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창 15:1-6)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창 15:1-6)

본문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창 15:1-6)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살렘 왕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고 승리의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린 후에,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과거 믿음의 조상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하여 어떻게 위안을 찾고 소망을 얻었는지를 증거 합니다.

1. 먼저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는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이 때는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큰 전쟁을 치른 후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음이 분명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승리 뒤에도 여전히 미심적인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비록 이번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적군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어쩌다 생길 수 있는 우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은 일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고대 전쟁처럼 활과 칼을 주로 사용하는 재래식 전투에서 매우 적은 숫자로 대군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창대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얻은 승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북방의 그돌라오멜이 생각하기에는 아브라함의 공격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든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그돌라오멜이 아브라함의 공격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든 것으로 여긴다면, 분명히 그돌라오멜은 아브라함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서 단단히 벼를 것이며, 그는 빠른 시일 내에 보복 공격을 시도할 것이 분명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아브라함으로서는 차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만약 북방의 그돌라오멜이 보복공격이라도 한다면 분명 아브라함은 그 공격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본장 2절에서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말에는 혹시 그돌라오멜이 보복공격이라도 해 온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준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치른 큰 전쟁이 다른 한편으로 그돌라오멜의 보복공격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진 두려움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로 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언약의 계승자다운 태도는 아닙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보면 시간이 흐르면 굳었던 아스팔트도 떨어지고, 단단했던 건물도 노화가 되는 것처럼, 사람들의 결심도 시간이 흐르면 시들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지금까지 가나안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많은 재물을 얻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아브라함의 상황에서는 크게 희망적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북방의 그돌라오멜의 위협이 있고, 지금 자신의 재물을 상속할 자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곧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시들어 갈 때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확실하고도 분명한 약속을 하심으로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두려움을 완전히 해소할 뿐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두려움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나는 네가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안전하게 보호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였고, 또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에 나갔을 때에도 너를 지키고 보호하여 큰 승리를 거두게 하였던 너의 방패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신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큰 위안이 되고도 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신다는 사실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일차적으로는 그돌라오멜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에서 건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위협이 온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와 전에 그돌라오멜을 무찌르고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앞으로 너의 방패가 되어 너를 보호하시겠다고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씀은 “나는 너의 방패라”하신 말씀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의 방패라 하심으로 아브라함을 온갖 두려움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에 대한 두려움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에 대한 두려움이 해소되었다고 해서 그가 여전히 소망이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아무리 재산이 많을지라도 그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미래가 없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 중에서 하나가 후사가 될 것입니다.” 라고 반응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반응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이렇게 쫓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후사를 주시지 않으셨으니, 이제 몸은 더 늙어가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신 약속은 내 집에 있는 종들 중에서 제일 충실한 엘리에셀에게나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반응에는 아직도 인간적인 판단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 아무리 좋은 약속이라도 그것을 받을 후사 곧 자식이 없으니 다 무슨 소용입니까? 종들에게나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브라함의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후사가 없는 기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상급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을지라도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래에게 그것이 무엇이 소용이 있으며, 또한 아무리 많은 재산과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상속받을 자식이 없으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아브라함의 이러한 상황을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당한다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여 하나님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실제로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믿는 성도들이 신앙과 현실 속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신앙을 마치 상상 속에 미로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이 현실 속에서 벽에 부딪칠 때, 신앙은 정신적인 것이며, 실제적인 삶에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장차 천국에 갈 때나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삶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마치 정신적인 수양을 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이렇듯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싸여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를 보호하는 방패일 뿐 아니라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상급이 되신다는 것인데, 이것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아브라함에게 큰 상급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3. 그러면 여기서 지극히 큰 상급은 무엇인가?

그것은 후사 곧 자식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본장 3-4절에는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기를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하였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상급이 후사 곧 자식이라는 것은 다른 성경 곧 시편 127:3절에서도 증거 합니다. 그 말씀에 따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앞으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인데 그 상급은 곧 자신에게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후사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양자를 들여 상속자를 잇겠다고 했던 것을 반박하시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양자를 들일 때가 되었다고 말한 것에는 그가 하나님께서 일해 나가시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으로 이제 더 이상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시점에서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인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사람은 행여 자기 자신을 모르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은밀한 속내까지도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거나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자신의 방법대로 이루어 가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4).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친히 자식을 낳게 하여 그를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일은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보다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 비록 아브라함 한 사람이지만 장차에는 큰 민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상급을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는 앞으로 이루실 일을 아브라함에게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를 이끌어 밤하늘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들을 볼 때마다 그분의 약속을 떠 올리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확실한 보증서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불안감을 한 번에 해소할 수 있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을 아브라함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보증서 그대로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었을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믿었다고 증거 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믿는 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약속을 주신 분이 그 약속을 이행하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 또한 약속한 그대로 지키실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자체가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며, 또한 만약 믿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된 내용을 누리지 못하는 큰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연한 믿음을 어여쁘게 보셔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이에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큰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모든 삶의 희망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증거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심에는 바로 나는 바로 너의 미래이며 소망이라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5. 물론 과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약속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켜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 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이렇게 증거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뜬구름을 잡는 그런 종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현실과 동떨어지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환상을 좋아하고, 무엇을 보기를 좋아하며, 순간 사람들을 쇼킹하게 하는 뉴스를 들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신앙을 황홀감 속에서 단순한 어떤 감정 정도로만 느끼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과거 아브라함과 같이 약속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우리에게 비췬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믿지 않습니다. 이 약속이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구원에 이르렀으며, 이 구원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이 기쁨이 바로 복음의 기쁨이며 이 기쁨을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누리고 장차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바이블i)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