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본문
박재신 목사 (양정교회)
오늘 말씀의 제목을 지옥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천국 복음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지옥복음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리 즉 좋은 소리란 뜻입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좋은 소리가 들려올 수가 있을 까요? 지옥은 형벌이 가득한 곳입니다. 긍휼 없는 진노가 쏟아지는 곳입니다. 유황불이 끊는 곳, 그래서 슬피우는 영혼들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이 있는 곳이 지옥인데 그곳에서 무슨 복음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대의 신학자요 교부였던 터툴리안과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들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상의 삶과 영원한 세계에서의 삶에 대하여 설명하시기 위해 실제로 살았던 어떤 부자와 그 집 대문에서 얻어먹는 거지였던 나사로의 이 세상의 삶의 모습과 그들이 죽은 후 영원한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식으로 들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아주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호와로운 옷을 입고 연락하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하나님도, 예수도 없이 세상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자기 마음껏 즐기며 멋지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어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은 후에 부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는 음부라고 표현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16:24절에 보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꽃은 계 20:10절에서 마귀를 멸하는 불 못에서 타오르는 불꽃으로 지옥을 말할 때 항상 첫째로 등장하는 설명입니다.
계 21:8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을 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넣는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둘 다 죽었는데 거지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표현된 낙원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냥 장사지냈다는 말만 나옵니다.
16:2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눅 16:23)
음부의 고통중에서 낙원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들리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죽으면 끝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에서 절실하게 외치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세상에서 천국 지옥 불신하고 살면 큰 일 납니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가 바로 지옥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끊임없이 고통받는 곳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는 존재입니다.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영원히 고통받는 곳이 지옥입니다.
천국 지옥 있습니다.
둘째는 이 세상에서 행복과 불행과 영원한 세계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부자와 나사로는 사후에 완전히 그 위치가 뒤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정말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불행했습니까?
① 병듦었습니다. 그의 병은 당시의 의학으로는 치료 불가능한 불치의 병이었을 것입니다.
② 가난했습니다. 본문에서 나사로를 거지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지였다는 것은 가난을 상징합니다. 나사로가 왜 가난한 거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의 몸에 있는 질병이 가난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병든 것을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귀울이다가 알거지가 되어 이제는 치료를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하루 하루 부자집 대문에서 얻어먹고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③ 외로웠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게 된 그에게 함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오랜 세월 병고에 시달리며 이제는 소망도 없이 죽을 날만 바라보는 그에게 곁에 있어주지 않았습니다.
헌데를 앓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상처를 닦아 주고 소독이라도 해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동네 개들이 와서 불쌍히 누어있는 나사로의 헌데를 핥아주는 친구가 됐을 뿐입니다.
불행한 일을 만났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 그 불행을 함께 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정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날마나 호화롭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재물과 권세와 그 주변에 수 없는 사람들이 언제나 함께하였습니다.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둘다 죽은 영권한 세계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올라간 나사로는 더 이상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죽어서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더 이상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의 고통에서 신음하며 말합니다. “세상의 행복이 영원한 행복이 아니구나” 그러면 나사로는 무엇이라고 했을 까요?
“육신을 가지고 잠시 불행한 것이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히 불행한 것 보다 훨씬 났구나”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통했으나 영원한 세계에서 위로 받고 행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옥에서 들리는 복된 소리는 바로 지상의 행불행과 영원한 세계의 행불행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잠깐의 행복을 취하려다가 영원한 천국의 행복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잠간 환난을 받아도 영원히 안식을 얻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셋째로 물질이 영혼 문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눅 16:21절에 보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라고 했는데 지옥에 간 부자는 그가 먹는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부스러기로도 다른 사람을 배불릴 수 있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 대문에는 그 부스러기들을 얻어먹기 위해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개들도 그 집 대문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안 모양입니다. 21절에서 개들이 그집 대문에 왔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날마다 잔치하며 호와로이 연락했기 때문에 집안에는 고급 스럼 옷을 입은 고관대작들이 초대되어 진수성찬으로 배불리 먹고 대문 밖에서는 가난한 거지들이 와서 남은 부스러기를 먹고도 배불릴 수 있는 부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물질의 풍요가 그의 영혼 문제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면에서 물질이 부자의 영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① 지옥 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돈으로 군대 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감옥에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어도 지옥가는 것은 막지 못합니다. 그러니 돈이 부자의 영혼 문제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② 지옥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가볍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물질은 그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9-21절에 보면 지옥에 가는 또 하나의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사람이 아무리 재물을 많이 쌓아도 그것으로 영혼 문제를 해결할수없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맹목적으로 소유에 집착하게 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는 돈이 없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관은 아주 위험한 것이며 반 기독교적인 가치관입니다. 돈으로 안 되는 일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의 영혼 문제와 관련되는 일은 절대로 돈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물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물질은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부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말씀합니다. 창 26:12-13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이삭이 하나님의 복으로 말미암아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그 자체가 저주거나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부가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입니다.
오늘 이 부자가 지옥에 가고 정죄 당한 것은 나사로를 때리고 내쫓아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먹다 남은 쓰레기를 먹게 해서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가난한 나사로에게는 무관심하였다는데 있습니다.
부자가 가진 것 중에 아주 약간만 나누었어도 그는 나사로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자는 나사로가 먹든 굶든 병으로 죽든 말든 전혀 상관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물질 즉 자기만을 위해 쌓아둔 물질은 그 자신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도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해가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약 5:2-3절에 보면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쌓아놓는 재물은 결국 녹 쓸고 좀먹게 될 것이며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독이 된다는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 11:1절에서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라고 했고 마 19:21절에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눅 6:38절에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라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은 온당하고 정당한 일에 사용할 때 복이 되고 영원한 행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솔로몬은 잠 11:24-25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넷째는 전도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지옥을 알았습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거기서는 물 한 모금의 은전도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지옥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긍휼 없는 진노와 형벌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구원은 오직 이 땅에 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였느냐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열심히 전도해야합니다. 구원의 기회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만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지옥에 있는 조상들은 그 후손들이 복음을 듣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고통 중에서 자신에게는 물 한 모금의 은혜도 허락되지 않는 다는 사실 앞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남아있는 자신의 형제 다섯에 대한 걱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눅 16:27-28 절에서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지옥에 왔어도 형제들만은 자신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옥에서 형벌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를 원하여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애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옥에 있는 조상의 영혼들은 결코 자신의 혈육이나 형제들이 형벌 받는 지옥에 오지 않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을 끔직히도 섬겨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사입니다.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기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사상 차려놓고 절한다고 해서 조상을 잘 섬겼다고 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조상들의 영혼이 지옥에 있든, 천국에 있든 정말로 조상을 위한다면 그들의 소원을 들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조상들이 지옥에 있다면 그들도 후손들 만큼은 모두 다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영적인 소리에 귀를 귀울입시다. 하나님은 지옥을 통해서도 우리를 교훈하시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 어떤 메시지가 들려옵니까?
① 죽음 그 이후에는 천국, 지옥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② 지상의 행불행과 영원한 세계의 행불행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③ 물질이 영혼 문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④ 전도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⑥ 지옥에 있는 조상들도 그 후손들 만큼은 복음 듣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