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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 길 다 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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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디모데후서 4: 6 ~ 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나이 많으신 사도 바울 선생은 로마 감옥에서 사형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죽기 전에 한번 만나보기를 간청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띄우면서 그의 일생의 삶을 요약해서 기록했습니다. 바울 선생께서 살아온 평생을 되돌아보고 또 사후의 희망을 말씀한 그 내용이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와 위로가 됩니다.

[본론]
1. 내가 선한 싸움을 이기고
바울선생께서는 첫째로, 내가 한평생 선한 싸움을 싸우고 살아왔다.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바이벌게임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인간의 삶 자체가 생존하기 위한 싸움의 연속입니다.
욥 5: 7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싸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 평안한 보호를 떠나 병균이 득실거리는 세상에 태어남으로 거대한 환경적 변화에 처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8일 동안 가장 생사의 기로에 선다고 말했습니다. 8일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과 선민 계약인 할례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8일전에 죽을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8일이 지나야 그가 한 인간으로써 생존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는 것이 결정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이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생존경쟁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교육, 직업, 의식주, 행복과 부요와 평안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노력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국민일보 5월 17일자에는 우리나라 성인남녀의 결혼관에 대한 조사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너무나 깜짝 놀랄 일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보건복지포럼’ 5월호에 2005년 우리나라 성인 남녀의 ‘결혼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그 결과 조사 발표가 이러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인 남녀 중 51%가 결혼을 안 해도 괜찮다고 응답했습니다. 우리 세대에는 태어나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요사이 젊은이들은 결혼 안 해도 괜찮다는 젊은이들이 51%나 됩니다. ‘자녀가 없어도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34.9%나 됩니다. 결혼과 자녀에 대해, 올해 초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05년 전국 가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한국일보 3월 3일자) 결혼을 해도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 양육 및 교육비의 부담’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20대 청년들 중에는 58.3%가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또한 여성 가족부 조사에서는 우리나라의 모든 연령대에서 부부 갈등의 가장 큰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57%)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입니다. 더구나 경제적인 전선에서의 싸움은 피를 말리는 것입니다. 교육과 직업, 의식주, 행복, 부요와 평안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생존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이 생존경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취업경쟁률도 한가지입니다. 지난 16일 주요일간지들은 올해 신입사원 경쟁률이 평균 91: 1로 집계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채용포털 커리어가 올 1월부터 최근까지 공채를 실시한 주요 기업 67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번 조사 대상 가운데는 취업경쟁률 100: 1을 넘는 기업이 40%인 27개사에 달했으며, 경쟁률이 200: 1 이상인 기업도 9개나 된다고 발표했습니다.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인 기업은 25명을 뽑는 한국공항공사의 공채로 무려 9천 2백 명이 지원해 370: 1의 경쟁률을 기록했으며, 26명의 신입사원을 모집한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역시 337: 1의 경쟁률을 기록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오늘날 청년실업률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청년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이루어서 경제적인 막대한 부담을 직장도 없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우리 사회 오늘날 일자리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정부와 자율단체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일자리 산출에 전력을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하고 나누어 함께 잘살기 위해서는 먼저 일자리가 많아지고 세수를 많이 거둘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하루속히 우리 한국사회에 모든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서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일자리를 위한 피눈물 나는 생존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천재지변과 생존경쟁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미국 항공우주국 제트추진연구소에서는 세계적인 ‘사이언스’지(誌)를 출판하는 미국과학진보협회에 이런 연구 결과를 보고했는데요. 그린란드 빙하의 해빙 속도가 5년 전에 비해 약 2배 더 빨라졌는데, 이것이 다 녹으면 지구 해수면이 7m 상승합니다. 그럴 경우 미국 플로리다 해안과 방글라데시 대부분이 물속에 잠기고 우리나라 남해일대의 섬들은 다 수장되고 말 것입니다. 얼음은 햇빛의 90%를 반사해서 우주 밖으로 내보내지만 바닷물은 햇빛을 90% 흡수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해빙에 의해 바닷물이 늘어나면 더워진 바닷물로 인해 지구 온난화가 가속됩니다. 태풍이나 허리케인은 더워진 바닷물의 영향을 받아 더 크고 강력해집니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지구 온난화로 일부 대륙의 기후가 더욱 추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사는 환경이 점점 악화되는 것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온난가스를 배출하므로 지구가 살 수 없는 처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스게 소리로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지구 온난화로 말미암아 삼한사온이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으며, 태풍은 전래 없이 많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강수량도 많이 줄어졌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이 우리가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천재지변, 질병, 전쟁에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끊임없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말씀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며 일평생을 싸워왔다.” 우리가 싸움을 포기하면 그날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생활에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나라의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의 힘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인간의 힘에만 의지해서 싸우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의 생존경쟁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 91: 2~ 3에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했으며, 10절에는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잠 1:33에선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아담, 하와 때부터 세상으로 향했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인간의 지혜와 총명,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다가온 모든 붕괴상황이 현재인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붕괴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붕괴, 자연의 붕괴가 오늘날 인류생활의 종말을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해결하기 위한 선한 싸움을 계속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우리지구의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는 싸움을 계속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전쟁을 끊임없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속과 탐욕, 근심, 걱정, 시험, 환난이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시시각각으로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딤전 6:11~12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엡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나태해지면 결국에는 마귀의 밥이 되고 세속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고 말씀을 읽고 두 세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기를 힘써서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끊임없는 신앙의 싸움인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편안하게 생활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세계 도처에 있어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싸움을 되돌아본 바울선생은 고후 11:23~27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선생의 일생은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그가 로마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면서 마지막 죽음을 정면에서 그 생애를 돌아보면서 선한 싸움은 그 일생을 걸어온 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고 이 지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싸움을 인간의 힘으로 싸우면 백전백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선한 목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 앞이 캄캄하고 눈앞이 캄캄해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를지라도 천지를 지으신 주님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아 몸 찢고, 피 흘려 대속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서 같이하여 주셔서 그 지팡이로 길을 열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승리하고 살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생을 살 때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살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순간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모르지 않습니까? 주님의 지팡이가 우리에게 길을 만들어 내시고 주의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그 능력을 의지하면 우리의 싸움은 승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싸움 없이 평안이 인생을 살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악한 싸움을 싸워서는 안 되겠지만 선한 싸움, 생존을 위한 싸움은 끊임없이 싸워야 할 것입니다.

2.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둘째로, 바울선생은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일생을 살아온 뒤안길을 돌아보고 나는 출발로부터 지금까지 머나먼 인생길을 잘 달려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두 가지 길 중 한길을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 7:13~14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길은 넓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길을 살아가는 곳은 절제되지 않은 길이요 방종의 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아주 길이 넓어 보이지만 세상길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가시밭 험한 길이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너무나 좁디좁은 파멸과 좌절과 절망의 길인 것입니다. 세상의 길은 인본주의의 길이요, 거짓된 길이요, 죽음의 길에 불과한 것입니다.
렘17: 5에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길은 넓어 보이고 절제되지 않고 방종한 길이지만 행복한 길은 되지 못합니다. 그곳에는 저주가 따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길을 가는 것은 좁은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해서 살면 생활에 여러 가지 절제와 좌절을 당하기 때문에 좁은 길인 것입니다. 신본주의의 길이요, 참된 길이요, 생명의 길을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은 걸어갈수록 점점 길은 넓어지고 나중에는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14: 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이 있고 내가 택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벌써 하나님은 우리 일생을 예정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하루가 되기 전에 일생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예정된 삶이 있고 또 그 안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될 삶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억지로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벌의 종류는 다윗이 선택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칠년 기근을 당할 것이냐, 석 달을 원수에게 쫓기겠느냐, 3일간의 유행병을 받겠느냐. 다윗이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삼하 24:14~15에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야훼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야훼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야훼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다윗 한 사람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벌 내릴 것을 결정을 했는데 그 벌을 칠년 기근을 당하겠는가, 석 달을 원수에게 쫓기겠는가, 삼일 간 유행병을 당하겠는가? 네가 결정하라. 하나님의 예정 속에 그 결정은 또 다윗이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삼일 간 전염병이 도는 것을 결정하자 그 국민들의 칠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한사람의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으로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삶의 뒤안길을 돌이켜 보면 48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목회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한 길이었습니다. 제가 다른 길을 갈수가 없었어요. 저는 처음 공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그 길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그 길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에는 목회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길을 예정하셨기 때문에 저는 예정의 길에 들어왔습니다만 제가 목회하는 장소가 불광동이냐, 서대문이냐, 여의도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중에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고 난 다음에 불광동보다는 서대문을 택했고 서대문보다는 여의도를 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선택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이와 같이 함께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렘 1: 5에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분, 여러분의 일생을 이미 선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별한 일생 중에서 여러분이 택할 길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롬 12: 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한 가지 하나님이 정하신 길 외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길이 있고 기뻐하시는 길이 있고 온전한 길이 또한 있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생을 크리스챤으로 살게 할 때 여러분 예수를 믿고 담배를 피고 술을 조금 마시고 산다고 합시다. 안 믿는 것보다 좋아요. 그저 하나님이 선한 뜻이지 기뻐하시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예수 믿고 담배도 끊고 술도 끊으면 좋습니다. 그러면 기뻐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온전한 뜻은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주일날 예배 잘 드리고 주님 섬기고 잘사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삶도 있고 하나님이 아 기쁘다. 너 잘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삶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에는 이 세 종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체에는 예정과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한 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인종은 소용이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나 탄식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예정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법적으로는 미국사람도 되고, 영국 사람도 될 수 있지만 인종으로 봐서 여러분 한국 사람이 된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노랑머리를 아무리 물들여도 까만 머리가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별도리가 없어요. 지리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오늘날 그 굶주림 속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우리 아버지, 어머님이 대한민국에서 저를 낳으셨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은 예정인 것입니다. 시대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5천년 역사 중에 오늘날이 가장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 36년 동안에 제가 자랐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6.25사변 때의 비극은 오늘날 안당한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그때에 70, 80된 사람은 너무나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아마 그분들이 요사이 살아나서 대한민국에 현실을 본다면 기절초풍을 할 것입니다. 아마 도로 기절해서 도로 죽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다릅니다. 시대도 여러분 예정되어서 여러분 이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문화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시대의 문화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을 보더라도 우리가 삼국시대에는 불교 문화권에 고려조시대에도 불교 문화권에 이씨 조선은 유교문화권에 오늘은 다양한 문화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시대별 따라 예정된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변화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생애에 예정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원망하고 탄식해야 소용없습니다. 예정된 인생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제 인생이 하나님께서 예정해서 주신 것을 인정하고 늘 받아들이고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정한 인생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뭡니까? 내 인생은 예정되어 있지만 그러나 학업을 하는 것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문학을 할 것이냐, 공학을 할 것이냐, 의학을 할 것이냐, 신학을 할 것이냐. 학문은 자기가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배후자 선택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아내로 삼을 것이냐. 서울 아가씨를 택할 것이냐, 전라도 아가씨를 택할 것이냐, 경상도 아가씨를 택할 것이냐, 나처럼 신의주 아가씨를 택할 것이냐. 자기가 택하는 데에 달린 것입니다. 저도 여러 아가씨들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적이 있어요. 지금은 나이 늙어 프로포즈할 사람이 없겠지만 젊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구요. 내가 하루 이 말을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내가 결혼할 때 운 총각들이 많았다.”고 그렇게 말을 해서 내가 역습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할 때도 배후자를 자기가 택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만하면 되었다. 이것은 참 좋다. 이것 너무 좋다.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가 선택할 때 기도하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다는 상대도 있고 하나님이 기쁘다고 하는 상대도 있고 하나님이 이만하면 온전하다고 하는 상대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직업도 그런 것입니다. 직업도 요사이는 내가 선택할 수 없지요. 직업이 하도 없으니까 원치 않는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고통 중에 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좋은 시절에는 직업을 내가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것도 나의 선택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환경도 내가 서울에 살 것이냐, 지방에 살 것이냐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친구도 선택합니다. 좋은 친구를 선택할 수도 있고 나쁜 친구를 선택할 수도 있고 선한 친구를 선택할 수도 있고 악한 친구를 선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악한 친구를 선택해 놓으면 너무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도 선한 친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동안에 인종이나 지리나 시대나 문화나 부모 등은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운명 지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예정된 인생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 올 것이냐, 안 올 것이냐 여러분이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 7부 중에 2부를 왜 왔어요? 여러분 선택해서 온 것입니다. 우리 지성전이 많은데 왜 본 성전까지 왔습니까? 이것도 여러분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정된 운명은 받아들이지만 선택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백의의 천사로 널리 알려진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이다. 주님, 저도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로 헌신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백의의 천사로 알려졌습니다. 후에 한 기자가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녀는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끝까지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은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백의의 천사로 간호사로 부른 것은 예정된 것이지만 간호사로 살 것이냐, 말 것이냐 결단을 내리는 것은 자기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간호사로써 평범하게 살수도 있고 기쁘게 하고 살수도 있고 최선의 길을 향해서 살수도 있는데 나이팅게일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즉, 온 천하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라는 예정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여 종착지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그가 중도에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로써 부름을 받았으나 로마까지 안갈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받았기에 그 사명을 받아서 시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 기뻐하시는 뜻, 온전하신 뜻 중에 온전한 뜻을 따라 살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선교를 할 때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로마까지 그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향하여 전진했던 것입니다.
고후 1: 9~10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는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 중에 온전한 뜻을 선택해서 끝까지 달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따르는 삶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삶의 종착역까지 달려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세전에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해 두셨는데 이 예정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지만 나는 버리고 세상길로 향하겠습니다 하면 이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해 주셔도 여러분 끝까지 그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사는 것은 여러분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종착역까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빌 3:12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히 3:14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3. 믿음을 지켰으니
셋째로, 바울선생은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전도해도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최근에 아주 참으로 훌륭하신 분을 만났는데 그분을 위해서 김장환 목사님이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그분은 끝까지 믿음을 거부합니다. 저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 김장환 목사가 나에게 목사로써 너무나 많은 호의를 베풀고 선을 베풀어 주어 내 마음이 감동되었지만 신앙을 변경시킬 생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 하나님이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야 예수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화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외부적으로 선을 베풀고 자선을 베풀어도 그것이 효과를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게 된 것을 그렇게 보통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믿음의 선물인 것입니다.
유 1: 3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셔야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마음에 스스로 연구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선물로 주어주신 것입니다.
영국의 위글스워스 목사는 그의 사역 가운데 열네 번이나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굉장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20세기 전 세계에서 성령의 은사를 통한 복음전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위글스워스 목사는 많은 기적을 행했는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때마다 항상 ‘과연 하나님이 역사할까? 안할까?’ 굉장히 마음에 갈등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젊은 친구가 위글스워스 목사에게 “어떻게 그렇게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이에 위글스워스는 마 4:28절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감으로써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생기고 다음에는 열매에 곡식을 맺는 것처럼 자라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보물입니다. 그러나 씨앗이 하루아침에 큰 나무가 될 수 없듯이 우리 믿음도 하루아침에 온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동안 우리의 믿음이 죽은 자를 살리는 믿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말씀 중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릴 때 어떤씨는 길거리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고 다른 씨는 흙이 얇은 바위에 떨어지매 싹이 나다 말라 죽었고 다른 씨는 가시넝쿨에 떨어져서 기운이 진하여 말라 죽어 버렸고 또 다른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매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길거리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길거리는 수많은 사람이 짓밟고 지나가는 무관심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도 믿음을 키우겠다는 관심이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마귀가 그 믿음을 빼앗아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 13:19에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그다음 자갈밭에 있는 믿음은 습관적인 형식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 습관적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아휴, 벌써 주일이 왔냐? 왜 그렇게 빨리 오냐. 성경 어디에 두었느냐. 저 농작 밑에 있냐. 책장 밑에 있느냐. 어디에 있느냐. 좀 찾으라.” 그렇게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믿는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자갈밭에 있는 믿음은 마 13:20~21에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밭 믿음은 탐욕에 짓밟힌 믿음인 것입니다. 마음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가시밭처럼 우거졌기 때문에 탐심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녹아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을 받아 들였으나 그 믿음이 자기의 탐심과 욕심을 충족하지 못하니까 그냥 버려 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22에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옥토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마 13:23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좋은 옥토는 관심을 가지고 의식과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고 탐욕으로 짓밟힌 삶이 아니고 순수하고 헌신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면 믿음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 씨앗이 뿌려진 것 아닙니까? 말씀이 마음속에 뿌려지면 그 말씀을 듣고 이것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놓지 않고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뻐하고 믿고 순종하면 우리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로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현저하게 성장하면 하나님은 믿음대로 역사하기 때문에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고 더 큰 복을 내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셔야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구촌 믿음의 행진에 대해 흥미 있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AD 100년에는 지구촌의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도, 360명 중의 한 사람이 예수 믿었습니다. AD 1000년에는 220명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1500년대에는 59명중 한 사람이, 1900년대에는 27명 중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1980년대에는 11명 중 한 사람, 1990년대에는 7명 중의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믿음의 행렬이 해를 거듭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통계 자료를 보면 2000년에는 지구촌 인구 60억 중 거의 20억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적어도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2천여 년의 인류 역사가 수많은 전쟁과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온 지 100여 년이 흐른 지금, 뒤돌아보면 기독교에 대한 많은 핍박과 박해가 있었지만, 오늘 우리나라 인구 4천8백만 중에 1천 2백만 명이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사 거저 준 선물입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키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믿음의 도를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할 것입니다.

[결론]
바울선생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는 천국에 입성할 날이 가까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한번은 이 세상을 떠나야 됩니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에 너무나 치중해서 자기가 떠날 기약이 다가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주변에 소식이 왔다면 부고가 옵니다. 젊을 때는 소식이 왔다하면 결혼한다는 소식, 어린 아기 돌잔치에 오라는 소식, 그런 것이 오더니만 이제는 왔다하는 소식은 부고장인 것입니다. 왜, 사람은 반드시 한번 났으면 죽는 것입니다.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라는 말씀대로 반드시 난자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선생이 로마 감옥에서 자기 일생을 돌아본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늘 깊이 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일생을 살면서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하나님이 주신 데로 달려가고 믿음을 지켜야 되겠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면 상급 심판이 있습니다. 순교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목회자나 양 무리를 잘 돌본 자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착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의의 면류관을 겨우 천국에 턱걸이로 올라온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면류관이 주어지실 것입니다. 인생은 이 세상살이에서 종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 육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천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곳으로 가야 됩니다.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둘 중에 한곳은 반드시 우리가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할 수 없이 우리가 선택해야 될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을 마칠 때 바울선생같이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이와 같은 담대한 간증을 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이탈하지 않고 잘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땅에 어머니 뱃속에서 떨어진 이후로 인생들은 끊임없는 생존경쟁과 생존하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안 싸울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의지하고 선한 싸움을 낙오자가 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고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고 낙심하고 뒤로 넘어지는 자 없게 도와 주시옵고 주님이 주신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 없이 어여삐 서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언제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갈 곳이 어딘가를 알고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고 우리가 맞이할 죽음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는 마음에 준비를 하고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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