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살아있는 교회 (시 110:1~3, 눅 7:11~17 )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청년이 살아있는 교회 (시 110:1~3, 눅 7:11~17 )

본문

청년이 살아있는 교회 (시 110:1~3, 눅 7:11~17 )
- 설교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이태백’이란 현대어를 아시지요? ‘이십대 태반이 백수다’는 말이랍니다. 어쩌다 이런 말이 다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백수들의 애환을 얘기하면서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너 취직했니?”란 말이라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이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이런 현실에서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어떤 말씀을 해야 할지 주저되기도 합니다. 우리 어른들, 젊은이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세요. 그리고 청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잘 지켜나가기를 바랍니다.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어느 마을을 들어섰을 대에 어느 집에서 ‘쿵쿵’하는 소리가 나더니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되풀이되는 소리를 듣고 그 집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속옷만 입은 채 달려와 의자에 걸어놓은 바지를 향해 돌진하다가 마룻바닥에 떨어져 신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집의 문을 노크하였습니다. 젊은이가 나오자 물었습니다. “뭐하시는 겁니까?” 이 젊은이는 “바지를 입는 중입니다. 점프해서 그 안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고, 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너무 고통스럽네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젊은이에게 “사람들은 한번에 다리 하나씩을 끼워넣습니다”하고 바지 입는 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바지 입는 광경을 보고 이 젊은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가 있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도전정신을 가지고 사는 이것이 젊은이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후나이 유키오는 ‘셀프 매니지먼트’에서 “일단 도전해 보고 실패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전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떤 일이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젊은이는 꿈을 꾸고 도전을 해야 할 자격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비전의 사람이 가져야 할 VACS가 있다고 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비전(vision)에 모험(adventure)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challenge)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자는 분명한 대가를 지불(sacrifice)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꿈속에 도전을 담는 영혼의 용기입니다. 도전정신을 잃어버리면 젊은이는 죽습니다. 젊은이가 죽으면 슬픔을 줍니다.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청년이 아름다운 것은 도전정신 때문입니다. 젊은이에게는 아직 실패가 없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청년에게는 실패라고 하기엔 너무 짧게 살았습니다.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아직 실패는 없습니다. 실패라고 하는 것은 성공을 향한 도전이며 또 하나의 경험일 뿐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란 성경의 말씀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새벽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슬은 은혜의 상징입니다. 새벽이슬은 성경에서 은총 가운데 은총입니다. 호세아 14:5에는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슬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고요한 은혜의 상징입니다.

청년은 이슬 같아야 합니다. 청년은 은혜로워야 합니다. 청년이 짐스럽고, 젊은 아들, 딸이 십자가이고, 청년이 귀찮으면 죽은 가정이고 죽은 교회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생활 습관이 다르고 문화 코드가 달라서 ‘새벽이슬’ 아니라 ‘밤안개’ 같아요. 새벽이면 멍하고, 밤이면 말똥말똥해요. 밤이 돼야 머리가 잘 돌아가는가 봐요. 아무리 문화가 달라져도 청년은 우리 가정의 은혜요 교회의 은총의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청년이 있다는 그 자체가 좋은 일입니다.
청년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청년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청년이 죽으면 어머니에게도 예수님께도 염려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죽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보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죽은 상태는 부모님에게는 불효가 됩니다. 나라에는 불충이 됩니다. 예수님께는 불신이 됩니다. 청년이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 청년들이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청년이 살아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3절 상반절에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라고 합니다. 청년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 것이 주께 헌신하고, 주께 나아오는 전제이며 조건입니다. 옷은 마음이며 자세입니다. 거룩한 마음 자세를 가진 청년들이 살아 있는 청년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옷은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입니다.
옷은 거룩해야 합니다. 성경은 제사장의 옷을 거룩하게 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 모두의 옷이 거룩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도덕의 옷은 더럽기 그지없습니다. 매일 더러워진 옷을 빨아야 합니다.

겉옷을 갈아입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이 변함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검소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별로 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지저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모르지만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도서 9:8에는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흰 것은 정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하늘나라의 색입니다. 흰 옷은 그만큼 단정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로마서 13:14에는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거룩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옷에서 그리스도가 보이게 하라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죽은 후의 옷에 대해 신경과 관심을 끄십시오. 죽은 다음에는 옷이 필요 없습니다. 옷은 살아 있는 사람의 장식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세마포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백만 원, 수천만 원짜리의 수의가 죽은 몸에는 사치일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살아있을 때의 옷을 거룩하게 하는 일입니다.

학개 2:12에는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옷이 더러운데 닿지 않도록 항상 거룩한 옷으로 구별된 옷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지난 주간의 신문에는 ‘망하는 기업의 특징’에 대하여 났습니다. 망하는 기업은 우선 화장실이 지저분하답니다. 그리고 사내가 항상 지저분하고, 정리 정돈이 엉망이고, 잦은 마라톤 회의를 하고,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고, 불친절한 직원이 많고, 상하 위계질서가 없고, 임원교체가 빈번하고, 사장은 툭하면 외출하는 회사라고 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화장실이 지저분한 교회가 망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화예모’가 있습디다. “화장실을 예쁘게 하는 모임”이라고 합니다. 희망적인 모임이지요. 그런데 우리 모두의 마음이 깨끗하면 화장실은 절로 깨끗해질 것입니다.
시편 119:8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합니다. 주의 말씀만 있으면 청년이 깨끗해집니다. 우리 모두가 거룩한 옷을 입게 됩니다.

C. S. 루이스의 대표작 가운데 ‘스크류테이프의 편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스크류테이프는 악독이 가득한 고참 악마입니다. 이 늙고 영악한 고참 악마는 한 젊은이의 영적인 삶을 파괴하는 과업을 가지고 있던 이 악마의 조카 웜우드에게 충고의 편지를 보냅니다. 자신들이 방심한 탓에 젊은 기독교도가 된 그 남자가 자신의 일생을 그리스도의 일생으로 간주하는 것을 확인하라고 충고합니다. 젊은이들은 우리를 더럽히려는 악마의 동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악마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거룩한 옷을 입고 깨끗하게 자신을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신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둘째, 즐거이 헌신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무엇을 합니까? “즐거이 헌신하니”라고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 까닭은 즐거이 헌신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할게 뭐가 있습니까? 거룩한옷을 입고 할 일은 거룩한 일 밖에 없습니다. 즐겁게 헌신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저는 주일이면 꼭 ‘클러지 칼라’라고 하는 성직자복을 입습니다. 목은 옛날 노예의 쇠고랑을 상징하여 하나님께 노예로 매여 있음을 상징합니다. 이 예복 자체가 헌신을 뜻합니다. 놀러 갈 때 이 옷을 입고 갑니까? 놀러 갈 때 이 옷은 불편합니다. 이 옷 입고는 어디 가서 큰 소리도 못 칩니다. 이 옷 입고는 어딜 가나 싸움도 못합니다. 옷이 거룩하면 마음과 행동도 거룩해집니다. 거룩하게 입으면 즐겁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것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거룩해야 받으십니다. 깨끗해야 받으십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준비도 다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손이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청년 여러분, 헌신하십시오. 문자 그대로 몸을 드리세요. 우리의 몸과 시간과 물질,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헌신의 기초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헌신입니다.
로마서 12:1에는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저는 이 말을 조금 바꾸어서 권합니다. “그러므로 청년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권하노니 너의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진정한 예물이니라.”

몸을 드리는 자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헌신하는 자입니다. 예배가 곧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헌신입니다. 몸은 자꾸 써야 좋아집니다. 몸을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몸은 쓸수록 단련이 되고 건강해집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을 아시지요? 우유를 배달하는 배달민족이 되세요.

사찰과 교회가 이웃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늘 찬송을 하고 너무 시끄러워 사찰의 스님이 염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표가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가서 조용하라고 권할까 했지만 아무도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 스님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젊은이가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젊어서 힘이 있을 때에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젊은이가 마땅히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가 나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가 나설 수 있도록 사기를 꺾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헌신하려고 하지만 바칠게 없다고 할 청년이 있습니까? 한국 초대교회에는 ‘날 연보’라는 게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울 때에 드릴 것이 없어서 일주일에 한 날을 봉헌하는 제도였습니다. 특히 시골에서 성행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혹은 이틀씩 교회에 나와서 몸으로 봉사했습니다. 요즘은 몸으로 봉사하라면 돈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날 봉사’할 기회가 왔습니다. 돌아오는 토요일 22일에 우리 교회가 대청소의 날로 정하고 온 교우가 함께 나와서 청소하는 날로 정하였습니다. 모처럼 날 봉사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12에는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할 것도, 바칠 것도 많습니다. “나는 헌신할 것이 없다, 바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하더라, 내가 없어도 되더라” 이런 말씀 아예 하지 마십시오.

헌신하려고 하지만 능력이 없다고 할 청년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를 아십니까? 숨겨진 개인의 능력을 끌어내어 극대화시키는 리더의 코칭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입니다. 뛰어난 조각 기술을 가졌던 그는 자신이 만든 상아로 된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가 그의 간절한 소망에 감동해서 결국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헌신할 마음만 있으면 자기 속에 있는 능력은 개발될 수 있습니다.

헌신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없다고 할 청년이 있습니까? “다음에 하지, 차차 하지 뭐”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전도서 11:10을 유심히 들으세요.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는 잠깐입니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최근 발표한 ‘11분’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즐거운 언어의 유희를 맛보게 합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말합니다. “삶은 아주 빠르다. 삶은 우리를 천국에서 지옥으로 데려다 놓는다. 단 몇 초 상에.” 그리고 또 말합니다. “잘 못 살 사치를 부리기에는 삶은 너무 짧거나 너무 길다.” 청년은 잘 살아야 합니다. 청년의 때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도, 잘 못 사는 것도 다 사치입니다.

“있을 때 잘해” 아십니까? 유행가 제목인데 그 노래는 모르지만 제목은 알아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패러디하고 싶네요. “젊을 때 잘해.” 찬송 302장 1절의 가사를 잘 보세요.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젊을 때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힘입니다. 시간입니다. 몸입니다. 그리고 생명입니다. 젊은 생명이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는 청년들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주께 나아와야 합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고 합니다. 새벽이슬이 청년의 상징입니다. 청년 여러분, 여러분이 새벽이슬입니까? 새벽에 이차 삼차가 아닙니다. 새벽이슬은 주께 나아오는 청년의 모습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무의식중에 어디로 갑니까? 주께 나오십시오. 주께 나오면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주께 나오면 새벽이슬이 됩니다.

전도서 11:9에는 말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미래의 길이 정해지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의 길이 있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께 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입니다. 젊은이들이 갈 데가 많아집니다. 전에는 아버지 때문에 부자가 만나지 못했지만 요즘은 젊은이 때문에 부자가 못 만납니다. 가야할 곳이 너무 많습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세상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께 나오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성공 비결입니다.

‘레미니센스’란 말을 아세요? 인간의 기억 속에 저장된 내용은 그 직후보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더 명확해진다는 말입니다. 10시간동안 공부하는 것 보다 2시간씩 5일에 걸쳐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공부만 하는 사람보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기억합니다. 일만 하는 사람보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 훨씬 일의 효율성이 높습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공부를 더 잘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주께 나오는 청년이 구름같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런 구름 떼의 환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얼마 전 신문에는 최근의 난지도가 생태계의 보고로 변한 모습을 보도하였습니다. 쓰레기장이었고 더럽고 냄새를 풍기는 곳이었지만 가꾼 지 2년 만에 난지도는 동식물의 천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 등이 서식하고 식물이 276종, 곤충이 119종류, 야생조류가 20종, 양서 파충류가 5종이 증가하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희귀한 황조롱이, 말똥가리, 오색딱따구리, 맹꽁이, 두꺼비, 족제비, 고슴도치, 고라니 등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죽은 난지도가 생태 환경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잘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잘 가꾸면 죽은 것도 삽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가꾸지 않으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을 보세요. 얼마나 대견합니까? 가꾸지 않으면 죽은 듯이 보이지만 잘만 가꾸어주기만 하면 희귀한 존재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잘 가꾸어 죽은 청년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희망이 있는 청년들로 가득 찬 종교계의 보고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신 한 마디에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청년이었고 잠시 후면 무덤에 묻힐 청년이지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꾸기만 하면 잠시 후에 무덤에 들어갈 청년도 일어납니다.

우리 청년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어나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고, 주께 나오는 청년이 되어서 청년이 살아 있는 소망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