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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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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자!
김은영 목사 [성경본문] 에베소서 1:3-6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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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기쁠 때에도 노래를 부르고 슬플 때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세상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 노래 안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져 있음을 알 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쁠 때에도 또 슬플 때에도 그리고 삶이 지쳤을 때에도 노래를 부르고 또 노래를 듣습니다. 노래 없는 세상이란 마치 앙고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같고,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Weber, Max, 1864.4.21 ~ 1920.6.14)는 ‘음악은 인간의 참된 언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버는 음악이 인간의 참된 언어인 까닭은 참된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신자들이 사는 세상에 세상 노래가 있다면,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 사는 신앙세계에는 신앙의 노래가 있으니, 곧 찬양이요 찬미입니다. 성경은 찬양 또는 찬미를 ‘입술의 열매’라고까지 극찬했습니다(히 13:15).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으신 그 까닭도 실상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사 43:21). 시편 기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다 아도나이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시 150:6). 또 시편 기자는 성도는 마땅히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시 40:3).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으신 까닭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성도들이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에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을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노래로 아도나이 하나님께 노랬다고 출애굽기 15:1에 기록되었고, 그 때 그들이 부른 노래 가사가 1절 후반부터 18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여인들이 손에 소고(小鼓: 작은 북)를 들고 아도나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가대가 조직되어 예배 때마다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그 연주에 맞추어 찬송을 불렀습니다. 신약의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예배 모임에도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행 2:47).
이와 같이 찬미와 찬양은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게 되고 , 더하여 신앙의 위로와 활력을 얻게 될 뿐 아니라, 찬양이야말로 곡조 있는 기도가 되어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게 되고 그리고 성령 충만함까지 받게 되는 그야말로 기도와 함께 신앙의 가장 강력한 2대 병기라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은 사도 바울이 밝혀 주신 ‘하나님 자녀 됨의 비의(秘義)’에 관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밝혀 준 전언(傳言)에 의할 것 같으면, 저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택함을 받은 것은 먼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실만한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아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뻐할만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2:3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를 자녀 삼았다고도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예정(豫定)하심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언제 예정하셨느냐 하면,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녀 삼기로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4). 참으로 놀라고도 또 놀랄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어째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느냐 하면 먼저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택하셨다고 했으며(3),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택하셨다고 했습니다(6).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마땅히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의 진정한 신앙적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 내용을 이제부터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찬송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 학자들 말에 의할 것 같으면, 구약에는 350 여회, 신약에는 48회, 도합 400 여회에 에 걸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시편에 보면 찬양을 불러도 되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불러야 하는 필수 사항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찌어다”, “~하라”는 절대 명령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래 성구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시 103:20-21) “능력이 있어 아도나이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아도나이를 송축하라 아도나이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아도나이를 송축하라”
(시 22:23) “아도나이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시 33: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찌어다”
(시 41:13) “아도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이처럼 찬송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본분 중에 분문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에 있는 천군과 천사들뿐 아니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까지(시 148편), 그리고 호흡이 있는 자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함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시 150:6).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함이 성도의 본문 중의 본문임을 깨닫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골 3:16). 예전에 죄인이었던 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 됨의 은총까지 받았으니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에 있어서 찬송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예배란 있을 수도 없지만, 만약 찬송이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경직되고 침울한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성도의 삶이란 예배적 삶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삶 전체가 예배드림의 현장과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을 예배드림에 있어서도 찬송은 절대 필요한 예배의 요소요, 예배를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그래서 구약 예배는 ‘예배의 부름’을 “오라 우리가 아도나이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는 시편 95:1 말씀으로 시작했으며, 신약 교회들은 예배를 드릴 때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고 골로새서 3:16에 말씀했습니다.


둘째, 찬송은 성도의 기도요 신앙고백입니다.

카셀이란 분은 ‘찬송은 가장 고상한 기도의 형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찬송은 기도에 버금가는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전위대(前衛隊)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찬송이야말로 기도 중의 심도 있는 기도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탄원과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는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실상이 이러하기에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지하 감옥에서 착고에 채인 몸임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찬미를 드려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습니다(행 16:25). 또 다윗은 수금을 타고 찬미를 부름으로 사울 왕에게 달라붙은 악신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삼상 16:23).

기도가 항상 잘 되지 않음을 여러분도 이미 여러 번 체험한 바 일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어떻습니까? 찬양을 부르면 어느 순간 기도가 확 터져 나오는 체험을 받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찬송 가사에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는 내용도 있지만, 겸하여 말로 다 고백할 수 없는 사정과 감정을 담은 내용도 있습니다. 찬송의 내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의 창조와 섭리하심의 사역과 은혜를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신앙의 고백까지 다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찬송은 성도들만의 특별한 노래요,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107:8에 “아도나이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야말로 기인한 일 중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편 8:4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하신 말씀대로, 정녕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깊이 깊이 생각해 주시는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어느 분이 말한 바와 같이, 기도는 이 땅에서만 필요하지만, 찬송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토록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우리는 눈을 감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에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기도가 다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더 이상 그 어떤 탄원도, 간구도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한 광경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은 앞서 같 성도들이 하나님 보좌와 그 우편에 앉아 게신 주님을 향하여 면류관을 벗어 드리며 큰 소리로 찬양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3에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 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했습니다.

또 설교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대상은 전적으로 사람, 그것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기도하는 것은 가장 나쁜 기도요 가장 잘못된 기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시장 어귀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들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멋진 기도를 하고 있다고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되고, 너희는 은밀한 중에 보시고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은밀히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조용히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6).

그런데 찬송은 하나님도 움직이고 사람도 움직입니다. 아름다운 찬양 한 곡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대서양에서 거대한 여객선 런던호가 조난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3백여 명을 태운 이 배는 폭풍에 밀려 암초에 부딪쳤습니다. 선창이 파손되어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을 청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배 안은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울고불고 싸움이 벌어지고 미쳐서 고함을 지르는 등 그곳은 마치 지옥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선실 한구석에서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한 소녀의 찬송가(437장)였습니다.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귀 손 못 대고 환란풍파 없도다” 노래의 주인공은 무척 평화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제정신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녀를 따라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노래의 메아리는 온 배에 퍼져갔으며 마침내 대합창이 되었습니다. 사나운 바람과 파도소리를 능가하는 우렁찬 합창이 된 것입니다. 지옥이 변하여 천국이 되었습니다. 절망과 공포에 싸여있던 사람들은 평화를 회복했으며 그들의 얼굴은 밝아지고 안정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이날 살아남은 사람은 이십 명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여객은 노래 소리와 함께 파도 속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게 최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한사람의 노래가 수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세상을 떠나신 옥호열 선교사님은 6. 25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군목으로 계시면서 북한의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식사 후 막사를 한 바퀴 돌다가 화장실에서 어떤 포로 청년이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지”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년. 나는 아시다시피 여기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있는 군목인데 무슨 사정이 있으면 이야기하시오. 내가 도울 테니”라고 말하자. 이 청년은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 아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진실 되게 잘 믿는지 나는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내를 찾으러 교회에 갔는데 예배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보아란 듯이 신발을 신고 뚜벅뚜벅 들어가 제 아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서 예배당 뜰에서 한참 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도 반항하지 않더군요. 이상한 것이 다른 말은 제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내는 아내인데, 교회 나가지 말라는 말은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인민군에 징집이 되어 전쟁을 하다가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군 장교가 나오더니 우리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우고 뭐라고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살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 차례가 되었는데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더니 노래하라고 손짓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찬송가를 압니까. 갑자기 머리 속에 제 아내가 저한테 매 맞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저 살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O. K. 하면서 저를 따로 세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제 아내의 찬미 때문이었습니다.”

시편 22:22에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로다” 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노래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상 앞에서 자기 신앙을 만인 앞에서 외치는 ‘신앙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성도들이 찬송을 통해서 세계와 민족과 이웃과 형제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를 선포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 12:5) “아도나이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진 학대와 핍박 속에서도 원망, 악담, 불평 대신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결과 대적자들이 감동을 받아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고, 결국은 대 로마제국을 복음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찬송은 죄악과 불의로 물든 이 세상에 대한 경고의 외침이며, 구원의 희망의 노래이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신호들이며, 어둔 미래를 밝혀주는 예언자의 소리입니다.


셋째, 찬송은 신앙의 승리를 확신하는 승전가입니다.

베드로전서 1:3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했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가 바로 이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요, 산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앞날에는 ‘실망, 낙심, 포기, 좌절, 사망’이란 단어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소망, 승리, 부활, 영광’이란 단어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은 결코 패배자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찬송은 현실이 어떠하든 개의치 않고 오직 승리를 확신하며 부르는 환희와 확신의 노래입니다. 신세타령이 아니라, 승리를 확신하는 승리자의 노래입니다. 영국 시인 에드워드 영은 ‘찬양은 기도보다 더 거룩하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하늘로 향하게 하지만, 찬양은 이미 그곳에 가 있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찬송은 험하고 어둡고 냉랭한 세상에서 성도의 마음이 방황할 때 그 마음에 새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찬송에는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엘 2:26에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아도나이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뿔 나팔 소리에 맞춰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며 찬송할 때 그 강한 성이 무너졌으며,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 빌립보의 높은 옥문도 깨어졌습니다. 이처럼 찬송은 승리의 원동력이 됩니다.

성도가 찬송을 부른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성도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신앙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욥을 생각해 봅시다. 온 재산을 잃고 자녀와 아내를 잃고 친구들로부터도 업신여김을 당하며 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낙심, 원망 대신 “주신 자도 아도나이시오 취하신 자도 아도나이시오니 아도나이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하며 라며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욥 1:21).
여러분, 욥의 찬송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단의 시험에 대한 승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욥처럼 극악하고 고립 무원한 처지와 운명에 처해 있을지라도 만일 찬송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이미 신앙의 승리자로 하나님께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찬송은 신앙 승리의 표식이요, 사단의 고지를 점령했다는 깃발이요, 악마의 기를 꺾는 함성과 같은 것입니다. 괴롭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사단은 성도의 한숨과 원망 소리에 기뻐하고 반대로 찬송 소리에는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할렐루야!
오늘의 삶이 힘들고 피곤하십니까?
오늘 여러분이 처한 현실이 어둡고 침울하여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치된 어린 양과 같습니까?
악창으로 인하고 고통 받았던 욥처럼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성한 곳이 없어 입조차 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몸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의 찬양을 한 번 들어보세요.
(합 3:16-19)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아도나이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아도나이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의 최선의 찬사요 종국적인 예배자의 아름다움 몸짓과 노래입니다. 저 천국에 가면 찬양으로 온 삶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찬송은 성도의 삶의 표식이요, 특권이며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진실한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크게 찬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경이로운 신령한 복을 크게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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