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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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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과 동거 말씀 : 시 33:1-8 (20080525)     인간은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 둘째 합리적이고 이성 주도적인 사람. 셋째 성령 주도적인 사람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가장 고상하고 깊은 삶이다. 이러한 삶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존귀한 삶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 마음, 철학, 심장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나는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우리의 일상에서의 사건, 사실,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성령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외부의 환경에 행복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행복이 있다. 성령주도적인 사람들은 내면적으로는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족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밖으로는 노래하고 사람들을 세워주며 살리는 말을 한다. 이런 인생이 진정으로 잘 사는 인생이다. 믿음의 조상들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 비결이 있었다. 그들이 성령 주도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시 33편은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
시 33:1-3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 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찬양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사람이다. 여호와를 즐거워하여 수금과 비파로 찬양을 한다. 새 노래로 하나님 만남 감격으로 고백적인 찬양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드러내고 간증하는 사람으로 부르셨다. 하나님 만난 감동과 간증이 우리 삶을 채워야 한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는 이러한 간증을 가지고 와서 새 노래로 주님을 높여야 한다. 삶의 전리품들을 서로 내놓을 때 감동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동의 찬양에는 기쁨이 있고 눈물이 있고 춤이 있다.
바울의 경우 행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찬양했다. 힘들고 어려워도 찬양하면 옥문도 열리고 나를 괴롭히는 모든 사슬이 끊어진다. 찬양은 기적을 가져온다.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찬양하면 역사가 일어난다. 찬양을 하면 귀신과 병마가 물러가고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소생된다.

2. 말씀으로 살리시는 하나님
시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말씀으로 만드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통치하신다. 역사의 종말에 심판을 받게 될 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지금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잘 살려면 말씀의 원리와 흐름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세상의 어떤 계획이나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우리의 심비에 새기고 우리의 생활가운데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격언을 남겼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 성경을 읽는 것이다. 늘 읽던 성경이지만 오늘 이 시간에 성령 안에서 역사하는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된다. 말씀 안에 살 때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고 말씀 안에 살 때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 되길 원한다.   ================================================================================   ================================================================================  사람을 나눌 때 대략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사는 육체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육신, 건강. 외모, 환경들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욕구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높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삶을 추구하는 이성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내면세계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지식을 추구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이런 것은 자기 내면세계 속에 있는 것을 일구고 가꾸기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이것은 첫 번째 육체 주도적으로 삶을 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더 심오하고 깊은 풍요로운 삶은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장 심오한 인생은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는 성령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성령 주도적인 인간 이런 사람은 가장 고상하고 깊은 삶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또 무얼 해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본질을 찾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우리가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까지 인정받을 수 있는 깊은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롬 8:9절에 보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산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철학, 하나님의 심장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기능은 감당하면서도 성령을 무시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기능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의 정신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처럼 행동하고 성령의 가슴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한다는 겁니다. 성령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대적하고 비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해 버리면 성령과 오히려 역행하는 삶의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어떤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떤 환경적인 요건, 어떤 사건, 사실이 아니라 그 사건, 그 사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속사 지향적 시각이라고 배웠습니다. 구속사 지향적 시각,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지금 내게 주어진 이런 환경들  ‘틀림없이 무슨 뜻이 있을텐데’ ‘하나님이 무얼 돕기 위해서 이런 일을 배열하셨나’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환경도 좋고 여러 가지 좋은 여건 속에서 살고 있지만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그 인생이 불행한 겁니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는 것만큼 외적인 요인들이 제공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할 줄 알면 그때부터 인생은 신령한 삶, 성령주도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건강이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돈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또 사회 속에서 적합한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갖춰졌다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밖의 이런 요소보다 더 중요한 내 내면의 모습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감사할 줄 알고 또 왜 이런 사건을 배열하셨는지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해 보고 이렇게 되면 외적인 조건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게 아니라 내 내면세계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다 행복한 여건들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요셉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또 쓰임 받았던 많은 종들이 환경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고 불행이 있었지만 우리 내면속에서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형성했을 때 환경도 이기고 그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죽일려고 했을 때에도 끝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성령 주도적인 삶을 사는 사람 하나님과 필, 사이클을 맞출 줄 아는 사람은 건강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시 33편에 보면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이루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 시 33:1-3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 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찬양하는 삶 노래하는 삶이 있다는 겁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만난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 거룩한 생명을 영생으로 가진 사람, 주님을 노래하는 사람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코드가 맞으면 필이 같으면 너무 행복한 겁니다.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고 흠모할 때 즐거운 마음이 있는 것처럼 수금으로 비파로 찬양을 하라 최선을 다해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바이올린으로 찬양하라. 클라리넷으로 찬양하라. 플롯으로 찬양하라. 이렇게 했었겠지요? 우리의 모든 방법 우리에게 주신 도구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새 노래라는 말은 새로 만든 노래라는 그런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노래라는 겁니다. 자기 노래, 자기 노래라는 말은 남이 만든 노래는 별 가치가 없고 내가 만든 노래만 소중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자기 간증 자기 노래라는 겁니다.  찬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울면서 찬양을 합니다. 그냥 입으로 부르는 사람과 울면서 부르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자기 삶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최근에 위기를 거쳐 오면서 하나님의 터치로 자기를 보호했다고 하는 이런 간증이 있는 사람은 찬양을 그냥 부를 수 없습니다. 가슴이 울리고 눈물이 나고 느낌으로 가슴으로 느낌으로 깊이 느끼면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간증이 있는 찬양, 자기 삶의 고백이 있는 찬양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입니다. 사43: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랬습니다. 노래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간증하고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른 가난한 사람을 부요할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 쓰기도 버겁기 때문에 줄 것이 없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보다 행복해야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한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소개할 수 없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고백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의 일과 속에 그 분과 밀어를 나누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동행하는 삶의 간증으로 나올 때 그 노래가 고백으로 나옵니다.  제 기억 속에 아주 인상 깊었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딸이 하나인데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면서 아버지가 특송을 하는데 이 아버지가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객들이 같이 우는 거예요. 신랑이 마음에 안 들어서 우는 것일까 아니면 딸이 아까 와서 우는 것일까 그냥 아버지의 그 눈물 흘리는 축가에 다 감동을 받아 버린 거예요. 노래가 아니잖아요. 틀림없이 저 아버지가 그 딸을 기를 때 얼마나 사연이 많았을까 죽을 위기를 넘겼을까 위험이 있었을까 아니면 저 딸 하나를 키우면서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았을까 보니까 그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간증이고 삶을 지금 말하는 거예요. 그걸 하객들이 다 듣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고백이 있어야 하고 간증이 있어야 하고 자기 삶이 있어야 합니다. 찬양할 때에 어떤 사람은 울면서 찬양을 합니다. 그게 새 노래에요. 새 노래, 자기 삶에 주님과의 교감이 있기 때문에 맞아요. 주님 이거에요 바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입술로 부르는 노래하고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느낌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이 그냥 찬양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간증이 있고 소감이 있어야 합니다.  새 노래로 노래하라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간증입니다. 간증,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는 무언가 간증을 가지고 와야 됩니다. 구약 시대에 양이나 소를 제물로 갖고 왔던 것처럼 내가 누린 그리스도를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그리스도를 그것을 간증하는 겁니다. 제물이 없이 오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주님과 교통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행전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죽도록 얻어맞고 거의 실신 상태에 있을 때에 둘이 깨어나서 둘이 찬양을 합니다. 그랬더니 옥문이 열리게 되고 모든 쇠사슬과 착고가 다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간수가 찾아와서 회개하게 되고 빌립보에 첫 교회가 출발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찬양하면 옥문도 열리고 나를 괴롭히는 것들을 끊어버립니다. 찬양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캄캄한 감옥과 같은 곳에 있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노래하고 찬양하게 되면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찬양하면 귀신도 물러가고 병마도 떠나갑니다.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소생됩니다. 병 고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찬양의 능력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똑같은 고통을 당해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악한 사람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비판하고 원망하지만 선한 사람은 고통을 당할 때 겸손함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을 찾고 감사함으로 기도한다. 똑같은 바람이 불지만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꽃들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바람이 부느냐 불지 않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느냐 행복한 가운데 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사람이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 상황에 대해서 이 사람이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결과가 나타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모든게 의심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보입니다. 내가 누구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환경의 문제, 누가 나를 괴롭힌다. 도움을 준다. 사건이 어떻다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누구냐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모든 삶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찬송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 찬송은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적인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있고 경건한 생활, 성숙된 삶, 말씀 안에서 훈련 받는 삶을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삶의 간증이 나오는 것이 찬양입니다. 새 노래로 노래하고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 교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말씀으로 경험합니다. 말씀으로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회복시키시고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4-7절에 보니까                    
2. 말씀으로 살리시는 하나님 시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           운으로 이루었도다.” 시 33:7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           도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역사의 종말에 우리가 심판을 받을 터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원칙, 말씀으로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때문에 지금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식으로 살게 되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고 내가 이런 목적으로 만들었고 세상의 구속사는 이렇게 흘러갈 것이고 세상의 마지막은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그 원리가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때문에 말씀을 아는 사람은 영원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고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마7장에 보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습니다. 할 때 내가 밝히 말하되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얘깁니까?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과의 말씀과의 관계, 말씀에 복종하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이 자기 의, 자기 생각으로 이런 것이다. 그런 것이다. 했을 때는 그 일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주인과 관계없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6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을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면 말씀 가운데 살게 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 됩니다. 10-11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의 도모는 계획이라는 말로 심판은 생각이라는 말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의 생각대로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 생각을 이해하고 사는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그는 그 꿈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꿈에 천국으로 들어갔는데 줄을 서서 쭉 들어가는데 자기는 큰 수레를 끌고 들어가더라는 겁니다. 자기가 쓴 많은 책들을 수레에 실어 가지고 천국 문으로 갑니다. 문 앞에 수문장 어르신이 계시는데 베드로드래요. 베드로 사도가 이제 문 앞에서 칼 바르트를 보고 니가 누구냐! 저는 스위스 바델에서 온 칼 바르트입니다. 어? 내가 너를 잘 알지 들어가라. 수레를 끌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이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안 됩니까? 이건 내가 성경 연구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서 내가 쓴 책인데 이거 안 됩니까? 안된다. 성경 말씀 외에는 이걸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걸 꼭 가지고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너도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더라는 겁니다. 깜짝 놀라 가지고 꿈에서 깼습니다. 일생을 두고 이 일로 고민을 한 겁니다. 도대체 무얼 의미할까 이 말이, 고민한 결과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세 가지로 해석을 했습니다. 말씀이 뭐냐 했을 때 말씀은 첫째 선포된 말씀, 두 번째 기록된 말씀, 세 번째 성육화된 계시된 말씀, 세 가지로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안 된다 했는데 그 말씀이 뭘까 첫 번째 선포된 말씀이라는 의미가 뭡니까? 구약부터 신약까지 하나님의 말씀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모든 말씀을 선포된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문서화 시킨 것이 성경이지요? 기록된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 말씀의 원칙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성육화 되셔서 이 땅에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 칼바르트의 세 가지 형태의 말씀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현대적으로 해석을 해 봅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고 있는 이 말씀은 선포하는 말씀, 제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설명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케리그마 라고 합니다. 받든지 안 받든지 그냥 전달하는 겁니다. 선포하는 거지요. 기록됐다는 것은 여러분의 심비에 새겨져야 합니다. 지식으로 그냥 아, 좋은 말씀이다가 아니라 맞아! 저렇게 살아야 돼! 삶의 원칙, 가치관으로 우리 속에 새겨져야 합니다. 임프린팅 되어야 합니다. 각인되어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 그것이 일주일 동안의 생활 가운데 대부분의 삶 속에서 일생을 통해서 성육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삶으로 인격으로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말씀에 대한 개념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록된 말씀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의 선포하는 말씀이 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새겨지지 않고 삶으로 성육 화되지 않으면 죽은 말씀 지식의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 그 말씀만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대행자로 세워줄 수 있는 무기가 됩니다. 칼 바르트는 계속 이런 좋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겁니다. 늘 들었던 말씀 늘 읽는 말씀인데 내가 말씀으로 설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겁니다. 성경을 나한테 갖다 끌어 맞추는게 아니라 내가 성경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성경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을 찾을 때 그 말씀이 내게 들려오고 깨닫고 감동으로 내게 각인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가 하나님의 심판이 오직 말씀으로 지금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말씀 안에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대행하는 것이며 통치자로서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되어지고 마음에 각인되어지고 삶으로 드러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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