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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감춰진 재림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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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오 목사 (대구서현교회)



2008.04.07 요한 속에 감춰진 재림신앙

요한복음 21:18-23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고, 신약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로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성경의 사건, 인물, 역사 등을 해석할 때 예수 신앙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발견하고, 이 복음 속에서 구약의 율법과 종말의 예언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의 기록에서도 우리는 예수 신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여러 곳에서 함께 주님에 대한 공동의 경험을 나눈 사이면서도, 그들의 일생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점이 많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주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무학자요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두 사람 모두 급한 성격 면에서 닮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고의 귀를 잘랐고, 요한은 예수 일행을 배척하는 마을을 불로 멸하여 버리자고 했던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여러 장소, 여러 장면에서 함께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각기 받은 바 사명이 달랐습니다.

성경학자 바클레이는 말하기를, “요한복음은 최후로 교회사의 두 인물인 베드로와 요한을 들고 있다. 이 두 사람 각자에게 예수께서는 직분을 주셨다. 베드로의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먹이는 일과 최후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일이었다. 반면에 요한의 직분은 예수 이야기를 증거하고 장수하여 평안한 가운데 죽는 일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초림 사역이 있고, 재림 사역이 있습니다. 비교하여 말한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초림 사역의 특징을, 요한은 재림 사역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문자적인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요한의 생애는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요한의 일생은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마지막 때를 알리는 강렬한 재림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 속에 감춰진 재림 신앙을 듣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시대는 초림 신앙, 즉 베드로 신앙에 머무르고 있어서는 안 될 때입니다.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들로 인해 타락한 영적 폐허 위에 요한을 파헤쳐 재림신앙의 꽃을 피워야 할 시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요한 속에 숨겨진 재림신앙을 찾아 확인하고, 자신의 재림신앙을 더욱 굳게 다지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요한을 머무르게 하신 의미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 갈릴리 호수에 오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신 후, 베드로와 단 둘이 대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제자의 사랑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제자의 순교를 예언하셨습니다.
18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지금 베드로는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르고 있었고, 이 때 요한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갑자기 요한의 미래가 염려되었습니다. 주님에게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1절).

22절은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베드로에게는 순교할 것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요한은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십자가 초림의 맥을 따르도록 하신 주님은 요한에게는 이 땅에 머물러 종말에 될 마지막 계시를 받도록 의도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사역을 맡기셨고, 요한에게는 땅에 머무르게 하여 종말의 계시를 전하는 재림사역을 숨겨 놓으신 것입니다.
베드로 신앙을 초림 신앙이라 한다면, 요한 신앙은 재림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집필한 시기는 A.D 81-96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치세 말기, 황제 숭배가 강요되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던 때입니다. 대부분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당국에 잡혀 순교당하거나 선교지에서 순교의 제물이 된 이후에도 주님은 요한만큼은 죽지 않고 머물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A.D 64년경 네로 황제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고, 요한은 A.D. 90년경 94세까지 장수하여 계시록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절(22절)의 예언을 성취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요한의 삶 속에 ‘살아서 변화되는 재림의 모습’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실제로 요한은 유배지 밧모 섬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을 봅니다.
계 1:16-17=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주님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았습니다. 요한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종말의 때, 장차 이루어질 재림의 엄청난 비밀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일생이 상징하는 것을 초림신앙이라 한다면, 요한의 일생은 한 마디로 재림신앙을 상징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시대의 최대 비극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베드로의 특징인 초림적인 십자가만 생각하고 요한 속에 감춰진 재림신앙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시대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재림신앙과 요한계시록은 많은 수난을 당해왔습니다.
종교개혁의 선봉이었던 쯔윙글리는 “계시록은 성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흥미도 없다...나는 하고자 하면 그 증언을 물리칠 수도 있다 ” 라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까지도 “계시록에서는 기독교가 교시되지도 않았고 인정되지도 않고 있다. 또한 성경의 영감도 느껴지지 않고 있다”라고 혹평했습니다.
A.D 363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는 회칙 제 60조에서 신약의 정경은 계시록을 제외한 26권으로 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종말에 될 일을 기록한 계시록을 파괴하기 위해 동분서주해 온 마귀의 입김을 느낍니다. 그러나 끝내 계시록을 닫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요한을 머무르게 하신 것은 계시록을 기록케 하셔서 이땅의 교회들이 종말신앙, 재림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복음의 방향이 분명합니다. 초림 당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이셨고, 사도들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때는 기독론이 중심이었고,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는 루터와 칼빈을 통해 구원론, 교회론이 중심이 되었고, 타락한 중세 교회를 깨우는 데에는 웨슬레를 통한 성화론이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더욱 암흑으로 빠져들자 요나단 에드워드를 통한 미국의 대각성운동, 챨스 피니와 무디 등을 통한 회개와 성령운동이 일어나 죽음의 시대를 살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라오디게아의 마지막 시대를 이끌어 갈 복음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바로 요한을 통해 기록된 계시록의 종말론이 그 해답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과감히 외쳐야 합니다. 재림신앙이 없는 시대는 반드시 타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재림 신앙의 때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신앙도 중요하고 믿음의 기초를 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베드로적인 초림 신앙만 알고 요한의 재림 신앙에 눈 감겨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요한을 머무르게 하신 주님의 의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시대가 끝나면 대환란이 오고 이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제 요한을 통하여 마지막 계시의 음성을 들읍시다.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 ‘요한 신앙’과 ‘베드로 신앙’의 대비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제 베드로와 요한을 비교하며 주님께서 주신 각자의 사명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요한의 장래를 알고자 한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 라고 힐책의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우리 각자의 사명을 따로 정하시고 우리가 그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는 초림적 사명을 주셨고 요한에게는 재림적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 신앙’을 십자가 초림 신앙이라 한다면, ‘요한 신앙’은 재림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1)부르신 현장에서의 차이 :
마4장에 보면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고(18절),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을 때 부름 받았습니다(21절).
영적으로 볼 때 그물은 교회입니다. 이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우연히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업 이야기가 아니라 찬란한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다가 부름을 받은 것은 초림사역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물을 처음 던질 때는 고기뿐 아니라 쓰레기나 잡동사니까지 끌려 들어옵니다.
초대 교회 때에 물고기 그림은 성도를 상징하였습니다. 지하 동굴인 카타콤에는 사도들을 큰 물고기로, 일반 성도들은 작은 물고기로 그렸습니다. 교회에는 참 성도뿐 아니라 악인도 깡패도 다 들어옵니다. 모든 것이 초림사역의 특징과 같습니다.

요한이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재림 사역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물을 깁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으로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림 때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로서 철저하게 만들어집니다. 그물을 깁는다는 것은 교회를 수선하여 처음 신앙으로 회복시키고 재림을 준비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속에 감추어진 재림 신앙은 흠과 티가 없는 신부로 만드는 종말의 최종 신앙입니다.

마 13장의 그물비유를 보면 물고기 속에 감추인 영적 비밀이 번득이고 있습니다.
47,48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그런데 이것은 고기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 이야기 입니다.
49,50절=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요한 속에는 마지막 때 택한 자와 심판 받을 자를 구분하여, 택한 자들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재림 신앙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재림 때 열매 맺게 하는 목회의 비밀이 요한 속에 담겨 있습니다. 종말 재림의 때는 구원의 그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요한의 그물 깁는 맥까지 가야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교회마다 그물 깁는 재림 신앙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되고 힘들더라도 종말의 재림 복음과 같은 강한 것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깨워야 합니다.

2)받은 계시의 내용의 차이 :
베드로가 받은 대표적인 계시는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는 복음의 시작에 관한 것이었고(행 10:9-16), 요한이 받은 계시는 장차 될 일에 관 것이었습니다(계 1:19; 4:1).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베드로에게 동물 환상을 세 번 씩이나 보이셨습니다. 보자기에 싸서 먹으라고 한 것들이 레위기 11장 말씀으로는 부정한 것으로서, 먹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먹으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영적으로 볼 때 동물들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들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드로의 계시는 초림 사역을 통한 이방인들의 구원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비하면 요한의 계시는 종말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들입니다.
계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요한의 계시는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종말의 될 일을 말하지만, 적용적으로 개인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초림계시를 넘어 재림 계시가 열려지고 있습니다. 2000년전 요한에게 임하였던 계시가 이제 마지막 때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처럼 암흑의 시대를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독립과 강성한 국가로의 도약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환란의 시기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배경이 유럽연합(EU)을 통하여 조성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로 대표되는 음녀의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브라데 전투가 일어날 수 있는 세계대전의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합니다. 요한의 재림 계시를 모르면 우리의 신앙도 미완성 불량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조그마한 환란의 바람 앞에서도 쉽게 불씨가 꺼져버릴 신앙으로는 종말의 시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눈을 떠야겠습니다. 영혼의 창문을 열고 요한의 계시 속에 감춰진 찬란한 재림 진리의 태양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3. 요한의 사랑과 재림 신앙

요한의 별명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각별히 받은 사랑의 제자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직접 가르치고 실천한 사랑의 제자입니다. 요한의 제자가 ‘선생님, 오늘 무슨 말씀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제자가 찾아와 ‘선생님, 오늘도 말씀해 주십시오’ 했더니 계속해서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라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재림신앙은 최후의 가장 지극한 사랑의 맥을 보여줍니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사랑이 아니면 구원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재림 신앙의 깊이는 사랑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사랑은 또한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 속에 감춰진 사랑의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처음 출발할 때에는 베드로적인 신앙으로 출발할 지라도 마지막은 요한적인 재림의 신앙, 아가페 사랑을 통하여 목숨을 줄 수 있는 신앙에까지 다다라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 신앙의 특징이 이처럼 아가페 사랑을 강조하는 데 있다면 베드로 신앙은 오히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에게서 성령의 이적과 능력을 볼 수 있다면 요한에 감춰져 있는 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인 재림 신앙의 순교적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쳤던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한 번 설교했을 때 삼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 하체를 쓰지 못하던 장애인을 믿음으로 일으키는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물질 속인 것을 영으로 알고 꾸짖었을 때 그들이 그 자리에서 죽어 넘어졌습니다. 8년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말씀 한마디로 일으켰고, 심지어 죽은 사람 다비다를 살리기까지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능력을 표적과 기사라고 한다면 재림 신앙을 감추고 있는 요한은 믿음의 종착역인 사랑의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맥인 재림신앙은 고전 13장 사랑의 단계에까지 가야 합니다.

고전 13:1-2=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리 오래 충성하며 봉사해 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요한의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의 극치까지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도착해야 할 재림신앙의 정상은 어디일까요? 바로 사랑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 정상의 죽음을 요구하셨습니다.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처절한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찬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꽃의 향기도, 교향악의 선율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이나 경력이 믿음의 결론이 아니라 이런 사랑을 가슴에 품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사랑은 육과 이성으로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죽을 때만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의 삶을 살았고, 우리의 사도 바울도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초기 신앙 때는 교역자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봉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요한 속에 감춰진 순교적 사랑이 들어간 이후에는 스스로 변화되어 구역봉사도 주일학교 봉사도 찬양봉사도 하게 됩니다. 교사의 직분을 맡아도 그 일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신앙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요한의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죽는 것이고 직분을 감당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고전 13:9-10=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부분적인 것은 방언, 예언, 병고치는 은사 등 초보적인 것들이고, 온전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완성적이요 결론적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들은 폐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재림의 때요 개인 신앙적으로는 완성된 사랑의 신앙입니다. 표적만 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호롱불 아래서 글을 읽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달려갈 것입니까? 요한의 사랑이 담고 있는 완성적인 신앙의 결정체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요한 속에 감춰진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재림신앙의 사랑이 있어야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단계를 높여야 합니다. 처음 표적의 단계에서 말씀의 단계로, 그리고 마침내 사랑 실천의 단계로 우리의 신앙의 수위를 높여야 합니다.

주일 예배만으로 만족하는 단계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종착역인 사랑의 단계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요한 속에 숨겨진 재림 신앙, 사랑의 맥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달려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요한의 재림 신앙 속에 숨겨진 사랑의 실천입니다. 나의 믿음은 과연 어디까지 와 있는가? 살펴봐야겠습니다.

고전 13장까지 가야합니다. 우리가 기필코 정복해야 할 모리아산이 고전 13장입니다. 요한의 사랑은 실천하는 사랑이요 목숨까지 내어 줄 수 있는 죽음의 사랑입니다. 믿음의 최종단계까지 도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요한을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종말의 계시를 보여 주셨고, 요한의 삶을 통하여 로마의 무서운 박해의 폭풍 속에 처해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재림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신앙의 초보에서 벗어나 높은 수준의 단계로 들어갑시다.
요한 속에 감춰진 재림 신앙의 비밀을 벗깁시다.
요한의 재림 신앙 속에 펼쳐진 찬란한 사랑의 맥을 붙듭시다.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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