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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의 슬픔 (렘 49:34~36, 요삼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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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의 슬픔 (렘 49:34~36, 요삼 9~10)


‘평균’이란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균이란 최악 중의 최선이요, 최선 중의 최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평균 정도로는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기 전에는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평균보다 뛰어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 꼬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당한 경쟁을 통하여 으뜸이 되어야 하고, 남을 해치지 않고 으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욕망으로 으뜸이 되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경쟁자로 변합니다. 모든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나도 모르게 해치게 됩니다. “당신이 공짜로 얻은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지불한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공짜로 얻은 것은 남이 더 많은 대가를 이미 지불한 것입니다. 내가 으뜸이 되려면 많은 사람을 밀어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으뜸 되기를 좋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필로프로토스’라는 말입니다. ‘프로토스’는 첫째라는 뜻입니다. ‘필로스’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첫째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이근영씨의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이란 책에 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천사는 자신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다. 인간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이유는 정확히 그 반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아가지 못합니다. 교만하여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거리가 멉니다.

세상에서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종래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지배한 자는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지금도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힘이 세고 스스로 으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주께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영광 중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4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해답이 10:45에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으뜸이 되어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 곁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튀어야 산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 뛰어난 것이 있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의 슬픔을 살펴보고 늘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9절에는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당시 교회에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있었습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이름의 뜻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디오스”라는 말은 제우스를 의미합니다. “트레포”라는 말은 기른다는 말입니다. ‘제우스를 기른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주신인 제우스를 기른다는 이름부터가 너무 거만합니다. 이름이 너무 거창하고 교만하면 그것도 안 좋습디다.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여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장악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악한 천사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악한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타락한 천사들이었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결국 악한 마귀가 되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으뜸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천사가 하늘에서 쫓겨났다면 교만한 마음이 하늘에서 버림받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빌립보서 2:3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섬기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낮게’ 여깁니다.
교회 안에서의 교만은 예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만은 쓸모없는 쓰레기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교만을 자신감이라 오해하고, 교만을 돈독한 신앙심이라고 과대 포장합니다. 그래서 가장 늦게 제거되고 가장 먼저 재발되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히는 인간성입니다.

라인홀드 니이버라는 학자는 교만을 ‘권력의 교만’, ‘지식의 교만’, ‘덕의 교만’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에까지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슨 권력이나 지식이나 덕을 꺼내어놓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눈꼽 만큼도 교만할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한 번은 어느 집사님이 교회 일을 하시다가 상처를 받은 것 같습니다. 제게 와서 “목사님, 자존심 상해서 교회 일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그걸 왜 교회에 가지고 오셨습니까?” 그랬습니다. 자기를 죽이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나 명예심 같은 것은 교회가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으뜸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면 자존심이 상할 리가 없습니다. 교회 일을 하다가 기분 나쁠 일이 없습니다.

중세교회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의 목록이 있었습니다. 이 죄의 목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만, 탐욕, 색욕, 질시, 폭식, 분노, 나태가 그 일곱입니다. 그런데 교만이 첫 번째 죄였습니다. 으뜸 되려고 하는 교만은 하나님과 가장 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장 먼 것이 교회 안에 있으면 되겠습니까?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몇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바쁩니다. 둘째는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한국인의 근면성을 배우라”고 했답니다. 셋째는 으뜸이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2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부 1등만 하려고 합니다. 모든 머리만 하려고 합니다. 으뜸이 아니라 버금도 있어야 하고, 앞선 사람만 아니라 따라가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탐하였고, 같은 목소리를 내어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을 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호수아에게 모든 권세를 다 주고 그의 지도력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후선에 물러나서 아예 멀리 떨어진 산지에 묻혀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만 아니라 갈렙도 정말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는 베드로나 바울만이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 아닙니다. 그들의 뒤에서 사도라는 칭호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마가, 누가, 바나바, 디모데 등, 사도가 아닌 2선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입니다.

한국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누군지 아세요? 홍길동이랍니다. 관공서에 가면 어지간한 소유는 다 홍길동입니다. 그런데 홍길동이 많으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듭니다. 홍길동은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만들지 않습니까? 진짜 으뜸 되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가운데 교회의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둘째,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는 형제를 내쫓습니다.

10절에는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라고 합니다. 자신이 으뜸 되려면 남을 쫓아내야 합니다. 디오드레베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디오드레베의 세 가지 악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의 사도권을 무시하고 악한 말로 대항하며 폄론하였습니다. 둘째는 순회전도자인 형제들을 맞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셋째는 형제를 받아들이는 의로운 교인들을 쫓아내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는 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못 봐줍니다. 이것이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일반적 특징입니다.

공동체는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다른 사람을 다 쫓아내고 나 혼자 일등 할 수 있습니까? 나 혼자 으뜸 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나 혼자도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나 홀로 간다면 남들로 홀로 갈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공동체를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사는 곳”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함께 갈 줄 아는 것이 공동체의 삶입니다.

로마서 12:10에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24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성경에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혹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갔을 때에 제일 먼저 학교에서 신입생에게 강조하고 주지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포괄적 언어 정책’(Inclusive Language Policy)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하게 신학의 용어를 남을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거나 남자를 ‘man’이라고 하면 아예 논문을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언어에도 아예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은 저의 신학과 사고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내어 쫓는 일들이 가끔은 있습니다. 내가 으뜸 되기 위하여 나보다 나은 사람을 내쫓고,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 아닌 자신의 집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에서도 부하 직원이 나보다 능력이 있으면 못 봐주는 사람이 있죠? 저는 저보다 설교 잘하고, 실력 있고, 훌륭하고, 큰 교회로 성장시킬 수 있는 부목사님이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한 편으로는 목회를 잘 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시기할 것도 없고 질투할 일도 아닙니다. 저는 정말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은퇴한 후에도 덕도 보고 손해 될 것이 없을 것이라 봅니다.

훌륭한 가정에도 흔히 문제아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사 기드온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여룹바알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형제 70명을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요담은 숨어있어서 화를 면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여룹바알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 때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런 비유를 말합니다. 나무들이 나무의 왕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감람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하였지만 그는 거절합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하였지만 거절합니다. 포도나무에게 갔지만 역시 거절하였습니다. 마지막에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하자 그는 수락하면서 자기 그늘 아래 와서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에 살라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런 가시나무가 왕이 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룹바알은 3년 동안 세겜의 왕으로 있다가 세겜 사람들이 배반하게 됩니다. 어느 한 여인이 맷돌을 여룹바알의 머리에 던져 두개골을 깨트려 죽게 했습니다. 성경은 이 일에 대하여 “형제 70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다”고 합니다. 형제를 다 죽이고 으뜸이 되려고 했던 여룹바알을 하나님이 직접 치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으뜸이 되려고 다른 제자들을 내쫓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른 제자들이 다 버릴지라도 자기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으뜸이 되려고 다른 제자들을 마음에서 버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으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제일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요한과 야고보도 다른 사람을 제쳐두고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으뜸이 되려고 다른 사람을 내어 쫓는 그 자체가 마귀의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새로 나온 “상대성 원리”가 있답니다. 나보다 더 늦게 운전하는 사람은 바보고, 나보다 더 빨리 운전하는 사람은 미친놈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죄지만 내 잘못은 인생 실험입니다. 남이 하는 기침은 의도적인 것이지만 내가 하는 기침은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입니다. 옆집 남자가 직장을 잃으면 불경기지만 내가 직장을 잃으면 공황입니다. 남이 뜻을 꺾지 않는 것은 고집불통이기 때문이고 내가 뜻을 꺾지 않는 것은 강직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하는 비판은 파괴적이고 내가 하는 비판은 건설적입니다. 이런 상대적 마음이 사회에 팽배합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본위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거미사회인 정보사회에서 사람은 누구나 거미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이고 극단적으로 자기 사랑에 빠집니다. 이런 현대인의 심성이 형제를 내치고 자신이 으뜸이 되려고 하는 보편적 심리가 지배하는 것입니다.

결론

전설적 골퍼인 잭 니클라우스는 “모든 기록은 누구에겐가 의해 언젠가 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록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1936년 올림픽 때 수립된 세계 기록들이 1972년 올림픽 때는 참가자격 기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기록된 또 깨어지고 새로운 기록들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으뜸이 언젠가는 버금이 되고, 한참 후에는 꼴찌가 되기도 합니다. 으뜸은 늘 불안하고 흔들립니다. 으뜸이 되려는 자는 늘 경쟁적이고,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고, 남을 내치고, 심지어 남을 죽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보응은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49:35에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을 꺾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으뜸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손보신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으뜸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6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합니다. 으뜸 되고자 하는 자는 항상 슬픔이 있습니다. 고통을 불러옵니다.

늘 겸손하여 높임 받고 으뜸이 되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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