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세 단계 (Three Stages of God's Grace)
본문
열왕기상 19:19-21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오직 은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가장 듣기 고마운 단어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맛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아들을 주셨고, 우리 모두는 그 아들의 희생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여 자주 쓰러지는 우리를 성령님 보내주셔서 다시 일어서도록 격려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나 사건, 교훈들을 살펴보면 은혜에도 여러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의 성격 면에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은혜가 있는가 하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은혜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은혜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시골의 농부였던 엘리사가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만나 일생이 바뀌는 이야기입니다. 짧은 글이지만, 이 속에는 평범한 한 사람이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주의 종으로 부름 받는 과정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엘리사에게 임한 은혜의 단계가 분명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받은 은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주님은 나를 어느 단계로 이끌고 계시는가?
자신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의 단계를 생각하며 깊이 감사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엘리사가 스승을 만남 (적용적해석: 만남의 은혜 단계)
19절=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시골의 평범한 농부에게 찾아온 첫 번째 은혜의 단계는 만남의 은혜 단계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람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와 만나 준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사역을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남의 은혜는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엘리사는 뜻밖에도 엘리야 선지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위대한 선지자를 만나게 된 것은 엘리사 입장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령하신 대로 엘리야가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16절= “너는...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엘리야 선지자는 주님의 명을 받들어 요단 강 가 아벨므홀라로 찾아가 엘리사를 만납니다. 19절을 다시 봅시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주의 종이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밭에서 소들을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열두 겨리 소’ 라는 말은 열 두 쌍의 소를 가리킵니다. 24마리의 소를 이끌고 밭을 갈았다고 하는 것은 엘리사가 상당한 부잣집 자제였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입니다. 넓은 밭을 소유하고 있는 큰 부자가 손수 한 겨리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엘리야를 이을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만남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구레네 시몬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길에서 참으로 우연히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후일 그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로마교회에서 저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막 15:21). 그의 아내는 사도 바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롬 16:13). 바울은 말하기를,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를 대신 짐으로써 새로운 생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온 가족이 성경의 인물로 기록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시몬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열심히 그물을 던지며 일하고 있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 일하다가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의 사도가 되었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주님의 전기 작가가 되었고, 순교자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예수께서 친히 삭개오를 부르시고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것이 삭개오가 큰 구원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주님이 찾아와 주신 기회를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가장 최근에 나의 삶 속에 찾아온 주님의 만남의 은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때 나는 어떤 마음의 자세로 주님을 대하였습니까?
엘리사에게 찾아온 은혜의 첫 단계는 만남의 은혜 단계였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의 첫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고, 되새기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동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스승의 부름에 따르기로 결단함 (적용적해석: 결단의 은혜 단계)
19, 20절=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시골청년 엘리사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는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선지자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행동에는 자신의 뒤를 이어 선지자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도 엘리야의 마음을 즉시 읽었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사는 스승의 부름에 따르기로 굳게 결단했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두 번째 단계인 결단의 은혜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만남의 은혜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 더욱 필요한 것은 결단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요한 기회를 만났다 하더라도 결단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취한 결단의 모습을 봅시다.
20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던지자 엘리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는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가족들과의 간단한 작별 인사조차도 간곡한 어조로 허락을 구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신약시대 당시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사람들의 요구(눅 9:59-61) 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입니다. 그들이 부친의 장례문제나 가족과의 작별 문제를 거론한 것은 현세적 삶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면, 지금 엘리사의 청원은 현세적 삶을 깨끗이 정리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행동은 오히려 엘리야를 놀라게 한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무엇을) 행하였느냐?” 선지자는 시골청년의 결연한 의지를 보고 놀라면서 기꺼이 허락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쓰던 농기구를 불태워서 소 두 마리를 삶아 가족과 이웃에게 잔치를 베풀어 먹게 하고,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스승 엘리야를 따라 갔습니다. 단호한 결단입니다. 자신이 사용하던 농기구를 땔감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농부로서의 삶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좀 따라 다니다가 재미 없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것을 다 정리해버리고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결단의 은혜 단계를 멋지게 통과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빌라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인자로 계실 때 유대 총독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마주 보며 대화하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지만, 예수께서 죄 없으신 것을 알고도 양심대로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예수님이 옳다고 느꼈지만 총독의 위치를 지키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나간 2000년 동안 빌라도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으로 수억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저주받아 왔습니다.
헤롯이 또한 그랬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을 감옥에 잡아넣었으나 요한의 외침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막 6: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헤롯에게 있어 하나님의 사람 세례요한과의 만남은 놀라운 은혜였지만, 헤롯은 그 은혜의 기회를 올바른 결단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만남의 은혜는 결단의 은혜를 거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 주님의 십자가 양편에 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는 결단의 은혜가 어떠함을 선명히 보여줍니다. 두 강도에게 동일한 만남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누어졌습니다. 한 강도는 주님을 향해 조롱하고 저주하다가 그가 일생에 지은 죄 위에 하나님의 아들을 욕하는 죄를 더해서 저주의 대상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강도는 만남의 기회를 다시 없는 축복의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을 옹호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의 결단은 옳았습니다. 그는 결단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났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결단을 내리는 것이 진실로 필요합니다. 더 높은 은혜의 단계로 올라갑시다.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지시하시는 대로 결단을 내리는 단계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제야 그 만남이 내게 더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3. 스승의 뒤를 이어 은혜를 전함 (적용적해석: 전달의 은혜 단계)
엘리사는 굳은 결심으로 스승 엘리야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섬겼습니다. 스승의 모든 것을 배워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받은 바 그 은혜를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전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스승에게서 갑절의 영감을 받은 후에 스승 못지 않은 큰 일을 많이 했습니다. 후세 사가들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를 이적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는 선지학교를 통해서 많은 생도를 배출했습니다. 아람군대가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독이 있는 음식에서 독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문둥병 걸린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고쳤고, 아람의 하사엘에게 벤하닷의 후계자로 될 것을 알리고, 다메섹의 왕조를 개변시켰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업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두 선지자의 이별 때에 보인 것과 같이 스승에 대한 완전한 충성으로 그것을 완성했습니다. 엘리야가 시작한 구원의 역사는 엘리사에 의해 매듭지어지고 완성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이처럼 온 이스라엘의 구원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그가 죽을 병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 앞에 나와 울면서 고백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후 필요한 것은 그 은혜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적으로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도록 인도하는 전달의 사명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재산과 명예와 권세를 물려주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복음의 씨를 잘 심어 신실히 믿게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과 친구,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은혜를 더욱 많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적으로, 그리고 전 한국교회가 복음을 알지 못하는 민족과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달의 은혜를 더욱 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진젠도르프(Nikolus Zinzendorf, 1700~1760) 백작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는 어떤 박물관에서 쉬타인 벡이 그린 주님의 십자가 그림을 보고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그림 앞에서 말뚝처럼 몇 시간 동안 서서 움직이질 못했습니다. 그 때 그는 주님을 만나는 만남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 후 진젠도르프는 변화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온 생애를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를 통해 모라비안 교파가 생겨났습니다. 이 교파를 통해 세계 선교가 엄청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레도 있었습니다.
기도와 영성으로 그려진 쉬타인 벡의 그림이 진젠도르프의 영혼 속에 전달되어지고, 진젠도르프의 마음 속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전달되어지고, 이들을 통해 은혜가 온 세계에 미쳤진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초기에 만남의 은혜를 경험한 소수의 신실한 성도들에 의해 복음 전달의 은혜를 크게 받았습니다. 1876년 (고종 13년) 만주 고려문에서 의주의 젊은 상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등이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사업 관계로 만주를 자주 드나들다가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 소속인 존 맥킨타이어 목사님과 존 조스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한국에 선교할 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려고 상인들을 만나 교제했고, 이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고, 이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가을 심양 문장서원 간으로 「예수 성교 누가복음전서」와 「예수 성교 요한복음 전서」를 간행했습니다. 이어서 마태, 마가 복음이 1884년에 나오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 전부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상륜은 성경 번역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서울까지 갖고 다니며 전도활동을 폈습니다. 그는 1883년 처음 성경책을 갖고 귀국할 때 국경에서 두 포교에게 발각되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성경 판매를 시골 깊숙이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일본에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1884년에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끼고 왔을 때 그것이 최초의 한글 성경인줄 알았으나 이미 먼저 번역된 성경이 시골에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 땅에는 이미 성경과 믿음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이 세례의식만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고 했던 것입니다(동아일보 81. 12. 3). 과연 우리 한국교회는 죽음을 각오한 헌신된 국내외 전도자들로부터 전달의 은혜를 크게 받아 누리고 있는 복된 교회임이 틀림 없습니다.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 박원섭 목사님의 설교 중 한 예화가 생각납니다. 아프리카 식인종이 사는 곳에서 선교한 선교사가 6년 간 일하다가 안식년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송별식을 거행케 되었습니다. 그날 식인종 주민들이 그 선교사님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귀국하지 말고 우리에게 잡혀 먹히기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전통적인 전설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좋은 사람을 잡아먹으면 그 자손에 좋은 사람이 많이 난다는 전설입니다. 박사를 잡아먹으면 자손 중 박사가 많이 나고, 목사를 잡아먹으면 그 자손 중 목사가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에게 귀국하지 말고 잡혀 먹히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송별회를 마치고 선교사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잡아먹고 당신들의 자손들이 모두 다 선교사, 목사, 참 신자가 된다면 나는 본국으로 돌아가 내 처자를 만나는 기쁨보다 그것을 더욱 기뻐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잡아먹고 나서 후일 나같은 전도자가 많이 나타난다고만 하면 그 이상 더한 기쁨이 없겠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잡혀 먹히고 이곳에서 전도자의 사명을 다 하겠습니다.” 결국 그 선교사님은 그들에게 잡혀 먹혔지만,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 부족 전체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밀알 비유가 생각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지난 수 천년동안 열매 맺는 과정이 반복되어 내려온 것처럼,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어 온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내려가는 전달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야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은혜 받는 세가지 단계가 있음을 잊지 맙시다.
첫째는 예수님과 만나는 만남의 은혜 단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가 스스로 결단하는 결단의 은혜 단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발적이고 신실한 결단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우리가 받은 바 그 은혜를 전달하는 전달의 은혜 단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느냐가 아니고 받은 바 은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전달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때 우리의 받은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집니다.
이 거룩한 은혜의 기회를 놓지지 말고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순오 목사 (대구서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