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성탄의 예수 이름의 축복…
본문
이 시간에 “성탄의 예수 이름의 축복 ”이라는 제목입니다. 성탄절은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 베들레헴 마구간에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런데 성탄의 예수님의 이름은 한 개가 아닙니다. 사람은 살면서 별명 등이 증가하지만 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예수, 임마누엘,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의 이름입니다. 왜 성탄의 예수님의 이름이 이렇게 많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주실 은혜를 그 이름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아기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마1:21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셨습니다. 아기의 이름이 예수인 것은 예수가 구원의 뜻이듯 예수님이 오시면 구원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약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구속의 사역을 이루셨지만 우리에게 찾아오시지 않으신다면 결코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 마음이 베들레헴 마구간처럼 어둡고 추하고 싸늘하고 시끄럽기 그지없지만 우리 주님을 모셔야 구원이 있어요. 그래서 요1:12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이 시간에 아직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였다면 구원의 예수님 모시고 구원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아기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마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아기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일까요? 예수님이 계셔야 아버지도 계시고 성령님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라든지 이슬람교라든지 이 사람들은 예수 없는 하나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교리적으로 잘못 되어 예수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제 아무리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도 예수 없이는 아버지를 모시지 못해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하고 싶어도 예수 없이는 성령님도 모실 수 없어요. 이 말씀이 요일2:23에 있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했어요.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오셔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신비한 것입니다.
3. 본문에 보면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입니다.
‘기묘자’란 이상하다, 희한하다, 놀랍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원더풀(Wonder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놀랍다는 것입니다. 원더풀이라고 하니까 옛날에 유행하던 가요가 생각나네요.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원더풀!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이사야가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원더풀이라고 한 것은 신비하고 신비한 분이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신비합니까? 예언대로 오셨으니 신비합니다. 탄생에 있어서도 신비합니다. 처녀가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하다니 가능한 일입니까? 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얼마나 신비합니까? 또 죽으심으로 구원하셨으니 구원의 방법도 신비합니다. 그리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심도 신비하고,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심도 신비하고, 그 악한 사단을 잡으시는 방법도 신비하고, 다시 영광중에 성도들을 거느리고 재림하심도 신비하고 예수님은 온통 신비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살후1:10에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이 기묘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또 다른 기묘한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룩하게 됩니다. 변화되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늘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늘 영광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죽으심과 사심이라는 객관적 구속사도 신비하지만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성화 영화 등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주관적 구속사도 신비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각인에게 오시지 않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적을 행한다고 다 중생한 것은 아닙니다. 축복을 넘치게 받았다고 다 된 것 아닙니다. 그 심령에 예수님이 오셔야 영생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4. 아기의 이름은 모사입니다.
모사란 ‘상담자’(Counselor)라는 뜻입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기묘자와 모사를 합하여 원더풀 카운셀라(Wonderful Counsel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신약에 보혜사라는 말씀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상담해 주시고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 속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충만하면 위대한 일들이 알아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축복을 주실 것을 성경에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사30:21에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라”, 예수님께서도 요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사로 아는 것과 생명으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고전13:12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도 귀한 것이지만 영적으로 더욱 자라시기 바랍니다.
5. 아기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원어로 “엘 샤다이”이지만 여기서는 “깁보르” 즉 ‘힘 있는 용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힘 있는 용사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용어는 대적을 이기시고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죄악과 죽음을 이기시는 탁월하신 승리의 예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 메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에서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히2:14-16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에게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임하시면 죽음도 두렵지 않는 강한 자가 됩니다. 죄악도 이기고, 사단도 이기고, 저주도 다 이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연세 드실수록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슬프지 않고 외롭지 않습니다. 약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강해지면 두렵지 않아요. 그러므로 강하신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6. 아기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왜 성자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이시라도 우리에게는 부성애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존재하시면서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불러도 불러도 아버지처럼 좋은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의 대가도 없이 사랑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가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는 고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14:18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시면서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육신의 고아가 고아가 아니라 예수님이 없는 심령이 고아입니다. 예수 없는 심령은 고아와 같이 쓸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귀하십니다. 그러니까 성탄이란 하늘에서 보물이 떨어진 날입니다.
7. 아기의 이름은 평강의 왕입니다.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했는데 정사는 왕권입니다. 고대 국가의 왕은 흔히 왕권을 상징하는 열쇠를 어깨에 메거나 혹은 금사슬을 어깨에 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왕이 아니라 ‘평강의 왕’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처럼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한 죄목을 씌워 죽이거나 수용소로 보내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이 왕 노릇하시면 고통은 사라지고 한없는 자유와 평강이 찾아옵니다. 왕처럼 다스려 주시기에 어떤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좋은 약이 질병을 잘 다스려 주면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롭습니까? 이처럼 주님의 다스리심은 마음의 평화와 육신의 강건 즉 평강입니다. 그래서 요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기에 그 어떤 불안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아기 예수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 이름 그대로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또 우리 왕으로 온전히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생명 가운데서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성탄의 예수 이름의 축복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변화 받고 가르쳐 주시고 어떤 두려움도 죽음도 대적도 다 이기고 아버지께 사랑 받고 하나님의 평강으로 넘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