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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읽어 들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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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읽어 들린 말"
느헤미야 8장 1-18절
석기현 목사

저희 부부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을 때 언젠가 성탄 때 펜실베니아 발레단이 공연하는 '호두까지 인형'을 보러 가면서, 같은 교회에 계시던 어떤 할머니 한 분을 함께 모시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전형적인 옛날 시골할머니 같은 분이신지라 그런 문화를 즐기시리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웬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발레이고, 또 평소에 우리 집에 온갖 반찬들을 보내주시는 등 너무 신세 진 것이 많아서 제 딴에는 좋은 구경시켜드린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공연장 좌석에 앉는 순간부터 '아, 내가 잘못했구나.'하는 느낌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날 우리의 좌석은 이층 제일 앞줄에서도 정중앙, 문자 그대로 '로열박스'였는데, 이 할머니께서는 자리에 앉으시자말자 신발부터 벗으시더니 양말 신은 두 발을 2층 난간에다 척 걸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님께서야 더 없이 편한 자세인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저는 차마 발을 내리시라고 말씀도 못 드리고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 자세로 공연 내내 꾸벅꾸벅 조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마 그 '아카데미 오브 뮤직' 홀이 생긴 이래 그 로열박스 난간에 사람의 발이 걸쳐진 날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고, 제가 어디 공연 관람 가서 그날처럼 내내 좌불안석이었던 날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최근에는 아주 즐거운 공연 관람을 했었습니다.
작년 말에 '예술의 전당'에서 독일의 어느 유명한 합창단이 와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했는데, 제가 우리교회의 지휘자 몇 분들과 함께 갔었습니다.
제 평생 처음으로,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분야를 통달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함께 연주회를 감상하게 되니까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연주에 대해서 코멘트 한 마디씩 해주는 것도 귀에 쏙쏙 들어오고 그 멜로디와 화성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느낌까지 서로 속속들이 통하니까, 저의 음악에 대한 조예가 그 하루저녁에 완전히 한 차원 올라가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공연장에 갈 때에는 그 공연을 감상하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람들끼리 함께 있어야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포로생활하던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벽재건의 큰 역사를 이제 막 완수해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던 한 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무슨 공연이나 파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인 특별집회 시간을 통하여 나누게 된 것이었는데, 12절과 17절에서 모든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하였다"라고 누차 강조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참 신기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교인들이 한 시간의 예배조차 지루해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사실인데, 어떻게 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나절 넘게 걸린 긴 예배를 그토록 즐거워하며 모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예배들이 진정 즐거운 마음으로 모이고 드려지기 위해서 꼭 나누어져야 할 영적 공감대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즐거운 예배를 모이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부터가 통해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1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2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끝낸 이스라엘 자손들은 "칠월에 이르러," 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의 신년 첫째 날에 해당되는 칠월 일일, 성경에 '나팔절'이라 불리는 그 날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 모임에는 "남자, 여자" 장년들은 물론이요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즉 말귀가 트이기 시작한 어린이들까지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 성회를 모이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말씀 듣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간절한 심정은 그들이 "새벽부터 오정까지" 즉 대여섯 시간에 걸쳐서 학사 에스라가 읽어주는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에서도 재차 확인됩니다.
요즘 같은 시절에 만약 어떤 목사님이 여섯 시간 동안 계속 설교를 했다면 아마 끝날 때 즈음이면 자리에 남아 있는 교인들이 몇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설교도 아닌, 그냥 성경봉독만을 해 뜰 때부터 정오까지 계속했는데도 계속 청종했을 정도로 말씀듣기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에스라가 율법책을 봉독한 나무 강단은 그의 좌우편에 선 사람들과 함께 무려 14명이 동시에 올라갈 수 있도록 "특별히 지은" 것이었습니다.
성벽재건을 완성한 날이 '엘룰월' 즉 6월 25일이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닷새 동안에 성벽의 문짝들을 달고 또 이런 대형 강단까지 급히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토록 힘들고 큰 공사를 막 끝내고서 몸은 피곤하기 이를 데 없었겠지만 오직 이 특별집회에 말씀을 잘 듣기 위한 일념으로 그처럼 만반의 준비를 정성껏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씀 사모하는 자세는 이제 그 말씀 선포가 시작되는 순간 또 한 번 나타났습니다.
바로 5절과 6절에 있는 대로 "(율법)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선" 것이었습니다.
마치 어른이 오시면 자리에서 일어나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최고의 경외심을 표하면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포로생활 중에서나 예루살렘 귀환 후의 공사기간 중에도 안식일마다 모이기는 했었지만, 이제 바로 그 순간부터 그처럼 정신적으로 쫓기고 육체적으로 바빴던 시절을 벗어나서 완전히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음껏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정말 꿈처럼 행복한 시간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로 우리교회 건너편에 있는 88체육관 앞 보도에서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가끔 보게 됩니다.
무슨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가 있을 때 그 표를 구하기 위해서 아예 하루 전날 저녁부터 길바닥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무슨 청승맞은 짓인가 하겠지만, 그 청소년들에게 있어서는 그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라이브로 듣게 될 것을 상상하면 그처럼 표를 사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부터 이미 그들의 '해피타임'은 시작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그런 청소년들이 가는 콘서트는 그 시작되는 순간, 기다렸던 가수가 무대에 등장하고 'Are you ready?'를 외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완전히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계를 보기는커녕 콘서트가 끝난 후에도 연주자들이 앵콜을 해주어서 그 행복한 시간이 몇 분이라도 더 연장되기를 모두가 간절히 바랄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예배시간 역시 그런 심정으로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단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배시간이 간절히 기다렸던 것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면, 그 갈급했던 심령을 속 시원히 풀고 가게 되는 것이니까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워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배를 즐겁게 드리게 되려면 이미 토요일 저녁부터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시간이 기다려져야만 합니다.

엿새 동안의 노동으로 몸은 피곤할지라도 말씀을 받게 될 기쁨에 설레면서 기도로 준비하고 예물로 준비하는 그 시간부터 이미 우리의 '해피타임'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빈들에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을 시원케 해주실 생명수의 말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며 허기졌던 심령'을 풍성하게 채워줄 영생 양식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세로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성경봉독과 기원을 위하여 함께 일어서는 그 순간부터 진정 기쁨이 충만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며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즐거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말씀에 은혜받는 감정'이 공감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7절 이하 12절까지에 보면 "7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8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12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나팔절의 집회 중에는 또한 성경공부 시간도 있었습니다.
본문 7절에 이름이 언급된 사람들 외에도 많은 "레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깨닫게"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책은 히브리어로 씌어 있었는데, 바벨론 포로생활을 지내는 동안 아람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 언어가 된 까닭에 '통역'도 필요했고 또한 그 뜻을 잘 이해하도록 '해석'도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또 하나의 공통적인 반응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곧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던"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우선 오랜만에 말씀을 듣게 되니까 감격에 겨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 율법을 듣고 나니 자신들의 신앙생활 중에서 그 말씀에 어긋난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로 오랜만에 정말 값진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 때문에, 고향 그리운 마음 때문에, 또 귀환 후에도 여태까지 겪은 온갖 역경과 고난들 때문에 무척이나 울 수밖에 없었던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그들이 흘린 눈물은 그처럼 인생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흘린, 눈물치고는 제일 값진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에게는 진짜 즐거움이 곧 따라오게 됩니다.
바로 9절에서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오늘은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일깨워준 사실이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슬픔과 울음 그 자체가 예배의 최종단계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죄 회개로 인한 애통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가 찾아오게 되고 그것은 즉시 즐거움과 힘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성일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내려주시는 은혜의 전과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 뜻 아니겠습니까?
참된 기쁨은 마땅히 애통해야 할 것을 먼저 애통하고 마땅히 해결해야 할 죄 문제를 선결해놓은 후에야 진짜로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언제 눈물을 흘려보셨는지, 여러분께서 가장 자주 눈물 흘리실 때가 언제인지를 한번 돌이켜보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텔레비전 앞에서 연속극 따위를 보면서, 그 이야기가 순전히 지어낸 픽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 같은 죄인 위해 대신 죽으신 구세주의 실화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빨간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열렬히 응원했던 축구를 졌을 때에는 이 나라의 청년들이 하나 같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힙니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순수한 젊은 남녀들의 가슴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아멘'이라는 감동이 그렇게도 나오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에는 왜 그토록 애통은커녕 소리조차 입 밖에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눈물을 흘리면 '쇼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오늘날의 이 '목이 곧고 마음이 무딘' 세대들의 소리입니다.
저는 부목사님들에게 '설교 중에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감정의 분출을 느껴지는 그대로 다 쏟아놓지 말고 가능한 한 자제하려고 노력하라.'고 권면합니다.
혹시라도 그것이 '값싼 눈물'이 되지 않도록, 교인들은 따라오지 못하는데 목사 혼자만 그 감정에 도취되어 설교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서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는 감정의 표출이야말로 성도들에게 더욱 진실하고 뜨겁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감정이라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좀 반응하고 좀 뜨겁게 공감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 한번 안 울어보면 그 눈물 언제 흘려보겠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복음의 촉구 앞에 한번 통회자복해볼 줄 모른다면 그 감정을 어디에서 제대로 한번 써보겠습니까?
나를 책망하면서도 용서해주고 나를 찢으면서도 도로 싸매어주시는 이 말씀을 '밝히 깨닫고' 진실한 눈물, 값진 눈물을 흘릴 줄 알게 됨으로써, 그 직후에 찾아오는 큰 위로와 용서 가운데서 함께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즐거운 예배를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동'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13절부터 18절에 기록하기를 "13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14율법책을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하였고 15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하였는지라 16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17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18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나팔절 절기를 지킨 후 "그 이튿날"에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또 모였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읽다가 그들이 여태까지 "초막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이란 15절에 나오는 대로, 풀과 잡목들의 가지를 가지고 그저 햇볕과 이슬을 약간 가릴 수 있는 임시 거처를 짓고 거기서 한 주간을 살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렇게 출애굽 당시 광야 40년 동안 고생했던 선조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해봄으로써 이제는 편안한 주택에 안주하게 되었음을 더욱 감사드리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초막절의 규례를 깨닫게 되었던 때는 칠월 이일이었으므로 초막절이 시작되는 7월 15일까지는 이 주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이 간단해서 초막절이지,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그런 초막에서 8일 동안 살아야 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야영을 나가도 집보다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하물며 우리처럼 여러 가지 문화적인 야영 장비도 없던 시절에 그저 나뭇가지 얽어서 만든 햇빛 가리개 같은 것 하나 만들어놓고 거기서 한 주일 이상 지낸다는 것은 몹시도 불편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재건 공사라는 중노동을 이제 막 끝내고 겨우 한숨 돌리려던 참이었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아마 요즘 소위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좋아하는 현대교인들 같으면 "에이, 초막절이란 매년 있는 것인데 하필이면 지금 같은 때에도 꼭 지켜야 할까? 올해는 우리가 이렇게 큰일 하느라고 많이 수고했으니 그냥 넘기고 내년부터 열심히 지키도록 합시다."하고 만장일치로 공동의회에서 통과시킬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핑계하지 않고 당장 "나가서 나뭇가지를 취하여 초막을 짓고" 그 절기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백성들이 이래저래 겹친 일들과 행사들 때문에 다 지쳐 나가떨어졌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크게 즐거워"하였는데 그 즐거움의 강도가 또한 어느 정도인고 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날까지 이같이 행함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 시절 이후로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절을 지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절기를 이처럼 크게 즐거워하면서 지킨 예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바쁘고 그렇게 힘든 중에서도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초막절을 지켰더니, 오히려 전례 없는 엄청난 기쁨이 그들 가운데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표만 사서 들어온 관중은 공연이 끝나면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이후에 백스테이지에 들어갈 수 있는 패스를 가진 사람, 리셉션에 참석할 수 있는 특별 자격이 주어진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부터 동호회 등을 통해서 그 연주자를 위하여 도우미 봉사를 해주었거나 후원자가 되어주었거나 혹은 공연 그 자체의 관계자로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수고했기 때문에 그저 공연 그 자체만 즐기고 돌아가는 관중들로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그들만의 진짜 파티를 그때부터 또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해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따르지 못하는 교인은 이런 진짜 즐거운 자리에까지는 못가고 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처럼 '박수만 치고 떠나는 관중' 같은 교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말씀의 진짜 열렬한 '팬'이라면 주일뿐 아니라 엿새 동안에도 역시 바로 그 '말씀을 사모하는 동호회원'처럼 그 '말씀중심의 활동'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며, 바로 거기에서 남다른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바쁜 시간과 피곤한 육신을 핑계 삼아서 말씀 순종하기를 미루는 나쁜 버릇이 혹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장사가 너무 바쁘니까 오늘 주일만 그냥 빼먹자. 주일이야 뭐 매 주일마다 돌아오는 것인데, 한 주일 쯤 빠진다고 무슨 큰일일까?"라든지, "십일조는 나중에 돈 많이 벌어 넉넉하게 될 때 시작하기로 하고 일단은 보류해두자. 헌금이야 뭐 평생토록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꼭 이렇게 어려울 때부터 해야 할까?"라는 교묘한 논리에 스스로 묶이는 바람에 진짜 축복과 즐거움은 끝내 맛보지 못하고 평생토록 그저 피곤하기만 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육신의 핑계들과 사단의 시험들을 스스로 물리치는 힘과 승리를 맛보고 그래서 말씀의 축복을 생활에서 체험하는 즐거움을 더욱 만끽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공연이라도 혼자 보러 가면 정말 재미가 없고 오히려 처량하기까지도 합니다.
여럿이 같이 가야 더 즐겁고, 더욱이 서로 공감대가 통하는 사람들끼리일 때 그 즐거움은 절로 배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만 예수 믿고 혼자서 따로따로 예배드리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까닭에 즐거운 것이며, 더욱 이들 사이에 말씀중심의 영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 그 즐거움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진정한 즐거움이 점점 더 상실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적지 않는 현대교회들의 현실입니다.
이름을 말씀 드리면 거의 다 알만한 미국의 유명한 어느 신흥 교회의 주일예배에 제가 참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복음성가 몇 곡 같이 부른 후에 사회자가 강단에 올라오더니, "오늘 여기 오신 분들 중에 자기가 제일 먼 곳에서 왔다고 생각되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라고 했습니다.
몇 명이 대답한 끝에 수천 마일 떨어진 주에서 가족방문 차 왔던 사람이 당선되고, 그 사람에게는 즉시 도넛 한 상자가 주어졌습니다.
그런 후에 사회자는 "지금 앉으신 자리 밑을 보시고 'X' 자를 발견하신 분은 손 들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다들 자기 좌석 밑을 보았더니 한 사람 밑에 'X' 자가 그려진 종이가 있었고, 그 사람에게는 그 교회의 어떤 교인이 운영한다는 볼링장에 가서 몇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무료 이용권이 전달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주간에 생일을 맞은 사람들이 다 강단 위로 초청되었고, 온 교인들이 그들을 위해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자 미리 준비된 풍선들 수십 개가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프로그램'들이 매 주일마다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단 한 가지 공통된 것은 마지막에 설교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혀 '복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생 상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이 강단을 온갖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때워보려고 이렇게 애를 쓰지만, 그런 것들은 제 아무리 해봐야 텔레비전 쇼의 재미나 술자리에서의 즐거움을 능가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에서 '말씀'이 읽어 들리지 않고 '말씀'이 해석되지 않고 '말씀'이 깨닫게 되지 않고 그저 그런 세상의 코미디나 흉내 내고 있으니, 애당초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의 공감대가 없는 예배에는 그저 억지 눈물, 어색한 웃음,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참아야만 하는 지루함 - 결국 이런 것들만 남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허튼 우스개 때문이 아니라 말씀이 주는 '기쁜 소식' 때문에 진짜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는 '술 한 잔 돌려야 마음이 통하는' 식의 세상 사교의 자리가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친히 베풀어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 인격과 삶 전체가 기쁨으로 배부르게 되는 잔치인 것입니다.
모일 때마다 '그 읽어 들린 말씀'을 함께 사모하고 뜨겁게 음미하고 충성스럽게 순종할 줄 아는 '알아들을 만한 회중'이 됨으로써, 예배를 통하여 함께 '크게 즐거워하며' '여호와를 기뻐하는 힘'을 더욱 충전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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