴레옹은 꿈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 인류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굉장히 큰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조그마한 힘들이 비슷비슷해지면 싸움이 되니까 훨씬 초인적인 힘을 만들어 빠른 시일 안에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불모지에 가서 작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3만의 군대 앞에서 영광과 부가 있는 불모의 땅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3만의 군대는 나폴레옹을 생명을 걸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거의 신과 같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유럽에 자유 와 평등과 우애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비전이 있고 꿈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런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토마스 케리(Thomas. S. Kerry)란 사람은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생애를 하나의 기적으로 바꾸어 놓겠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는 말이 “위대한 사람이란 따로 없다 단지 위대한 꿈이 있을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꿈이 있어야 위대해지고 꿈이 있어야 믿음이 자랍니다. 우리가 꿈이나 영상을 갖되 가급적 정확하게 가져야 합니다. 기한은 언제, 숫자는 얼마, 금액은 얼마, 이렇게 정확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절망하거나 타락하고 맙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다. 이 말씀을 70인역 성서에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거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마음에 영상을 그리며 다 이루어진 것같이 환상을 보면서 기도해야 응답이 속히 오는 것입니다. ‘한나’도 ‘엘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씀대로 꼭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릴 때에 ‘사무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꿈이 다 이루어진 것같이 믿고 영상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축복을 하면 축복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 것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에는 전도자로 평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 노년에 품었던 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로마서 15장 19절에서 바울은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두곤 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이는 3차 전도여행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는 이 3차 전도 여행을 하기 위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겪었으며 초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이제 이만큼 일하였으니 이제는 그만 쉬자 할 때가 되었는데 바울은 지칠 줄 모르는 부푼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이어지는 23절과 24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서바나(이베리아반도 지금 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으니 이제 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의 만족을 얻은 후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로마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서바나에 전도하려는 계획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존심을 버린 사람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체면을 불구하고 도움을 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도다”한 말씀과 같이 바울의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보통사람들은 꿈이 이뤄지지 않을 때 비열해지거나 숙명론에 빠져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측은하리만큼 집요하게 매달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고백과 같이 사도 바울은 빚진 자의 자세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바울의 고백과 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복음의 빚진 자들 입니다.교회는 사랑의 빚진 자들의 모임입니다. 서로 섬기고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섬기고 나누려는 것은 짐이 아니요 복입니다.사도 바울은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 너희에게 지나서 서바나로 갈 때 예수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아노라”라고 하였습니다.바울의 꿈이 그가 살아있는 동안 분명하게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꿈을 접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전도하였습니다. 이때 구원받은 자가 오네시모입니다.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때 쓴 것이 유명한 옥중서신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이 꿈꾸었던 서바나 전도를 그가 직접 이루지 못했으나 그가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옥중서신을 통해서 오고 오는 세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함으로써 바울의 꿈을 이루어주셨습니다.하나님은 지금도 바울과 같이 복음 전파의 꿈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은 자의 꿈을 이뤄주십니다. 꿈꾸는 성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하라 사막에 도전한 엔디폴디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한 때 뉴질랜드의 술집에서 호스테스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구원받고 성경을 읽던중, 이사야서 41장 19절의 ‘사막에 각양 나무가 있게 하리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막에 꽃이 피고 곡식과 나무가 자라나는 꿈을 잉태했습니다. 그리고 사막이 푸른 동산을 이루어 호수가 생기고 곡식이 자라는 꿈을 마음의 화판에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녀는 이 꿈을 안은 채, 사하라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에서 오랜 동안 사막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황폐하던 사하라 사막을 살리는 일은 인접한 국가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녀의 꿈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사하라 사막에 나무가 자라고 보리를 수확하는 기적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하라 사막이 옥토로 바뀌어질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일입니다. 그녀는 가능성의 창문을 연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도 이것에 계속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살리는 기적은 꿈과 믿음과 담력을 가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아름다운 삶과 낭만적인 사랑을 꿈꿉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희망찬 삶과 사랑을 제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삶과 낭만적인 사랑은 오직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자포자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로맨스보다 우리 삶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투박한 로맨스가 훨씬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투박한 삶에 실망할 필요도 없고, 우리에게 주어오는 실패에 주저앉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두워지면 별이 곧 나오듯이 삶의 실패 속에도 꿈과 용기를 잃지 않는 인생에게 진리의 빛은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시인 롱펠로우는 그의 <인생찬가>라는 시에서 꿈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인생의 광대한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장에서, 말없이 쫓기는 가축의 무리는 되지 말자! 이 투쟁에 앞장서는 영웅이 되자! 그저 미래가 달콤할 것이라는 사실에 현혹되지 말자!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돌리자! 활동하자, 살아있는 현재를 위하여 활동하자! 가슴속엔 용기를 품고, 하늘 위엔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인생들 앞에는 광활하고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세계에서 앞장서는 용기 있는 인간이 되는 일이 인생들에게 기대된 일입니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슴속에 자리한 꿈과 용기, 이것이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고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꿈과 개척 정신을 가진 대표적 모습으로 우리는 메이 플라우어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던 순례자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메이 플라우어 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했던 순례자들은 그 해 추위, 힘겨운 노동, 피로, 영양실조 등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갔는데 순례자들은 그들의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상황을 노출시켜 혹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장례식도 밤에 행해야 했었습니다. 겨울이 지난 후 그들의 숫자는 반으로 줄었습니다. 앞에는 미개척 원시림, 뒤에는 망망한 대해로 둘러싸인 그들에게 수시로 다가오는 친지를 잃는 슬픔과 예측 못할 불안감, 그리고 신대륙 개척의 위압감은 그들을 절망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해의 고통스런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습니다. 메이 플라우어 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선장은 친절하게 권유했습니다. "이제라도 본국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주저말고 돌아가자." 그러나 그 배는 빈배로 떠나야 했습니다. 순례자들 가운데 한사람도 그 배를 타고 돌아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들이지만 오직 한가지, 꿈과 희망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현실의 날개는 무겁지만 그 날개를 이용해 힘차게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는 순례자와 같은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노력이 있고, 인내와 사랑과 너그러움이 있고, 나눔이 있는 법입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 꿈이 없으면 내일의 희망도 없습니다. 꿈을 잃어버리면 미래도 함께 잃게 됩니다. 꿈을 품고 열심히 달리는 우리가 됩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갖고 우리 모두 일어나 밝은 빛을 비추는 성도가 됩시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성도 여러분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꿈과 소망 중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나에게 비전을 허락하신 하나님, 주님의 시기에 주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데 나의 꿈이 합당하게 쓰여지길 원합니다. 비록 삶의 과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때에도 나의 꿈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의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