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을 축복으로 만드는 길
본문
열왕기하 4장 1-7절
< 가능성을 축복으로 만드는 길 >
어느 날, 스코틀랜드에 사는 한 여인이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돈이 없어 너무 살기 힘들어요.”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인도에서 근무하는 아들에게 아무 소식도 없나요?”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가끔 엽서를 보내요. 그 엽서들을 제 성경책 안에 모아놓고 있어요,”
목사님이 그 엽서들을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엽서는 영국 은행에서 발행한 환전 엽서였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부자입니다! 이 엽서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엽서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성경책 안에 큰 돈이 있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 안에 있는 큰 축복의 가능성을 모르고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큰 축복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축복의 가능성을 어떻게 진짜 축복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축복의 가능성을 진짜 축복으로 만드는 몇 가지 원리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느 날,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였던 한 과부가 빚을 못 갚아 두 아이가 노예로 팔릴 처지가 되자 그 어려운 사정을 엘리사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본문 2절에서 엘리사가 물었습니다.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과부가 대답했습니다.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이 구절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결국 그 작은 ‘한 병 기름’이 과부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원천이 되었는데, 그 말은 아무리 작은 불꽃이라도 성령님이 함께 계시면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작은 불꽃으로 큰불을 일으킨 성령의 역사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몸무게가 50킬로밖에 되지 않은 왜소한 사람이었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자 가장 위대한 부흥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가진 것이 작아도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시작하면 됩니다. 변명과 핑계를 댈 필요가 없습니다. 변명은 ‘거짓말로 가득 찬 논리’입니다. 변명은 시간낭비입니다. 변명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짓말에 세뇌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가진 작은 것을 통해서 얼마든지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질문은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만 가지고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모세의 지팡이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작고 보잘것없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위대한 승리의 원천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과 재능과 인맥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소유와 여건과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도 축복받을 수 있다!”고 끊임없이 고백하고 자신을 격려하며 나갈 때 가능성은 진짜 축복이 될 것입니다.
2.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이 구절에서 엘리사가 과부에게 빈 그릇을 많이 준비하라는 말은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은혜 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꿈은 성취의 어머니입니다. 모든 문명의 이기들도 처음에는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꿈돌이와 꿈순이들이 되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장로님이 신실한 30대 조카 집사에게 거액의 재산을 물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직접 들으면 조카가 “정말이에요?”라고 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질 것 같아서 그 조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먼저 말해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얘기를 듣고 흥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조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10억 원을 주시면 어떻게 쓸 건가요?” 조카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습니다. “그러면 절반을 교회 건축헌금으로 바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정말이에요?”라고 소리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다니면서 아무리 축복의 말씀을 듣고 축복 기도를 받아도 “정말 그럴까?”하고 의심하며 꿈조차 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지 지금보다 찬란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가능성의 실현은 꿈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항상 찬란한 꿈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꿈과 환상은 성령 충만의 표시입니다. 꿈과 환상은 삶에 능력과 지혜를 주고 영육 간에 치유의 역사도 일으킵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 두 척의 배가 동쪽과 서쪽의 정 반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배의 돛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꿈과 비전은 인생의 돛과 같습니다. 그 돛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긍정적인 꿈과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꿈대로 현실도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제일 맘에 안 드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입니다. 그러나 올라가지 못할 나무이기에 계속 쳐다보고 올라갈 방도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처럼 꿈과 비전의 그릇을 준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그릇에 넘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3.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엘리사는 과부에게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고 준비한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놓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믿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말대로 행동하자 준비한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라.” 기름으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라는 말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믿음으로 행동할 때 성령님이 도와주시고, 그때 꿈과 비전도 이루어지고, 동시에 우리의 모든 필요도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가진 작은 ‘기름 한 병’으로 인해 실망하지 말고, 기도할 때 눈앞에 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도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기도하자마자 큰 비가 쏟아진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한 후 사환을 여섯 번이나 보내 바다 쪽을 살펴보고 오라고 했지만 사환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기도해도 소용없다! 이제 그만두자!”고 포기하지 않고 일곱 번째로 또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사환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때 사환이 말했습니다. “선지자님! 저 먼 바다에서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나중에 큰 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손바닥만한 구름 속에서 큰 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헌신과 기도의 날개 짓을 우습게 알지 말아야 합니다. ‘나비 효과’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서울 상공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그것이 점차 증폭되어 미국에 허리케인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자연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믿음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대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진 것이 적다고 실망하지 말고, 일이 뜻대로 안 된다고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고, 안 되는 것에서 되는 것을 보고, 없는 것 중에서도 있는 것을 보십시오. 또한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지 말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문제만 보지 말고 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기도하십시오.
특별히 말을 잘해야 합니다. 안된다고 말하지 말고, 불행하다고 말하지 말고, “이제 끝났어! 이제 소용없어!”라고 자기 입으로 불행과 실패를 예언하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손바닥만한 구름일지라도 이렇게 말하십시오. “하나님! 이 작은 구름 속에서 축복과 기적의 소낙비를 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헌신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비가 내리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 선교사 훈련 학교의 비전 >
저는 1991년 신학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때, 동료 목사님들과 교단 감독 목사님이 다 말렸습니다. 한국에 동역자도 없고, 배경도 없고, 후원자도 없고, 교단도 없는데 어떻게 목회를 할 거냐고 했습니다. 당시 감독 목사님은 켄터키에 있는 작은 한인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좀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꾸 한국 쪽으로 마음이 끌렸습니다. 한국의 신실한 성도를 깨우면 선교의 좋은 자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당시 제가 속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교단에서는 한국에는 이미 기독교가 강하게 뿌리내렸다는 이유로 한국 사역에 관심도 없었고 후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없이 ‘선교사 훈련학교’를 세우겠다는 꿈과 비전만 가지고 홀로 무작정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했지만 한국에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소속 교회로 교회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희 교단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전한 복음주의 선교교단이고, 성결교회와 순복음 교회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일선 선교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목회자 중에서 저희 교단을 아는 분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 목사님들도 저희 교단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없이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길 없는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내는 가끔 저보고 “맨 땅에 헤딩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무술을 한다고 전봇대 붙들고 헤딩연습을 한 적이 많았습니다. “전봇대가 센가? 머리통에 센가?”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철없이 행동했나?”하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치매에 걸리지 않게 하신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살 때도 맨 땅에 헤딩하며 사는 길로 갈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맨 땅에 헤딩을 하면서도 꿈과 비전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15년을 달려서 비록 교회는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약간의 열매도 생겼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문서선교 사역이 점점 커졌고, ‘이한규의 사랑칼럼’도 꽤 알려졌습니다. 미션퍼블릭을 통해 책 출판과 설교파일 공급 사역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고, 교회와 선교회를 통해 나름대로 선교사님들을 많이 돕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언제 선교사 훈련학교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며칠 전, 아프가니스탄의 이영동 선교사님을 만나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이 선교사님은 몇 분의 평신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오고 싶어 하는데 그들에게 평신도 선교사로서 필요한 기본적인 언어교육과 선교훈련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센터도 없는데 어떻게 선교사 훈련학교를 하나?”
선교사님과 헤어지고 계속 그 문제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큰 센터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작게라도 시작해보라.” 그러면서 옆에 월세로 준 스포츠 센터를 내보내고 그곳에서 임시로 선교사 훈련 학교를 시작하면 어떤가 하는 감동이 계속 생겼습니다. 그 공간이 실 평수가 100평이기 때문에 사무실과 강의실 몇 개, 기도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머물 수 있는 원룸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그 공간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는 교회로 쓰지 않고 세를 주어서 종교시설의 고유용도로 쓰지 않았다고 3천만 원 가까이 취득세를 내야 했고, 지금도 매년 건물세와 토지세를 몇 백만 원씩 내야 합니다. 월세 수입은 1년에 1800만원인데 그 수입으로 선교회로 쓰면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내고 나면 교회재정에 별로 보탬도 안 됩니다. 차라리 우리가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무래도 효율적입니다.
이제 금년 10월에 스포츠 센터와 계약이 끝납니다. 그때까지 보증금 6500만원만 마련하면 우리가 쓸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이제까지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선교재정을 선교사님들에게 보냈습니다. 물론 그 일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저희 요삼일육선교회의 선교센터를 위해서도 헌신의 씨앗을 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사랑칼럼 독자들과 지인들, 그리고 인터넷 선교를 통해 말씀에 은혜를 받은 분들과 친분이 있는 목사님들에게 그 비전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십시오. 제가 “다른 선교사님들을 위해 돕자!”는 말은 거리낌 없이 해도 “우리 사역을 도와주세요.”라는 말은 정말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그 말도 담대하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며칠 전에 서울과 뉴욕에 계신 두 분과 그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서울에 계신 분과 지난주에 대화를 하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친한 사람들을 만나도 선교센터 얘기를 도저히 꺼내지 못하겠어요.” 그때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일도 일종의 선교 아닌가요? 담대하게 기도제목을 나누세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저도 기도할게요.” 그 집사님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오늘 설교 시간에 이 기도제목을 나누자고 결심했습니다.
지금 사랑칼럼 독자가 스스로 신청한 분이 약 2500명, 추천받은 분이 약 2000명으로 전체 4500명 정도가 있습니다. 그 외에 인터넷을 통해 게시되는 주일 말씀으로 매주 은혜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 1%만이라도 물질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면 선교센터 공간 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그런 감동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혹시 마음에 감동이 있어서 기도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 헌신에도 동참하실 분은 본당 뒤에 비치된 선교헌금봉투에 ‘선교센터’라고 적어서 헌금해주시고, 인터넷 뱅킹으로 헌금하실 분은 저희 요삼일육선교회의 대표후원구좌(국민은행 284-21-0264-873)로 해주시고 꼭 ‘선교센터’라고 그 용도를 명기해주십시오. 어린이의 오병이어의 헌신을 통해 5천 명을 먹인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여러분의 정성이 기적의 씨앗이 될 줄 믿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100평 공간이 무슨 센터냐? 그게 무슨 학교냐?” 그러나 큰 센터가 없어도 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단의 엘렌버거(Ellenberger) 선교사님이 온누리 교회 선교훈련원 강사로 오셨는데 그런 좋은 강사를 모시면 얼마든지 내실 있게 잘 교육할 수 있습니다. 꼭 이름이 있고 규모가 커야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규모가 작으면 내실이라도 있어야 살아남기 때문에 작은 곳에서 더 내실 있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면도기가 있습니다. 1999년에 교회 중고등부에서 경매로 나온 TV를 작은 전자제품 가게에서 살 때, 가게 주인이 이름 없는 중소기업에서 만든 만 원짜리 면도기 하나를 덤으로 끼워주었습니다. 모양이 볼품없어서 처음에는 시시하게 봤는데 내 평생 그렇게 잘 깎이고 충전 후 오래 사용하는 면도기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2002년에 LA에 계신 아버님 집을 방문했다가 누군가 아버님 차 유리창을 깨고 트렁크에 있던 제 가방을 훔쳐갔습니다. 그때 그 면도기를 잃어버리고 가장 저렴한 카이젤(Kaiser) 면도기를 10만원 넘게 주고 샀는데 먼저 쓰던 1만 원짜리 면도기보다 많이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독일제 면도기를 15만원 주고 샀는데 그 면도기는 모양만 그럴듯했지 이제까지 쓴 면도기 중에서 최악의 면도기였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20만원 주고 일제 히타치(Hitachi) 면도기를 샀습니다. 그 면도기는 꽤 성능은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 만 원짜리 면도기보다는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면도할 때마다 가끔 그 이름 없는 만 원짜리 면도기가 생각납니다.
꼭 규모가 크고 브랜드가 있어야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제 작은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작은 것 때문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큰 불길 속에서 불타오르는 모습보다 작은 불꽃 속에서 불타오르는 모습을 더 기뻐하십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작아도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결국 큰 축복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 비뚤어진 이미지부터 고치십시오 >
이제 자신 안에 기적의 원천이 있음을 아십시오.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고 핑계는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비뚤어진 이미지부터 고치고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스가랴 4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나는 못해!”라고 하면 정말 못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믿고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안돼!”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더 기도하고 꿈과 비전을 뚜렷하게 하십시오. 또한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실패를 말하지도 말고, 실패를 말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교회와 가정을 통해 선교의 용장과 거룩한 큰손이 많이 배출되는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처럼 좋은 꿈을 꾸고 좋은 이미지와 환상을 품고 계속 믿음으로 기도하고 행동하면 그 꿈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서울에 한 부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말썽 많은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은 여러 남자와 사귀고 심지어는 오빠 친구들과도 관계를 했습니다. 부모들은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고,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목사님을 찾아 상담하자 목사님이 권면했습니다. “집사님! 기도 전에 딸에 대한 비뚤어진 이미지부터 고치고 기도하세요.”
그때부터 그 집사님은 딸을 더러운 딸, 창피한 딸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딸로 여기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눈으로 그 딸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그 딸을 바라보았습니다. 몇 달 후, 그 집사님이 예쁘고 현숙하게 보이는 숙녀를 데리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바로 탕자처럼 지내던 그 딸이었습니다.
그 딸이 간증했습니다. 자기가 방탕하게 산 것은 순전히 반항심을 가지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한 남자친구와 모텔에서 자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자신이 구역질나는 인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고 죽기 전에 가족을 한 번 보고 싶어 집에 와서 벨을 눌렀습니다.
엄마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난생 처음으로 자기를 보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고귀한 딸로 보는 것으로 금방 느껴졌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돌아와 주어서 고맙구나!” 너무 친절하고 따뜻한 그 한 마디를 듣고 그녀는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전에는 항상 야단만 맞고 책망만 받았는데 엄마가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날 그녀는 가족들의 환대와 사랑을 받고 마음이 녹으면서 철저히 회개하고 새 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어떤 환경과 어떤 사람을 볼 때 현실의 눈으로만 보고 어둡고 비뚤어진 이미지를 가지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으로 기도하면 소망의 기도보다는 한탄의 기도가 나오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도 좋은 것을 주실 수 없습니다.
이제 자신의 이미지부터 바꾸십시오! 또한 말과 생각을 바꾸고 “나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구원도 주시지만 복된 삶도 주십니다. 이제는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상처에 연연하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원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자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항상 성령님 안에서 풍성한 축복을 꿈꾸며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