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하나님 입니까? (창 32:24~28, 요 20:26~28)
본문
여러분은 혹시 왕년의 여가수 김상희씨가 부른 이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이 노래처럼, 사람은 내면의 변화에 따라 겉모습도 달라지는 존재입니다.
옛 군대시절 첫 휴가를 나와 희운이라는 여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복음성가 대회도 나가던 친구였는데, 이 친구가 밥을 사겠다고 해서 식당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전 한동안 그 친구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가 몰라볼 정도로 예뻐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예뻐졌냐? ” 고요.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대신 대답을 합니다. “걔 약혼했어....” 그 한마디에 전 희운이란 친구가 그처럼 예뻐진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사람을 180도로 변화시키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병자를 건강한 사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낙담을 의지로, 패배자를 능력자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 엄청난 변화의 중심엔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유일한 신, 야웨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있는 삶과 하나님이 없는 삶은 인생의 복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기준점임을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입니다.
필리핀 북쪽 마을 사가다에서 산을 넘어가면 독특한 장례문화를 가진 산지 바랑가이(마을)가 나옵니다. 그 마을사람들은 절벽에 관을 매달아 장례를 지냅니다. 그러고는 매년 그 시신을 끌어올려 손으로 만집니다. 죽은 이의 복이 자신에게 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관을 운구하면서 시신에서 흘러나온 썩은 물이 자기 몸에 떨어질 때, 기뻐하며 좋아합니다. 심한 경우 그 썩은 물을 마시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조상의 복이 자기에게 임한다고 믿는 미신적인 믿음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산지에서 내려 온 청년(탄야)이 우연한 기회에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를 믿으면서 악취 나는 썩은 복이 아니라 하늘 향기 폴폴 묻어나오는 다른 차원의 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엔 그저 먹고 살아남는 게 복이었는데, 이젠 조국의 복음화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대학에서 기독교 서클을 이끌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실력이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의 전도를 믿고 받아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 하나님으로 인해 초라한 삶이 위대한 인생으로 변화된 사람들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생에서 누리는 복의 출처가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자기고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증거 합니다.
믿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믿는 그분이 누구의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1. 야곱의 자기고백
야곱의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이고, 의역을 하자면 ‘교활한 자 ’입니다. 빈털터리로 집에서 도망 나왔지만 젊은 나이에 재산가로 변신할 만큼, 그는 누구보다도 약삭빠르고 잔재주와 처세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얍복강에서 벌어집니다. 소위 말하는, ‘얍복강 결투’입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사람이 벌이는 역사상 최초의 싸움입니다.
성경은, 뿌리치려는 천사와 안 놓아주는 야곱이 치열하게 싸우다가 그만, 야곱의 환도뼈가 탈골되었다고 전합니다. 금세기 최고의 격렬한 격투기인 K-1에서도 볼 수 없었던 끔찍한 부상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짐작해 왔듯이, 하나님은 야곱과 슬슬 싸워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져주시려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상처는 대충 가격당한 게 아님을 말해줍니다. 진정 생명을 걸어야만 했던 무섭고 살벌한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니 그처럼 잔꾀 많은 야곱이 왜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조상이름을 걸고 믿는 신앙으로는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에서로부터의 두려움과 근심을 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실 야곱은 죽기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잘 살기위해 그 처절한 싸움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신 하나님이 마침내 응답합니다.
“ 이제부터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 순간 야곱은 번개처럼 깨닫습니다.
“ 이젠 됐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 나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구나.”
하나님에 대한 자기고백을 가진 야곱의 삶이 그 시로부터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강 너머 에서로부터 불어오는 미움과 두려움과 싸움이, 이내 사랑과 기대와 회개의 맘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강을 건너가 에서를 만난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미움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다툼 때문에 사는 게 힘들고 고달프십니까?
야곱처럼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고백을 만들기 위해 한번 싸워 보십시오.
왜 수십 년을 믿으면서 사는 형편이 나아지질 못합니까? 전도 한명 못합니까?
불면의 밤을 하얗게 싸우며 얻어 낸 자기 신앙의 고백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2. 모세의 자기고백
젊은 시절의 모세는 노예민족 이스라엘의 기대주로 스스로 확신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래는 나에게 달려있다” 고 언제나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 그가 광야로 쫓겨가서 40년 동안이나 꿈에도 생각 못한 시골뜨기 생활을 합니다.
그러는 사이, 혈기왕성하고 야망으로 펄펄 끓던 열혈 청년은 기약 없이 잊혀져 버린 사막의 양치기 노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혹의 세월동안 모세를 따라 다니던 눈물, 체념, 원망, 그리고 탄식을 우린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힘든 날들을, 죽고 싶은 밤들을 보냈을까요?
출3장은, 이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 만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그 하나님이 모세자신의 하나님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아무 쓸모없어 쓰레기처럼 여겨지던 미디안 사막 양치기 40년의 세월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는 희망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알듯,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사막의 대부족인 미디안의 족장입니다. 사위인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후광을 받아 40년 동안 출애굽의 사막을 손바닥처럼 누비고 다녔습니다. 사막에 있는 모든 우물과 모든 부족들에 대한 정보가 모세의 머리엔 무려 40년 동안이나 습관처럼 입력되어졌던 것입니다.
만일 40년 사막생활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자손은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열사의 사막에서 모두 떼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삶에 무관심한 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당신의 고백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도 지금, 뜻을 이루지 못해 모세처럼 답답하십니까?
당신도 모세처럼 길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 죽을 지경이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호렙산을 오르십시오.
불타는 가시떨기를 향해 산을 오르던 모세처럼, 하나님을 향한 호기심을 높이십시오. 돈과 건강에 대해 갖는 호기심처럼, 이제 당신의 하나님을 향해 호기심을 가지십시오. 그 순간, 당신의 버려진 시간들은 당신의 내일을 비추는 황금 같은 세월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3. 도마의 고백
우리가 기억하는 도마는 12사도 중 수위권 경쟁에서 멀리 비껴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의 일행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그저 평범하고 초라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할 때도 도마는 감히 그들 틈에 끼어 들 생각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마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언제나 베드로의 주님이었고, 요한과 야고보의 주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요14장은 제자이면서도 주변인에 불과했던 도마의 일화를 전해줍니다.
고난을 예언한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야한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가는 길을 너희도 알게 될 거라고 하실 때, 도마는 예수의 하나님 되심에 의문을 가집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모르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자기고백이 없던 도마는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때도 저 혼자 부인을 합니다.
오히려 도마는 제자들이 서로 짜고서 자신을 놀린다고 불쾌해 했습니다. “세상에 십자가위에서 찢기다시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겠느냐”고.....
“너희들 내가 주님의 총애 못 받은 별 볼일 없던 제자라고 그렇게 놀리면 못 쓴다” 고 오히려 험한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을 부인하던 다락방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대못에 깊게 패인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만지고,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간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라” 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난생 처음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예수를 만나는 가운데, 도마는 마침내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의 주님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저분은....나 도마의 하나님이셨구나. ”
드디어 도마의 입에선 역사상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한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흘러 나와.
- “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자기고백을 가짐과 동시에, 아웃사이드에 머물던 도마는
비로소 참 제자로, 진정한 사도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12 제자 중 가장 먼 나라로 선교를 떠난 이가 바로 도마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어 달라’ 는 예수님의 지상명력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 제자가 바로 도마였습니다.
동방의 땅 인도의 말라바 해안가에 7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외치다가
A.D.72년경 Big Hill(성 도마의 언덕)에서 무수한 창검에 찔려 장렬하게 순교한 제자가 바로 도마였습니다.
인도 케랄라(Kerala)의 그리스도인들은 2000년이 흐른 지금도 자신들을 ‘성 도마의 그리스도인‘ 이라고 고백하며 위대했던 사도의 삶을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가족들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서 세례를 받게 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할머니가 염려되어 며느리가 세례문답에서 대답하는 요령을 가르쳐 줍니다.
“ 어머니, 목사님이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느냐’고 물으면, ‘내 죄 때문이라’고 대답하셔야 해요. 아셨죠?”
“ 얘 염려마라 내가 뭐 바본 줄 아니?”
그래도 맘이 안 놓인 며느리는 한 가지를 더 가르쳐 줍니다.
“어머니, 목사님이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느냐’ 물으면, ‘십자가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고 하세요. 잊으시면 안되요?”
“ 아 글쎄 걱정 말라니까.”
마침내 세례문답 차례가 되자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왜 돌아 가셨지요?”
그러자 할머니가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 아 우리 며느리 죄 때문이지요.”
크게 당황한 목사님이 어떻게든 세례를 줄 마음에 더 쉬운 걸 묻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 가셨나요?”
첫 번째 문제가 틀린 걸 눈치 챈 할머니가 당황한 나머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연못위에 가로 박혀 죽으셨지요.”
이 우스운 이야기가 정말 우리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이야기일까요 ?
또렷한 자기고백 하나 없이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부모나 아내의 하나님을 찾고, 교회 목사님의 하나님이나 찾는 가엾은 교인이 정말 없나요 ?
기도가 안 된다고 믿음대로 된 적이 없다고, 때마다 일마다 불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등을 돌렸던 적이 정말 없었나요?
이제 하나님의 임재에 인생의 승부를 걸고, 밤새도록 씨름하던 야곱을 닮아
당신도 불안한 미래에서 구원받길 바랍니다.
이제 세상이 아닌 하나님에 호기심을 갖던 모세처럼, 나의 호렙산을 올라가서
쓸모없이 낭비되는 덧없는 세월에 종지부를 찍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피 흘린 주님의 몸에 손을 대면서 그 앞에 무너졌던 도마처럼,
세상의 무관심에서 훨훨 벗어나 최고의 리더요, 기대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눈을 감고 나의 문밖에 서신 그리스도를 향해 저와 함께 마음 문을 열고 고백하길 원합니다.
..........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송병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