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굴의 기도 (잠 30:7-9)
본문
아굴의 기도 (잠 30:7-9)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을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기도라는 것은 험난한 세상, 오늘과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막연한 시대에 희망이며 용기를 주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기도로 연결됩니다.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굴이라는 사람은 평생의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제목이 대단하거나 위대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기도제목이지만 그 기도제목을 깊이 묵상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놀라운 기도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굴의 기도를 함께 상고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1. 허탄과 거짓을 멀리하게 하옵소서
허탄이라는 것은 허황된 꿈이나 거짓된 진리를 말합니다. 마치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를 사실로 믿는 것과 같습니다. 사이비 종교나 우상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굴은 자신의 인생이 결코 허탄한 진리 때문에 허비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허탄한 진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파멸하는 귀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후죽순처럼 점집이 생기고 있습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관공서까지 귀신에게 돼지머리 바치고 있습니다. 귀신에게 행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불행을 주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최상의 행복을 누리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의 졸개인 귀신은 지금도 인간의 불행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섬긴다는 것은 마치 강도에게 우리의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려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며, 진정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허황된 꿈을 좇는 자가 아니라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는 것입니다.
아굴은 이웃을 속이는 거짓을 멀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거짓은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거짓의 실체를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자신만은 거짓의 실체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은 거짓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을 속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과 양심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아굴이 거짓을 멀리하게 해달라고 평생동안 기도했듯이 우리도 거짓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충실한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 사실을 숨기려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교묘하게 죽도록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나단에 의해 자신의 정직하지 못한 허물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눈물로 회개하며 시편 51편을 썼습니다. 51:10에서 그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왜 날마다 기도를 해야 하며 기도할 때마다 회개가 필요합니까? 거짓과 불의가 항상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을 살아오면서 이웃에게 거짓된 삶을 살진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되지 못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까? 아굴의 기도는 깨끗한 마음을 구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곧 육체의 본질입니다.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진정한 사랑도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병들면 허황된 진리를 좇게 되고, 자신과 이웃,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 정직했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을 달라고 날마다 기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시고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가난과 부는 극과 극이지만 그 어느 것도 죄와 선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가 선한 사람이거나 부자라고 해서 다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이 있고, 부자 중에도 선한 사람이 있습니다. 9절에서 아굴은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아굴은 여기서 부와 가난의 부정적인 부분을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쓸모없었던 자신의 땅이 개발되면서 수 백 억대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늘 가난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교회에서 철야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할 제목이 없습니다. 돈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점점 나태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자신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자신이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돈이 그의 영혼을 병들게 했습니다.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이 좋았고 매사에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어느 날 IMF가 오더니 거래처가 연쇄 부도로 자신의 사업도 부도를 당했습니다. 은행에서 자신의 재산을 차압합니다.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어느 허름한 달동네 단칸방에서 월세로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 학비는 고사하고 먹고 살 양식조차 없습니다. 일자리도 없습니다. 생각 끝에 경비가 허술한 새마을 금고에 들어가 가짜 총을 들고 강도짓을 하다가 그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소문은 주변에 금방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합니다. “하나님의 믿는 자가 어찌 저럴 수가 있냐?” 그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욕되게 했습니다.
아굴의 기도 요지는 가난과 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가난의 해방이나 부의 욕심을 버리는 궁극적인 목적이 자신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러나 가난과 부도 생각만 바뀌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OECD국가들 가운데 자살율이 상위에 있다고 합니다. 생계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자살 한다기보다 준비되지 않는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던 사람이나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환경의 변화로 갑자기 가난하게 되면 미처 가난을 준비하기도 전에 인생을 포기합니다.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 동반자살을 합니다.
진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북한이나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굶어 죽을지언정 자살하지 않습니다. 6,70년대 우리나라는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그 때 가난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이 드물었습니다. 물론 그 때와는 문화 환경과 삶의 질이 달라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의 차이는 준비된 가난과 준비되지 않는 가난의 차이입니다. 지금 여러분 환경이 가난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무엇입니까? 하루하루의 양식을 말합니다. 광야에서 40년동안 매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십니까? 이들은 내일의 양식을 모아두지 않았습니다. 그날 아침에 내리는 만나로 그날의 양식을 삼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광야에서 하늘만 쳐다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가난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난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억대의 재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평범한 우리는 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난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달동네에 가면 그들에 비해 부자일 수도 있습니다. 부와 가난은 상대적이며 마음의 생각에서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20에 불쌍한 거지 나사로가 나옵니다. 그는 부자 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목숨을 연명했습니다. 그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부자 집으로 들어가서 부자의 재물을 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나중에 죽어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렸습니다. 비록 힘든 지상의 삶이었지만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환경 때문에 절망하거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거지고 누가 보아도 불행한 삶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결코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생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형들의 시기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환경을 탓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자신의 아내와 가족 외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모든 재물은 요셉에 손에 있습니다. 나쁜 마음만 먹으면 많은 재물을 빼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합니다. 보디발이 누구입니까? 이집트 바로의 경호실장입니다. 적당하게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로 말미암아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보디발이나 보디발의 아내,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기에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며 살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자에 대한 아굴의 기도는 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되어 하나님을 모른다고 교만하는 것보다 차라리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영혼에 더 복이 됩니다.
부자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이 가능합니다.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부에 대한 바른 고백이 필요합니다. 준비 없이 부자가 되면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설문조사 기관의 자료에 의하면 복권에 당첨된 자들의 대부분은 이혼을 하거나 가정이 파탄되었다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는 부는 오히려 인생을 파멸케 합니다.
미국의 어떤 농부가 수백 억원의 복권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말하면 농부가 기절할 것 같아서 복권회사에서 신부에게 가서 농부가 기절하지 않도록 복권이 당첨된 사실을 알려주도록 했습니다. 신부가 농부를 만났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복권당첨의 사실을 우회적으로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수백 억의 복권에 당첨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그 때 농부가 웃으면서 “그러면 절반을 신부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부가 기절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재물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없으면 부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독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망치게 합니다. 재산 때문에 형제가 다투고, 심지어 살인까지 벌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이지 않습니까? 부자들이 돈에 대하여 집착하게 되면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진정 행복한 부자는 모든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녀도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녀나 사업이나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한 일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부하게도 말라’는 아굴의 기도는 욕심과 탐욕으로 얼룩진 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 앞에 바른 물질관을 가진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웃을 생각하며 나누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물질을 더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굴의 기도에는 진실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가난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며, 부자가 되어 거만하여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했습니다. 그는 가난도 부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평생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살면서 가난과 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러 번 환경이 바뀌었어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만과 절망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해달라고 지속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환경이 어떻습니까? 힘들어서 절망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환경입니까? 아니면 모든 일이 형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없다고 교만하는 환경입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이 어떤 환경이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눌 것이 있으면 나누며, 섬길 힘이 있으면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큰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진실한 작은 감사의 신앙에서 시작됩니다. 가난해도 감사하십시요. 그러면 부자가 되어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00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