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가 소그룹으로 모여야 하는가? (전 4:7-12)
본문
요즘 드라마 중에 “불량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몇 번 보았더니 코미디적인 성격이 있지만 주제가 괜찮은 드라마입니다.
얘기인즉슨, 어떤 아홉 살짜리 아이가 교통사고를 만나서 차에 타고 있던 온 가족이 다 죽었습니다. 아이는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실어증을 앓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는 여러모로 고민을 하고 연구를 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데, 그것이 아이에게 예전과 똑같은 숫자의 유사가족, 대체가족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족 대행업체를 통해서 가족을 공급받게 되는데 그 대행업체의 사장이 오달건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의 뜻은 간단합니다. 오월에 대구 달성공원에서 건빵 봉지 들고 서 있던 세 살짜리를 고아원에 데려다주면서 그 이름을 오달건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주연배우는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김명민이란 배우인데, 건달은 건달이지만 좀 착한 건달로 나옵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신용불량자들, 고금리 사채 쓰고 돈 못 갚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급조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들고, 아빠, 엄마를 만들고, 삼촌, 오빠를 만들어서 일곱 명의 가족을 이룹니다. 전혀 남남을 급조해서 부부도 만들고, 가족을 만드니 별별 헤프닝이 다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아홉 살짜리 아이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사랑을 느끼면서 아이가 말을 하게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말입니다. 가족을 대체해서 만들 정도로 가족은 꼭 필요한 것이다, 또한 가족을 통해서만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역설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한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에 보니, “그런즉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권속이란 말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물론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성령으로 연결된 가족들인 것입니다.
가족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가족의 힘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동행”이라는 월간 잡지가 있는데 1월호에 보니, 최종욱이란 한 지방의 수의사가 쓴 글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토끼는 특히 습기에 약하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장마철에는 습기가 많은데 그 습기 때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고, 그가 일하는 동물원에서 토끼가 한두 마리씩 죽어가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병 든 토끼들을 따로 격리하고 조치를 취하는데, 보았더니 아주 생생한 토끼 두 마리가 있더랍니다. 의아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1년 전 쯤 한 가족이 직장 때문에 서울로 이사 가면서 토끼를 키울 수 없어서 이 수의사에게 강제로 맡긴 토끼라는 것입니다. 그 집은 이 토끼를 자기 생명같이, 자기 가족같이 아끼고 쓰다듬어주고 이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수의사가 얻은 결론은 ‘아... 사랑받으며 자란 토끼는 면역이 강하구나. 전염병에도 걸리지 않고 병을 이겨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결론이 “사랑은 명약이다”입니다.
사랑은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치료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뉴스 기사를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이 키스를 하면 그 키스가 바로 장수의 묘약이라는 것입니다. 키스를 많이 하면 생명이 연장된답니다. 그리고 침샘을 자극해서 구강 질병도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치과에 덜 갈 수 있다는 얘기지요.
반면에 부부싸움을 많이 하면 동맥경화증에 걸릴 확률이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단축시켜 간다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을 억지로 참느라고 애쓰다 보면 결국 동맥경화라는 중병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가 조용히 하는 말이 “집에 가서 당신의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멀리 갈 것 없습니다. 당신의 가까이에 있는 가족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세계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여기 계신 남편들 중에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와 주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세계의 평화란 바로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런 말하기 쉽습니다. 나는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아니 이 많은 교인들을 어찌 사랑합니까? 1, 2, 3, 4부 교인들 얼굴도 못 보는데, 같은 예배 나와도 앞에 앉고 뒤에 앉으면 말 한마디 못 해보고 집에 가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소그룹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전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가정에서 모이는 작은 교회들을 통해서 그들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요한일서 4장 11절에 보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아멘.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가족들을 사랑하고 교회에 속한 소그룹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주일부터는 40일 캠페인 개회예배를 드리고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캠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특별새벽집회입니다. 40일 동안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소그룹 모임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다섯 여섯 명, 혹은 10명 이내의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함께 찬양하고, 삶을 나누고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이 모임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소그룹으로 모여야 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 지어놓고 보니 너무 외롭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부부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가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133편 1절에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 중에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나를 향하여 기도하면 내가 응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너희는 혼자 기도하고 혼자 무엇하라 이런 말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입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보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보니,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 보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며”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보니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혼자 고백하고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입니다. 함께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보니,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그룹으로 모여서 함께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왜 소그룹으로 모여야 할까요? 우리는 서로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연약합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를 붙들어 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아멘.
둘 이상은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한 사람이 일으켜 세워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실족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주저앉아 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누가 옆에서 일으켜 세워주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넘어졌을 때 누가 조금 옆에서 부축해주어도 우리는 얼른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넘어질 때 일으켜 세워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겐 소그룹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너무나 추울 때가 있습니다. 고독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1절 말씀 읽어볼까요?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아멘.
지금이야 웬만한 집이면 보일러가 있어서 온 방이 다 따뜻합니다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연탄을 피우기 때문에 아랫목은 불을 열어 놓아서 다 타서 새카맣게 타고 윗목은 냉기가 흘렀습니다. 그러면 두꺼운 이불을 깔고 덥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서로 몸과 몸을 마주치면 온기가 흐르게 되는 것이지요. 발을 대면 서로 따뜻함을 느낍니다. 한 사람은 춥지만 두 사람은 따뜻함을 교감할 수 있습니다. 춥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독하다는 것이고 외롭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나눌 친구가 있고 신앙의 동반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고독할 수 있기 때문에 소그룹에 포함되어서, 소속되어서 함께 서로를 돌볼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패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12절에 보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업에도 실패할 수 있고 전쟁에도 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면 패하지만 두 명, 세 명이 나가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그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힘과 두 사람의 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혼자 일을 할 때는 한계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대화하며 지혜를 짜내서 일을 하면 두 배 세 배 네 배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 마리가 보통 6톤의 짐을 끌 수 있다고 어떤 이가 말하던데, 소 두 마리면 논리적으로는 12톤의 짐을 끌 수 있지만, 실제로는 두 마리가 함께 짐을 끌면 20톤 이상의 짐을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린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말합니다. 함께 할 때에 그 갑절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하려면 힘듭니다. 그런데 옆에서 두 명 세 명이 거들어 주면 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넘어질 수 있고, 패할 수 있고, 고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그룹으로 모여서 서로를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영신교회 교인들은 다 소그룹에 소속되어서 사랑과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왜 소그룹에 참여해야 할까요? 소그룹은 바로 영적 성전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성전을 건축해서 입당을 하고 헌당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더 중요한 성전은 영적인 성전입니다. 바로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 보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돌로 쌓은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그 성전 부분, 부분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가 연결될 때 우리는 진정 영적 성전을 지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예배 한번 예배드리고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감소하는 것입니다.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그룹원들이 함께 모여서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줄 때 진정한 영적 성전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에 보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지어 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오래되면 허물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적 성전은 영원한 것이고 견고한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영적 성전인 이 소그룹 안으로 다 들어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가 소그룹에 참여해야 합니까? 엄청난 변화의 잠재력을 소그룹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재발견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그룹의 발견입니다. 이젠 회사에서도 예전과 같은 피라미드의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팀 제도를 활용합니다. 어떤 업무가 주어지면 대 여섯명이 함께 모여 연구하고 나누고 지혜를 묻습니다. 일종의 소그룹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능률을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팀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재발견은 소그룹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미 12제자를 통해서 소그룹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성장하는 교회들의 특징은 소그룹이 활성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의 예배에 참여하는 대부분이 작은 단위의 소그룹에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그룹의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교회가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유익 중에 많은 것들을 상실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래스카를 잘 압니다. 이 알래스카는 원래 구 러시아의 땅이었습니다. 미국이 러시아에게서 이 땅을 720만 불을 주고 샀습니다. 지금 돈으로 하면 70억 정도 되는 돈입니다. 알래스카가 얼마나 넓으냐하면 우리 대한민국의 여섯 배가 되는 땅입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많은 언론들은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했습니다. 그 얼음덩어리인 땅을 무엇하러 돈을 주고 사느냐 이거입니다. 거저도 안 가질 텐데 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땅을 너무나 잘 샀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라는 공항이 생겼습니다. 조사를 해 보니 거기에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석유, 석탄, 금, 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황금의 땅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이 땅을 그냥 지나칠 뻔 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대예배에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그룹으로 모여서 서로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가 진정으로 강한 교회가 될 수 있고 능력있게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소그룹은 우리의 가정과 같습니다. 가정에는 양육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형제가 7남매입니다. 위로 누나가 둘 있고, 형님이 네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어릴 때 보면, 저희 어머니가 저를 키운 게 아닙니다. 저희 형님이 저를 키웠습니다. 누나가 키웠습니다. 누나가 저를 업어 키우고, 3시에서 4시까지는 누나가 업고 다니고, 4시부터 5시까지는 형님이 업었습니다. 하도 업어서 다리가 오다리가 되었습니다. 저를 밥먹여주고 키워준 것은 누나랑 형님입니다.
이것이 소그룹입니다. 소그룹을 통해서 서로를 양육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해하시는데 목사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양육합니까? 한번 설교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그룹 속에서 먼저 믿은 분들이 나중 믿은 새신자를 섬기고 세워주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형들이 동생을 키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우리 새가족 교육하는데 장로님들, 권사님, 집사님들이 하시는 모습 보면 참 좋습니다. 물론 교역자가 할 수 도 있지만 교역자들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계시더라구요. 한 사람의 교역자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양육할 수 있지만, 우리의 많은 제직들은 수많은 새가족들을 동시에 함께 양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양육이 바로 소그룹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에는 출산이 있습니다. 부부가 만나면 아기를 낳지 않습니까? 이 소그룹도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출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의 소그룹은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릴 때, 자리 하나를 비워 둡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 이 방석의 주인공을 찾아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여기 앉을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전도해서 앉혀 놓으면 또 하나의 방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소그룹이 열 명, 열두 명을 넘기면 분가해서 두 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세포가 분열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혼자 가서 전도하려면 좀 머쓱합니다. 그러나 두 명, 세 명, 네 명이 함께 가면 겁나지 않습니다. 소그룹이 한 사람을 놓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는 것입니다. 훨씬 전도의 열매가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소그룹에는 위로와 격려와 나눔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나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소그룹 속에서 자신의 마음 속의 빈 자리를 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그룹의 서약서 중에는 여기서 들은 얘기를 밖에 나가서 할 수 없다는 비밀유지의 서약도 있습니다. 그 얘기를 함께 나누고 듣고 상담해 주고 치유해 주고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차마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 누구에게 부탁할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너무나 고독할 때 여러분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으십니까? 어렵습니다. 요즘 우리의 고민은 너무 슬픈 일을 당해도 누구에게 얘기를 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뻐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할 사람이 없다는게 우리의 고민입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한 할머니는 신문에 광고를 냈답니다. 누가 나한테 전화 한 통화만 해 주면 1불씩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너무 고독해서요. 여러분, 이렇게 위로받고 치유해주고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걱정은, 웬만한 병은 누구하고 30분만 얘기하면 다 나을 수 있는 병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30분만 마음 놓고 얘기할 수 만 있어도 웬만한 병은 다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위로의 공급처가 여러분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에는 교제가 있듯이 소그룹에도 교제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은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밥상머리에서 대화를 통해서 치유 받는다는 것입니다. 소그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소그룹에서 함께 지혜를 모을 수 있고 인생을 승리하는 비결을 함께 배워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록키산맥의 길이 하나 있었답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인데 한번은 산사태가 나서 길 중간에 눈덩이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록키산맥 이쪽에서는 우편배달부가 배달하려고 차를 몰고 갔습니다. 저 쪽에서는 신부님이 급한 일이 있어 저쪽 동네를 가려고 차를 몰고 왔는데 산사태로 길이 막혀버렸습니다. 치우기는 불가능합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고민하다가 이런 지혜가 떠올랐답니다. “우리 그럴 것 없이 차를 바꿔 타고 갑시다!” 그래서 신부님은 우편배달부의 차를 타고 그 쪽 동네로 가고, 이 배달부는 신부님의 차를 타고 자기 가고 싶은 목적지로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으면 훨씬 위대한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삼겹줄이 무엇입니까? 나와 당신과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삼겹줄입니다. 내가 있고 소그룹 공동체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가장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따뜻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소그룹의 구성원들이 함께 있다면 우리는 가장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소그룹은 바로 사랑의 모임이고,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영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