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우리는 범죄하였나이다 (단 9:3~11)
본문
다니엘서는 열두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제일 중요한 장을 들라고 하면 어느 장을 드시겠습니까?
다니엘서의 요절을 들라고 하면 2장 22절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또 12장 3절을 들 수도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저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그런데 한 절이 아니고 한 장을 들라고 하면 몇 장을 드시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절을 ‘요절(要節)’이라고 하면 제일 중요한 장은 낯선 말이지만 ‘요장(要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다니엘서의 요장은 어떤 장이겠습니까?
‘‘다니엘이라고 하면 풀무불에 들어갔으나 무사한 사람, 사자굴에 들어갔다가 무사한 사람으로 유명하니까 풀무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3장이나 사자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6장을 들어야하겠지요.’ 하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꿈을 풀어주고 환상을 많이 본 사람이니까 그와 관련된 장을 들어야하겠지요.’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 일리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정답은 9장입니다. 9장에서도 앞부분입니다.
이것은 여러 주석들이 일치하게 말하고 있는 일입니다.
9절은 진주와 같은 장입니다. 보석들 가운데서 진주는 요란하게 빛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은한 빛을 내는 가운데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9장 앞부분은 제목이 “다니엘의 기도”로 되어 있는데 회개의 기도입니다.
이 회개의 기도 끝 절인 19절에는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합심기도를 드릴 때마다 외치는 ‘주여!’ 삼창(三唱)의 성서적 근거가 되는 말입니다.
이 외침은 다니엘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9장은 ‘철저한 회개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다니엘의 회개를 중심으로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누가 회개해야 하는가?’
‘언제 회개해야 하는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회개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것들을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누가 회개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깨끗한 사람, 신앙양심을 지킨 사람인데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고 이렇게 깊은 회개의 깊이 하고 있나?’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 점이 궁금합니다. 신앙의 절개를 굽히고 금 신상에 절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회개해야지, 여러 번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금 신상에 절하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 다니엘이 무슨 회개할 것이 있습니까?’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범죄한 민족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해서, 또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9장 앞부분에는 “범죄”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5절,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7절,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8절, 주여 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11절,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15절,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9절에 나오는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15절에 나오는 “악을 행하였나이다” 이와 같이 범죄와 같은 뜻을 가진 말들까지 합하면 여기에는 범죄라는 말이 참 많습니다.
다니엘서 9장은 이와 같은 범죄들을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이 범죄는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회개기도는 중보의 회개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회개의 기도를 하는 믿음은 사자굴에 들어간 믿음, 풀무불에 들어간 믿음보다 더 차원이 높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도 회개를 하였습니다.
욥기 42장 6절을 보면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먼저 욥 개인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회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회개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회개할 일들을 많이 발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다음 성도들은 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이 민족을 대신해서, 또는 이 민족을 대표해서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 이 땅의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사명이요, 또 의무입니다.
민족의 일원으로, 민족을 대신해서, 민족을 대표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특히 이 팔 월에 그와 같은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합니까?
평소에도 꾸준히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샤워, 세면, 세수를 자주합니다. 특히 요즘 손만 잘 씻어도 질병의 많은 부분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여 자주 손을 씻을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회개는 마음의 세수입니다.
특히 무엇인가 답답한 일이 있고, 그 일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잘 해결되지 않는 원인을 죄에서 찾으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예레미야서 25장 11절의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기라”라는 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포로된 지, 예루살렘 제단이 파괴된 지 7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왜 해방이 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가?’ 답답하게 생각하다가 이와 같이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8월을 통일기원의 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통일의 조짐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목, 긴장, 이런 것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회개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서도 안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왜 응답을 하시지 않는가?’
그것은 내 죄에 대한 깨달음, 그 죄에 대한 회개의 기도가 없거나, 형식적이거나,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제일 큰 회개는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5절 끝의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도 그런 뜻입니다.
6절은 우리가 선지자들이 한 말을 듣지 않았다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고 율법을 행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11절은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표현의 공통점은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민족을 벌을 받습니다.’ 다니엘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민족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 나라에서 언제나 베스트셀러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크고 작은 수만 개의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그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어려움을 주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회개하십시다.
그래서 회복의 놀라운 역사가 이 땅에서 일어나게 하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회개하면 문제의 해답을 받습니다.
다니엘이 회개의 기도를 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와서 지혜와 총명을 주고 다니엘이 본 환상을 풀어줍니다.
회개하면 교회가 부흥합니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 초기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 하디(1865~1949)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한국 이름은 하리영(河鯉泳) 이었습니다.
이 분은 목사이면서 동시에 의사였습니다.
이 분은 1890년에 한국에 와서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으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 무렵 하디 선교사의 선교보고에는 ‘악한 자의 권세가 연합하여 매번 나를 패배감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나는 선교 사역의 실패로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사역을 더 할 수 없을 전도로 절망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다가 여러 가지를 깨닫습니다.
‘아, 내가 믿음이 약하여 성령감림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로구나! 나는 내 능력, 학식, 실력에 의지했구나!’
‘아, 내가 교만했기 때문이로구나!’
‘아, 내가 한국 민족을 미개한 민족, 무식한 백성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로구나!’
‘아, 내가 백인으로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로구나!’
하디 선교사는 이것을 깨닫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이것을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그리고 한국 교인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눈물로 참회하고 회개했습니다. 1903년의 일이었습니다.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하디 선교사는 성령체험을 한 뒤 이것이 성령이 나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했으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디 선교사의 이와 같은 일을 통해 원산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디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통해 한국인들 사이에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선교다운 선교가 왕성하게 행해졌습니다.
이것을 원산성령감림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 원산성령감림의 불꽃이 평양으로 튀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많이 듣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 14일, 월요일, 평양장대현교회에서 모였던 사경회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특징 역시 회개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울며 고꾸라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의 부흥을 바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감소의 충격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은 그 누구보다도 교회의 부흥을 바라고 있습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부흥은 헛 부흥입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에 평양에 들어갔다가 어제 밤에 돌아왔습니다.
평양에 있는 동안 가능하면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시작된 장대현교회 자리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내년에는 1907년대 부흥 100주년 행사들이 많이 벌어지고 그런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질 터인데 그 현장을 볼 수 있다면 여러 모로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양은 지금 그 모습이 완전히 변화되어 평양에 오래 살았던 분들도 현재의 평양에 찾아가면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도 잘 살피면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양에는 남산현감리교회라는 큰 교회가 있었고 감리교에서 세운 광성학교와 병원이 있었습니다.
평양에 가면 인민대학습당이라고 규모가 큰 도서관이 있는데, 평양을 소개하는 화보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건물이 있습니다.
남산현교회, 광성학교, 기독교병원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평양에 가면 인민대학습당 앞을 자주 지나게 됩니다.
그 앞을 지날 때는 남산현교회의 환영이 떠오르곤 합니다.
인민대학습당은 평양 방문에서 필수코스인 주체사상탑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데 한 번은 주체사상탐에 갔다가 이 곳을 오래 응시하는 가운데 인민대학습당의 모습은 사라지고 남산현교회의 모습이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기도 하였습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시작된 장대현교회가 있었던 자리도 대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적으로 평양에 들어가든지 간에 평양에서는 행동의 자유가 없습니다.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야합니다.
그 위에 이번에는 평양보다 농촌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 장대현교회 자리를 찾아보는 일은시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북한의 어려운 현실을 다시 한 번 현장에서 보면서 자신이 많은 회개를 했고 민족적 회개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습니다.
도시도 그렇지만 농촌에서는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광경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특히 잊히지 않는 광경이 있습니다.
어떤 농부한 사람이 길을 걷는데 신을 신지 않고 어깨에 매어달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논에 들어가기 위해 일부러 신을 안 신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그 분은 논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그 모습으로 길을 가더군요.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역시 가슴 아픈 것 가운데 하나가 일부러 농민들에게 다가서 말을 걸면 겁먹은 표정으로 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성이 파괴될 대로 파괴된 모습으로 비쳐졌습니다..
평양 방문을 마치고 중국 심양으로 나왔는데 점심을 서탑교회 부근에 와서 먹었습니다.
일행 중에 어느 기업의 사장이 한 분 있었는데 매우 쾌활하고 술을 대단히 좋아하고 심각한 생각 같은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심양에서 거리에 사람들이 오가고 그러는 것을 보면서 ‘이제야 비로소 사람 사는데 나온 것 같네요,’ 하더군요.
그러면 여러분, 이 말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김일성 부자에게 있습니다.
평양에 가면 제일 먼저 낯설게 느껴지고 좋게 생각되지 않는 것은 구호들을 대단히 큰 글씨로 많이 써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념물들이나 구조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대부분 김일성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구호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북한 주민들은 ‘수령의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평양에 도착해서 호텔로 가는데 김일성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안내나온 사람이 ‘수령님이 영생하시는 곳입니다.’ 하더군요.
속으로 ‘어, 영생은 이런 것이 아닌데!’ 했습니다.
농촌 깊숙한 곳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기념탑, 구호, 구조물들이 농촌 구석구석에 참 많았습니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간 곳은 인구 2,000명이 조금 넘는 농촌인데 그 마을 중심에 있고 제일 크고 제일 좋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어떤 건물인가 하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김일성 주의 학습실’이었습니다.
북한이 이렇게 특정 개인숭배에 지나치게 빠져 있는 것은 중국이니 러시아 같은 북한과 사이가 좋은 나라에서도 좀 개선하면 어떻겠느냐고 충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김일성 부자, 일부 권력층에게만 책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적었던 잘못, 기도를 게을리 했던 잘못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간 집을 나간 아들의 비유에서 형이 집을 나가 고생하고 있는 아들에 대해서 찾으러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서 편하게 지냈던 첫째 아들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특히 8월은 이 문제를 가지고 강하게 회개하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17절을 보세요. 다니엘은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북녘 땅의 무너진 제단에 복음의 빛이 다시 비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회개는 ‘메타노이어’ 방향을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방향을 돌이켰으면 그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되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도 달아져야 합니다.
회개는 습관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형식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회개는 결단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회개의 기본 요소입니다.
우리들의 회개는 이런 것들이 되어야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칩니다.
누가 회개해야 합니까?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회개해야 하고, 민족의 일원으로 민족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민족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언제 회개해야 합니까?
바로 지금, 8월, 회개의 달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말씀을 멀리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해서 문제들이 해결되고, 답답한 것이 시원해지고 교회가 부흥하도록 ㅘ는 일에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