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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골짜기 (겔 3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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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골짜기 (겔 37:1~10)


결혼식날 신부를 보면서 ‘예쁘다’라는 말과, 이미 산 물건에 대해서는 ‘잘 샀다’라는 말입니다.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행복감을 주는 거짓말이라면 진실 이상의 효과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아주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이민규 교수는 상처를 주는 진실보다 행복을 주는 거짓말이 정신 건강에 훨씬 좋다며 예쁘지 않은 사람에게 ‘예쁘다’, 무능력한 사람에게 ‘잠재력이 무한하다’는 격려는 행복을 주는 거짓말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우절만이 아닌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희망을 북돋아주는 지혜로운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가 읽어드린 말씀을 가지고 ‘소망의 골짜기’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기원전 6세기에 바벨론으로부터 침공을 받아 완전히 나라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당시에 잔인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장들까지 학살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쇠사슬에 묶인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에스겔 선지자도 당시 같이 끌려간 사람이었습니다. 조국을 잃고 끌려간 머나먼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그러기를 7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도탄에 빠져 있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가 다시 사는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희망을 선포하는 복 있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어느날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많은 뼈들이 있었습니다. 그 뼈들은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 바짝 말라 있었고 온 몸의 뼈가 다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생명의 흔적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골짜기는 아골 골짜기요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두려움과 난감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병실에 누워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사람에게 이 사람이 살겠느냐?고 물어도 대답하기가 곤란한데 죽은지 오래된 뼈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에스겔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희망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살 수가 없다. 희망없이 사는 것은 살기를 중지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단테는 그의 소설 「신곡」에서 지옥 문에는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다 버린 자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다귀의 환상은 오랜 노예생활 중에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도저히 소생할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이 뼈들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시는 질문은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날 것을 너는 믿느냐?는 것입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될 것을 너는 믿느냐?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날 비젼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노벨상을 받기 한해 전인 1963년에 외쳤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피로 물든 조지아의 언덕에서 옛적 노예의 아들과 옛적 노예 소유주의 아들들이 형제애에 넘치는 밥상에 함께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람이 피부색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의해 평가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언젠가는 억압과 불의의 열기로 시달리고 있는 미시시피 주 마저도 정의와 자유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가 높아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거친 땅이 평평해지며, 구부러진 땅이 펴지며 주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함께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런 강력한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암살의 위험과 협박 속에서도 노예 해방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이미 죽은지 오래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물으신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이미 죽은지 오래된 바짝 마른 해골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요,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솔직한 인간들의 생각이요, 상식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경험의 한계요, 능력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소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네 자녀가 다시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느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너의 남편과 너의 부모가 예수를 믿고 구원얻을 것을 믿는냐? 안된다고 생각했던 네 남편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믿느냐? 지금까지 소식이 없던 너의 직장 문제가 해결 될 것을 믿느냐? 지금까지 계속 낙방해 오던 시험에서 합격될 것을 믿느냐? 불경기로, IMF로 문 닫았던 너의 사업이 다시 열려질 것을 믿느냐? 의사가 암이라고 판정한 네 건강이 회복될 것을 믿는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와 같이 희망도 용기도 잃은 채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는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한 분이 선교 대상지역을 답사하는 도중에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그 지역에 사는 토인 한 사람을 가이드로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선교사를 이끌고 가는데 이상한 데로 헤매고 다닙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도대체 길을 아시오? 혹시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오?” 그랬더니 토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정글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길입니다. 걱정 말고 나를 따라 오십시오.” 그렇습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 소망의 길로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이 뼈들에 대해 대언하라

본문 4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무슨 뜻입니까? 마른 뼈들에게 가서 선포 하라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할 것이니 너희가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6절에 보면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이 말씀대로 그대로 대언했습니다. 7절에 보면 에스겔이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군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힘없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던 뼈다귀들은 하나님의 큰 역사를 위한 예비 된 군대였던 것입니다.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랑하는 친구가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내친김에 토끼 사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냥개가 땅에 뒹굴뒹굴 거리기만 하고 토끼 잡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겁니다. 홧김에 내려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사슴 사냥을 떠났습니다. 저만큼 사슴이 나타났는데도 전혀 쫓아가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는 활을 쏘아 사냥개 두 마리를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토기 한 마리, 사슴 한 마리 잡지 못하는 그 놈의 개를 사냥개라고 선물 했느냐고 야단을 했습니다. 이 때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왕, 그 사냥개는 대왕을 위해서 사자와 호랑이를 잡을 때 쓰도록 특별히 훈련된 개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꿈과 목표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토끼 잡고, 사슴 잡는 꿈이 아니라 적어도 사자나 호랑이 잡는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큰 꿈과 영원한 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토끼나 사슴은 못 잡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주일날 동창회, 친목회에 안가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까지 함께할 영원한 가족이 더 중요합니다. 더 좋은 친구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썩어 없어질 것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 신령한 것에 목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볼 때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소망은 일시적이지만 우리의 꿈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꿈을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나 희망을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삶이 힘들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났고 그 믿음 안에서 참된 희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엡6:17에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에 비유했습니다. 즉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을 찔러 쪼개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육신에 병이 들었을 때에 외과 의사가 그 부위를 수술해서 깨끗하게 고치는 것처럼 우리의 병든 심령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령의 검으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우상을 섬기는데서 떠나서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언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쫒아 말씀을 대언할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저와 여러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영혼들을 향하여서는 ‘예수님이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대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에서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대언해야 합니다. ‘병든 자에게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노라’고 대언해야 합니다. 눌린 자에게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노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대언할 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그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선포해야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 속에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어 지고 죽은 영혼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셋째, 생기를 불어서 살게 하라!

에스겔 선지가가 말씀을 대언할 때에 죽은 뼈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9절에는 하나님께서 생기에게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고 대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생기’라는 원어는 ‘루아흐’인데 ‘바람, 호흡, 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 명하였더니 사방에서부터 생기가 불어와 죽어 있는 자들에게 들어갔습니다. 생기가 들어가서 죽었던 뼈들이 살아났습니다. 그 골짜기에 죽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 큰 군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적막하기만 했던 골짜기는 생동감 넘치는 생명의 골짜기로, 절망의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 루아흐 안에서는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절망 시킬 수 없습니다.

종합병원 내과 전문의의 고백입니다.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장례를 준비하십시오.”, “살 수 없습니다” 절망을 선언할 때면 가장 무서운 외로움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내가 왜 의사가 되었을까? 그러나 무서운 수술을 앞에 두고서도 “살아납니다.”, “반드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선포할 때면 의사가 되기를 잘했노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 이 뼈들을 살려내라’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힘 있는 큰 군대의 힘찬 약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한 부인이 용기를 잃지 않고 타이피스트가 되어 어느 회사의 비서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몇 달 근무를 하는 가운데에 이름 모를 병 ‘쉴레라더마라’는 병으로 손가락 끝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 저곳 손가락 마디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가락을 자르고 무서운 절망으로 누워있는 이 부인에게 목사님이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옵니다.

“하나의 문이 닫혀 질 때마다 하나님은 다른 문을 열고 계십니다.” 퇴원을 하자 이 부인은 회사의 임원으로 발탁이 되어졌고 경비 분석가가 되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감사헌금 봉투에 감사 내용을 이렇게 써서 강단에 올렸습니다. “내 손가락이 잘려지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 곁에서 모든 일거리가 떠났구나, 내 아이들은 어떡하나 염려했는데 하나님께서 문제를 정지표시가 아니라 방향 표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문제가 있을 때는 내 인생이 끝장났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턴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인간은 쉽게 절망합니다. 어두움의 골짜기 속에서 절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흑암의 골짜기에 누워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의 골짜기 너머 계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마른 뼈 같은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생기의 영을 불어 넣으셔서 일어나게 하시고 힘 있는 군대가 되게 하셔서 큰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에스겔 골짜기는 절망의 골짜기가 아니라 소망의 골짜기 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할 때에 우리는 희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캄캄한 인생을 헤매는 이들에게 말씀의 등불을 비추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을 때 성령 안에서 환한 웃음을 선물하시기 바랍니다. 바라옵기는 우늘도 우리의 모든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시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명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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