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예배를 열납지 않으신 이유 (창 4:1-9)
본문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이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오신 분은 아마 이 시간에 없을 줄 압니다. 모두 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고 그를 높이며 찬양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줄 압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하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볼일이 있었다면 교회에 모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의 예배드림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여러분이 이미 너무 잘 아시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3절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언제 드렸는가에 대하여 “세월이 지난 후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이 말은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는 2절의 말씀과 연결되어 세월이 지나 가인과 아벨이 장성한 후의 어느 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원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런 의미보다는 아벨이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과 연결되어 양치는 일과 농사하는 일을 마치는 날에 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왜냐면 원문을 직역하면 3절의 세월의 지난 후라는 부분이 “그 날들의 끝에..” 라고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즉 가인과 아벨은 자기들의 농사를 마치는 끝 날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당연히 아벨은 양치는 목동이었기에 양 새끼를 잡아서 제단에 올려 태움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자신이 농사하는 자였기에 당연히 농산물을 드렸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받고 안 받고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의 진술들로 보아 아마 불로 응답하셨을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아벨의 제단에는 불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음에 대하여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불만을 표출하였습니다.
5절에 보면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는데 원어상 직역하면 “심히 분하여 얼굴을 떨구었다”입니다. 그의 분노는 결국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한 하나님께 대한 분노였습니다. 분에 못 이겨 혼자 치를 떨고있는 모습입니다.
동생 앞에서의 열등감에 의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얼굴에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어떤 분풀이도 못하자 결국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동생 아벨을 쳐죽임으로 표출하였습니다. 그러므로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그리고 모든 악한 자들의 표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셨나 하는 질문이 당연히 나옵니다.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불신앙의 예배였습니다.
가인의 예배가 불신앙의 예배였다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히 11:4절에서 아벨의 제사를 언급하면서 가인의 제사를 언급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히 11: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드린 예배에 대하여 한 사람의 제물은 받으시고 한 사람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데 히브리서 기자가 그 받으신 사람, 즉 아벨의 제사를 소개하면서 그는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제사는 믿음 없는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롬 14:23절에 보면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없이 드린 예물이었기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중심의 예배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제사를 드려야 할 의무와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실수에 의하여든 환경에 의하여든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없는 예배를 드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고 해서 화를 내고 분을 낸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없는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았다면 회개하고 다시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예배의 중심이 자기만족을 위함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증거가 없자 심통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에 참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야 할 사실입니다.
가인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중심의 예배였다는 것은 그가 드린 제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단지 땅의 소산이었다고 했습니다. 땅의 소산을 드리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어떤 해석가들은 가인의 예배는 땅의 소산으로 드린 피 없는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이 드렸던 제사는 추수 감사 성격의 감사제였습니다.
율법이 선포되어 제사법이 확정된 후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꼭 짐승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드렸습니다. 속죄를 위해서는 짐승의 피를 드려야 했지만 감사제 성격의 제사에는 곡물로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제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5절에 보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 그 사람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가 순수하게 하나님에게 감사하여 제물을 드렸다면 제물이 무엇을 드렸든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셋째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심령이 아니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심령은 어떤 심령입니까?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시 51:17절에 말씀하였습니다.
상한 심령이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자신의 비천함과 넘어지고 쓰러진 모습을 발견하고 어찌할꼬 하고 가슴을 치는 모습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상한 심령입니다.
가인에게는 이 같은 상한 심령이 없었습니다.
땅의 열매로부터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나 자신의 모습의 비천함을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겸비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하나님께 의무적인 제물 드림의 행위를 끝내고 하나님께 불만과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의무감에 매여 안 바치면 저주와 재앙이 올 것 같아서 십일조를 마지못해서 바치고... 조금 어려운 일만 생기면 하나님이 왜 복을 안주냐고 불만하고 불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상한 심령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비천하고 무능력하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배할꼬 ..... 이 연약함으로 어떻게 주의 무한한 능력을 나타낼까...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보다 제물을 드리는 그 심령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혹 예배는 잘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 같거들랑 가인처럼 분노하고 시험들지 말고 회개하고 다시 드리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것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하나님이 받으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예배는 당당하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히 엎드려짐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힘입기를 간절히 사모하여야 합니다.
(박재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