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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신앙고백 (시106:1-5)

본문

다윗의 신앙고백
시 106:1-5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경험들을 겪게 됩니다. 알고 보면 이 경험들이 이 참 중요합니다. 이 경험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순간마다 무한한 자본의 역할을 해 줍니다. 더구나 젊어서 체험한 그런 경험들은 더 진지하게 그 인생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예부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억지로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고들 말하지만 지나고 보면 한때의 뼈아팠던 경험들도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선 삶에 지혜를 줍니다. 생각을 깊이하게 하고 처신을 신중하게 하고 이해심을 깊게 해 줍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고 깊이 감취인 것, 깊이 묻혀있는 것, 깊은 하나님의 섭리들을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썼다는 시입니다.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참으로 많은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우선 그는 신앙적으로 깊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실감나게 체험하였고 그는 그 일로 자신감도 갖게 되었고 깊은 곳에서 흐르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도 인식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깊은 신앙적인 안목을 가졌겠습니까. 또 그는 인생의 뼈저린 경험도 했습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 겪은 불화와 갈등을 통해서 정말로 뼈저린 아픔을 체험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이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립니까.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실존의 경험도 철저하게 하게 됩니다.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는 목숨을 내 놓는 비장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로부터 쫓겨 다닐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넘나드는 숨 막히는 순간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에게 쫓겨 다닐 때는 처절한 아픔과 비탄과 배신감과 고뇌를 경험하면서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거기다 뼈저린 실패도 경험했습니다. 왕으로서 백성들 보기에 창피하게 반란을 몇 번씩 경험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는 뼈아픈 경험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인생 마지막 단계에 가서 간신히 회복되어서 극적으로 왕좌로 다시 돌아오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참 다윗은 산전수전 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윗과 같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저의 대답은 “노”입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 삶이 내게 주어질 사명이라고 해도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볼수록 다윗이 위인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 경험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 경험들 때문에 다윗은 할 말이 참으로 너무나 많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철저하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도 뼈저리게 깨달은 사람입니다. 또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실감나게 만나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다윗은 참 행복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할 말이 너무나 많은 사람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너무나 절절하게 만난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실감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한마디로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다윗은 숫한 장애물을 경험하는 동안 웃고 울고 떨고 도망 다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넘나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은 여러 번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만난 하나님을 다윗은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표현같이 보이지만 참으로 진부한 내용과 고백이 들어있는 표현입니다.

이 깨달음은 풍상을 많이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깨달음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별소리를 다 합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따라 말하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실감나게 경험하였기 때문에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겸손했고 순종하였고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다윗은 결론적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 대부분이고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예수는 3대 성인이고 성자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고 절박함이 없는 그런 하나님의 개념입니다. 더 이상 두려움이 없고 든든함이 없는 아주 무력한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 현장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직접 구체적으로 만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아주 권위 있는 하나님이고 두려운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느낌부터가 다릅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을 보면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시오니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늘 높이 올라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혹시 흑암에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오니 내가 주의 낮을 피하여 어디로 숨으리이까”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니 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권능을 다 말하랴“하고 고백합니다. 고백의 질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고 형식이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실감나게 만나고 경험하고 체험하였기 나올 수 있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복중에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억됨을 받는 일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로부터 기억된바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은혜이고 복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은 매사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또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것도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감이 넘치고 하는 일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최상의 복입니다. 야곱이 부모를 속이고 야간도주를 합니다. 하란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잠을 잡니다. 그러니 그 밤이 얼마나 무섭고 처량한 밤입니까. 이제 언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돌을 베개하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짐승의 위험과 전갈의 위험과 강도들의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밤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그때 하늘 문이 열리며 환상 중에 사다리가 내려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오를락 거리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너희 조부의 하나님이요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로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그러니 그 밤에 들려오는 음성이 얼마나 반갑고 환희에 찬 음성이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밤에 야곱이 얼마나 용기와 격려를 힘입었겠습니까. 그래서 야곱이 일어나 제단을 쌓고 서원하기를 “내가 평생 하나님께 11조를 드리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떠납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 보니 그곳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무지 광야였습니다. 그때 실망이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 넓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이 넓은 땅을 네 자손에 주리라, 그리고 네 자손을 이 땅에 있는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 그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무엇이 외롭고 고독하고 의심이 들었겠습니까. 그 넓은 광야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알고 찾아오셔서 자신의 미래와 장래에 대해서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어느 날 갑자기 지도자 모세를 잃었습니다. 그렇게 의지하고 출애굽의 길을 함께 걸어온 모세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네가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때 준비되지 않은 채 대임을 떠맡은 여호수아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내가 너를 참으로 도와주리라.” 이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인정받고 기억된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하고 복된 일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복을 받기를 기원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기억된바 됨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이 세상의 6-70억 인구 중에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억된바 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전율이 느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를 내 보냈습니다. 모두 나가서 신나게 전도했습니다. 전도하는 중에 귀신들이 굴복하고 항복하였고 병자들이 고침 받고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하였습니다. “주님, 귀신들이 굴복하였고 병자들이 낫더이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오늘 우리는 누가 나를 알아 줄때 행복해 합니다. 누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 일로 흥분할 것 까지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시고 알아주시는 일에 흥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삶 중에 적절할 때 나에게 오셔서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여러 번 개입하셔서 죽음의 길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 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하나님이 그때마다 나타나셔서 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은혜로 나를 기억하소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억됨의 대상이 되는 것이 복입니다.




“주를 자랑하게 하소서”




오늘 사람들이 자랑을 많이 합니다. 손자 자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듣다못해 돈을 내고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돈을 내고 자랑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자랑 그만 하라고 돈을 거둬준다고 합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면 마땅히 자랑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방법이 간증하는 일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도 분명 하나님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도 자랑하는 일입니다. 글을 통해서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랑에는 구체적인 체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참 실감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숫한 굴곡을 거치고 위험을 거치고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아주 실감나게 고백합니다. “나로 주를 자랑하게 하소서” 본문 뿐 아니고 시편에서 다윗이 쓴 시를 보면 구구절절이 모두 하나님 자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에는 평생을 하나님 자랑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도 그중 한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 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 고백은 오직 주님중심의 삶을 말하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루한 거지가 구걸할 때 베드로가 외칩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얼마나 확신에 찬 명령입니까. 이것이 예수를 자랑하고 세상에 전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자랑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고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몇 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습니다. 모두 그 그림을 보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림 속에서 특히 포도주 잔을 보고 참 대단한 그림이라고 모두 평가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는 얼굴색이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붓을 들고 포도주 잔을 지워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명작을 왜 지워버리느냐고 모두 놀랐습니다. 그때 다빈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패작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시선이 예수님께 집중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눈이 이 술잔에 모아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이 그림을 그릴 때의 의도가 빗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그리겠습니다.” 다빈치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모든 초점을 예수께 두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나의 모든 관심, 모든 목적을 둘 수 있는 대상을 가지고 그 대상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자랑하는 삶입니다.

저는 이런 다빈치에 비하면 예수에 대한 열정이 보잘 것이 없습니다. 참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덜 실감나게 만나서 그럴 것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예수라는 이름을 들으면 벌떡 일어나야 하는데 지금 저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제가 덜 실감나게 주님을 만나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그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도 피곤을 느끼고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고 그럽니다. 이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나 저의 실력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지난주일 비가 좀 오니까 400여 명씩 주일을 빠졌습니다. 기분이 조금 나빠도 교회도 신앙도 대화도 끊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관심의 수준이 그만큼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무슨 예수 자랑이 그렇게 뜨겁고 실감나게 나오겠습니까.

다윗은 그 점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짧은 인생을 통해서 그는 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깊이 만나고 체험하고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그때 만난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도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권능을 다 말하랴,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내가 주를 자랑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있었으면 합니다. 고백도 그냥 고백이 아니고 확신에 찬 신앙고백입니다. 신앙인이 그렇게 실감나게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확신 있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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