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민 14:24)
본문
- 백장흠 목사 (독립문교회)
성공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공한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이며 자선 사업가인 카네기는 실패한 사람들의 열 가지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핑계하기에 급급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매사에 책임적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열등의식과 자기 비하에 젖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3)실패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다르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4)쉽게 포기합니다.
어렵다고 다른 사람의 여론이 좋지 아니하니까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 합니다.
5)과거 지향적입니다. 항상 후회하고 잘못한 것을 탓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힘있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6)독창력이 없는 이들이 실패합니다.
성공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항상 창조적입니다. 새 것을 생각하고 찾습니다. 안되면 되는 방법을 찾아서 시행할 줄 아는 이들이 성공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불신앙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같은 넥타이를 삽니다. 색깔도 같고 모양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값이 다릅니다. 이유는 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성경 민수기 14: 24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종 갈렙은 그들과 다르다" 고 말씀하십니다. 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선민의 대표로 뽑혔습니다. 같은 목적으로 일한 사람들입니다. 민족성이 같았고 목적이 같으면 모든 게 같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갈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1. 관점이 달랐습니다.
관점이란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다는 말 한 마디가 여러 각도에서 사용됩니다. 여인들이 시장을 보고 왔다고 했을 때는 시장에 다녀왔다는 말입니다. 다른 남자를 보았다는 말은 여자가 탈선했다는 말입니다. 맛을 보았다는 말은 먹어보았다는 말입니다. 체험을 말할 때에 보았다고 합니다. 매운 맛 좀 볼래. 관(�이란 분명한 견해요, 명확한 판단입니다. 삶의 철학이요, 자기의 확고한 태도입니다. 잘못 보는 것은 편견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이 아들을 보는 눈과 며느리를 보는데 편견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아들이 부모에게 잘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아들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며느리 그 애가 자꾸 제 남편에게 말해 가지고 아들이 그런다는 것입니다. 혹 잘하면 모두 아들이 잘해서 효자라고 합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면 잘못 보게 됩니다. 사견도 문제입니다. 자기가 좋은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초기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평양에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성경 마태복음 16장 13절을 읽으십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읽으시니까 보신탕을 좋아하는 어느 분이 예수께서도 보신탕을 좋아하셔서 가이 사러 빌립보까지 가셨는가? 그곳에서는 개를 가이라고 한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말합니다. 이는 사견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잘못을 했습니다. 요즈음은 큰일이랍니다. 젊은 아이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그런 거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단 견이요 망견입니다. 우리는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물건을 잘 사는 사람은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집이 좋다. 그것만으로는 잘못 사기 쉽습니다. 교통이 좋으냐 주거환경이 어떠한가? 이것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불신앙인들과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면 분명히 관점부터 달리해야 합니다.
1) 미래 지향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도 아무런 생각 없이 놓은 이는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이고 고수일수록 판을 길게 보고 바둑알을 놓는다고 합니다. 최고의 고수라면 바둑의 마지막 끝 수를 보면서 한 알 한 알을 놓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이 보는 관점이 일시적이요, 찰나적이 아닙니다. 먼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만 보는 게 아닙니다. 그 날을 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상대를 볼 때에 인물이 잘생겼는가? 오늘 경제적으로 윤택한가? 만 보면 잘못 볼 수 있습니다. 장래성이 있는가? 우리는 오늘만 보고 판단하고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보아야 합니다. 한국만 보는 게 아니라 중국도 보고 일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유럽도 보고 미주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힘드십니까? 신앙생활 하는데 어렵습니까? 우리는 오늘을 보고 사는 게 아닙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 날에 면류관이 있습니다. 농사꾼의 심리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힘이 듭니다. 계속 땀을 흘립니다. 그러나 가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게 농부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유달리 다른 이들보다 열정을 가지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날을 생각하고 하는 겁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왜 멀고 먼 길 광야 길을 걸어왔습니까? 약속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나안이 보이지 아니한다고 뒤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돌아갈 힘이 있으면 앞으로 더 힘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2)관점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열 지파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보았습니다.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 현실만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어린아이가 교회 건물 위에 십자가를 보면서 아버지 저 교회는 더하기(+)를 하는 가봐요. 그때 아버지는 구걸하려고 그러는가 보다 보태달라고 하는 말이지. 예전에 더하기를 보태기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관점이 믿음인가? 아닌가 다릅니다.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반응이 생기는가? 미국에서는 경찰관이 제일 먼저 나타나 수습을 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보험회사 직원이 달려와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보상조처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먼저 견인차가 나타나고 마스크를 한 뻥튀기 아줌마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엇을 하던지 이익을 챙기는 방향에서 보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를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다른 성도님들에게 유익이 되는 건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믿음의 관점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빌립이 본 것은 5천명을 먹이는데 배불리 먹지도 못하면서 200 데나리온이 있어도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 잘 보고 계산한 것입니다. 현실적인 관점으로는 아무런 기적과 축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안드레 같은 이는 어린아이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발 앞에 가져옴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현실주의자들 합리적인 사람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보면 절망이 없습니다.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3)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과 가룟 유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가 먼저 부름을 입고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가룟 유다의 가치는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를 배신하고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분토같이 여기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이 머무는 곳 그곳은 어느 시골이나 어느 도시이든 그 순간부터 예수의 영향력을 나타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아니하고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인정되어야 신앙도 성장하고 건강하여집니다. 수고하여 소득을 더 얻고 신앙적인 것보다는 세상적인 즐거움이 가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2. 말이 달랐습니다.
사람은 말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말을 통하여 전쟁이 시작되기도 하고 말을 잘 함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10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말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5:1절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열 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민 14:1) 원망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던지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었다고 탄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3:30절에는 갈렙은 “백성들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올라가자” 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 모습입니다. 말에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말이 은혜롭습니다. 갈렙은 말이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1)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민수기 13:28절을 보세요.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에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31절에서는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3절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열 지파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올라가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말이 전혀 다릅니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말은 자동차의 기어와 같고 배에서는 키와 같습니다. 안 된다는 말로 작동시켜 놓았으니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안 되는 방향으로만 가게 됩니다. 같은 선택받은 지도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말에도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판적인 말을 합니다. 남을 해롭게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칭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아니하면 물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그때 신앙의 사람은 말합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작은 미물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 아닙니까? 말이 다릅니다.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좋게 하시려고 그럽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꿈자리가 사납더니 재수 없게 되어가는구먼 그럽니다.
2) 우리는 믿음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말이 문제입니다. 인본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말할 때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지금보다 더 좋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게 믿음의 말입니다.
민수기 14: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말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 말 한 마디마다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되어집니다. 믿음의 말을 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십니다. 나를 도와 주십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생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이 생산적입니다. 어느 분이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의사의 말에 간에 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혹이라는 겁니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한다. 입맛도 없고 잠이 오지 아니합니다. 한 주일만에 몸이 수척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의사가 하는 말입니다. 그건 암이 아닙니다. 물혹은 병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얼굴색이 달라집니다. 밥맛이 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하고 낙관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밝은 면을 보고 말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 좋다는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3)확신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현대인의 말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무엇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불확실한 시대인가를 증명해 줍니다.
요즈음 자기 남편을 보고 오빠라고 합니다. 남편의 동생은 무어라고 불러야 합니까? 오빠 아닌가요? 남편이 남편인지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하지 못한 시대의 언어 사용입니다. 기도하는 분들이 기도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정말로 설교하는 분들 중에도 정말로 라는 말을 합니다. 얼마나 불확실하면 이것만은 정말이라는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우리의 말은 확신이 있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능히 이기리라.” 그 병은 하나님께서 고치십니다. 확신이 있는 말을 하는 신앙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말은 달라야 합니다.
3. 충성이 다릅니다.
열 두 사람들이 똑같이 지파의 대표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맡은 임무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순간부터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충성해야 합니다. 거룩한 의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충성입니다. 충성하는 데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1)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 말로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사장님이 출근하면서 청소를 한다면 이는 회사를 위해 일을 하는데 자기 할 일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새 힘을 얻게 해주어야 합니다. 방향을 제시하여야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지도자는 뒤로 가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 합니다.
2)충성은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은 하고 싶은데 할 줄 모르면 문제입니다. 전문성이란 계속적으로 하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3)불변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욕망이며 에너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할 일임에도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피하려 하고 미루고자 합니다. 연기력은 있는데 열정이 없으면 충성을 못합니다. 물론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많이 하는 것처럼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것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14:10-12절을 보면 그가 나이 85세 때에 여호수아 지도자를 찾아가 전과같이 건강하니 산지를 내게 주어 아낙자손을 쫓아 내리이다 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이 열정입니다. 갈렙을 보세요. 여호수아와 같이 정탐하였고 동행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되었고 자기는 아무 것도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음에 섭한 생각도 들고 속된 말로 속이 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충성은 누구는 무엇이 되고 나는 못되었기에 나는 안 한다 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변함 없이 자기 임무에 충성하는 것 이것이 달랐습니다.
4)갈렙은 끝까지 충성하였습니다.
그의 충성에 대하여 신명기 1:36절에서는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여호수아 14:9절에는 “온전히 좇았으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신앙도 변함이 없어야 하고 충성도 변하지 않아야 충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화 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가치가 있습니다.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충성됨이 달라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게 외형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요청됩니다. 이기주의를 버리고 예수 중심의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 다른 신앙인과 다른 점이 있는 특색 있는 귀한 성도가 되어 영원히 기록에 남는 복된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